물렁한 박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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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일 열리는 미생 배포전 행사에 나오는 해준백기 소설본 <사랑옵다> 샘플입니다!

현재  현장수령과 통판 선입금 예약 받고있습니다!

 

[폼 주소]

현장수령: http://me2.do/FUcCY4ox
통판: http://me2.do/GdEuPZ4j

 

 

감사합니다♥

 

기타 궁금한 점 트위터 @etc_tofu 나 이메일 winetee@naver.com 으로 연락주세요~!

 

 

 

 

 

 


 

 

 

 

 

덧대다

 

 

 

 

장백기는 그림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물감이, 그 중에서도 그것의 냄새가 좋았다. 약간의 기름기를 머금은 쾌쾌한 냄새. 옷이고 손톱 사이고 이미 찌들어버리면 잘 빠지지도 않는 이 지독한 냄새가 뭐가 좋냐. 며 부모님은 늘 질색 하곤 했지만 백기는 그러한 반응에 대해선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내가 좋다는데 뭐.
제 작업실에 들어오면 백기는 허공을 응시하다 마치 의식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깊게 들이마셔 폐가 부풀어 오르고, 절로 감기는 눈. 그 일련의 행동의 결과로 지어지는 표정은 참으로 고요했다. 그리고 냄새가 빠져나가는 게 아쉽다는 듯 내쉴 때에는 한없이 느리고 천천히. 후, 우.
오래되어 나뭇결이 하나둘씩 일어나 꺼칠거리기 시작한 나무 이젤은 습한 향이 가득 배어있었다. 그 곳에 가만히 놓인 하얀 캔버스를 마주하고 작은 의자에 앉으면 백기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등을 약간 구부정하게 한 채로 한 손에 든 붓을 성의 없게 까딱이던 백기가 진회색 빛의 물감이 둥글게 뭉쳐있는 팔레트에 붓을 가져다댄다. 어린 시절 TV에서 본 웬 외국 화가의 팔레트가 멋져 보여 사달라고 졸랐던 둥글넓적한 나무 팔레트가 이제는 멋지고 뭐고 무어라 색다른 감상을 뱉기엔 너무나 오래된, 그저 한없이 익숙한 백기의 동반자가 되어있었다.


공기 중에 노출되어 표면이 살짝 굳어 건조해 보이던 물감뭉치는 기름기를 잔뜩 머금은 붓털이 주는 힘에 의해 부드럽게 뭉개졌다. 동시에 코끝에 훅 끼쳐오는 진득한 물감냄새에 백기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물감이 범벅 된 붓끝이 향한 캔버스에 굵직한 선이 꽤나 과감하게 그려졌다. 단정한 손끝이 단단하게 붓을 쥐고 하얀 천을 천천히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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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특별할 것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지만 아이가 무언가 에도 흥미를 느껴하지 않는다는 것이 백기의 부모가 가진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갖고 싶어 하는 한참 유행인 장난감이고 독특한 재질감을 가지고 있는 신기한 책이고, 모두 사서 아이에게 들이밀어도 그저 몇 번 만져보다가 슥 밀어내곤 했던 아이었으니까.


백기의 흥미를 끌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어떤 것도 만족스런 결과를 끌어내진 못했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어린 아이임에도 아무것에도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그저 공허한 눈을 하고 있는 백기가 걱정이 되었던 부모는 부러 아이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녔더랬다.
그 노력이 빛을 본건지 어느 날 아이는 전에 없던 생기를 띄고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둥에 매인 빨간 천 때문에 더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게 영 아쉬웠는지 뒤꿈치를 들어 발돋움을 한 아이는 눈을 빛내며 제 앞에 놓인 커다란 그림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가득 채워진 붉은 빛깔에 매료되었는지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림을 향해 쭉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그림 속 무언가를 쥘 듯이 꽤나 다급하게.


당장 품에 넣어버릴 듯이 노골적인 소유욕을 보이는 아이를 위해 그림을 곧바로 구매한 백기의 어머니도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그 뒤부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마치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백기는 차근차근 그림에 흥미를 가져가기 시작했으니까.
제 방 벽 한편을 차지한 그림을 하루에 몇 시간이고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게 첫째였다. 모아 세운 무릎에 가만히 턱이며 볼 따위를 괴고 그림을 빤히 바라보는 백기의 눈은 이미 아이의 것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집중이라는 단어도 백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진 않아 보일정도로 백기는 그저 ‘몰입’. ‘몰입’ 했다. 눈앞에 있는 것의 색깔이나 형태 따위의 외적인 것을 보는 걸 넘어 캔버스의 질감 위에 쌓아진 물감의 뭉쳐진 존재감. 세월에 따라 바래진 색감과 살짝 벗겨진 칠 부분을 훑는 눈이 한없이 끈적함을 담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아이를 걱정해 백기의 엄마는 간식거리가 잔뜩 담긴 쟁반을 들고 오다 이내 방문 앞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발소리를 숨기지 않은 엄마의 기척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백기의 주변을 고요가 감싸고 있었다. 보는 이까지 절로 숨을 죽이게 되는 완전한 침묵. 귀도 촉감도 모조리 닫아버린 듯 가만히 눈만 데룩 굴리던 백기의 숨이 갑자기 터졌다. 후욱, 아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던 건지 종국에는 숨 끝에 연한 기침이 묻어난다. 뻑뻑하게 울려오는 눈가를 고 작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아이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닥에 널브러진 책가방 속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스케치북 쪽이었다.
단순히 학교에서 주어지는 미술 숙제를 위해서밖에 펴보지 않았던 스케치북으로 손을 뻗은 아이는 서툴게 깎여있는 연필을 정돈하듯 전동 연필깎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끈하게 깎인 나뭇결하며 흑심이 뾰족하게 솟아있는걸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는 종이 위에 벅찬 시작점을 알렸다. 사각, 종이를 긁어내리는 거친 소리에 어렸던 백기는 전율했다. 막무가내로 긁어내리는 탓에 금방 닳은 심은 몇 번이나 바닥을 드러내 나뭇결로 종이를 찍어 눌렀고, 백기는 다급하게 연필을 또 연필깎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떠한 형태를 그려내지 못하는 서툰 손길에 금방 종이는 까맣게 물들었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뒷장으로 넘겨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아이가 멈춘 건 기어이 스케치북이 바닥을 보였을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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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니?
라는 질문을 듣고 이제 막 물감을 뭉개 색을 섞던 백기가 붓을 쥔 손까지 우뚝 멈추고는 답을 내기위해 골몰한다. 이젠 제법 그리고자 하는 물체의 형태를 잡고, 한창 색을 스스로 연구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온 백기는 여전히 그림을 참으로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으음.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떠오르는 수많은 순간들에 순위를 매기기가 어려운 것인지 앓는 신음을 뱉던 백기가 턱을 괜스레 긁적이다 히죽 웃어보였다.

 

“오늘이요. 오늘.”
“오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제가 원하던 색을 만든 날이에요.


선생님 도움도 받지 않았어요. 저! 말하는 동안에도 신이 나는지 자랑하듯 아까 전 색칠까지 완성하고 말리느라 옆 책상에 두었던 그림을 들고 손가락으로 일일이 짚으며 연신 즐겁게 재잘거린다. 뿌듯함이 잔뜩 묻어나는 뽀얀 얼굴에 지어지는 미소는 역시나 어린아이다웠다.
처음 그림이란 것을 접했던 유치원 때를 지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음에도 백기는 여전히 미술에, 그림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 시들해질 법도 하고, 아무리 제 부탁으로 시작하게 된 미술수업임에도 욕심 많은 어머니 관리 하에 철저하게 짜인 시간표는 어린 아이에겐 벅찰 법도 했음에도 백기는 한 번의 지각도, 결석도 없이 매 순간을 충실히 즐겼다.
오늘만 해도 기뻤던 순간이면 갖고 싶었던 물건을 선물로 받았을 때라든지, 어디 기억에 남는 장소에 갔던지 하는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올법한 대답을 듣겠거니 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물어봤던 거였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고민 없이 내놓은 백기의 말은 새삼 충격으로 다가왔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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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무언가에 집착해 본적이 없던 백기에게 ‘집착할 수 있는’ 것이 생긴다는 건 동시에 과할정도의 몰입을 가져왔다. 단순한 취미생활에서 그칠 거라 생각했던 부모님의 예상을 가볍게 깨고 집착에 가까운 몰입 끝에 백기는 기어이 예고 합격장을 따냈다. 아이의 탄탄한 직업이나 높은 지위를 원한 건 백기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지만 구태여 아이의 몇 번 없던 고집을 꺾진 않았다. 어차피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끔 만들어봤자 고집이 쇠심줄보다도 질긴 백기에겐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일찍부터 포기한 걸지도 몰랐고. 그나마 다행인건 백기의 실력이 평범치 않다는 것에 있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현명한 머리는 기본적인 이론부터 스펀지처럼 흡수했고, 머릿속에 정리되어있는 이론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만한 꼼꼼한 손끝은 지식과 실력이 합쳐져 저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준 그림은 묘하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탄탄한 집안의 뒷바라지까지 합쳐진 백기는 나날이, 그리고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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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끈거리는 재질의 천보다 백기는 우둘투둘한 면으로 이뤄진 앞치마를 선호했다. 물감이 미끄러지면 괜히 옷이고 손이고 이곳저곳에 묻어 종종 그림을 상하게 하곤 했으니까.
도화지에서 캔버스로 바꾸게 된 건 유화를 접하면서 부터였다. 두껍게 물감을 쌓아가며 묵직함을 더하는 유화의 매력에 빠져 아주 작은 캔버스부터 백기의 앉은키만한 흰 캔버스 가득 제 생각을 쏟아내곤 했다.
거칠게 갈라지는 붓 끝이 주는 날카로운 느낌이 미치게 좋아 백기는 여러 번 선을 긋는 걸 멈추지 않았다. 밝은 밑 톤을 묵직한 어둠으로 덮어내고 그 위에 다시금 밝은 톤을 쌓아올리는 일련의 과정이 약간의 비약을 더하자면 마치 백기, 제 모습 같았으니까.
그림 그리는 게 마냥 행복하고 즐겁던 순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뜸하게 백기를 찾아왔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색을 하기엔 이미 많은 경험을 쌓았고, 칭찬을 받고 부러움의 시선을 받는 것엔 이미 무감해져있는 상태였고. 가장 큰 문제는 부러움의 시선이 저를 향한 질투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날아드는 걸 버티기엔 장백기의 멘탈은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독특하고 또래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백기를 향한 선생님들의 관심과 칭찬은 백기보다는 주변 아이들을 예민하게 자극했고, 그 질투의 화살이 주체인 백기에게 쏟아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친근한 눈빛이 더 이상 저를 향하지 않고, 저를 버젓이 눈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속닥이는 일련의 행동들에 너덜너덜하게 치인 백기가 택한 건 꽤나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이제 졸업까지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유학을 보내 달라 조르는 백기의 말에 또 무슨 변덕이냐며 부모님은 몇 번이나 반대했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했던가, 미련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독일로 실력증진 이라는 명목과 함께 떠난 백기는 상당히 홀가분해 보였다. 더 이상 뾰족한 시선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거긴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방식으로 실력을 쌓을 수 있게 되는 거니까. 혼자서 떠나는 유학이지만 그래도 꽤나 들떠있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러한 감정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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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장벽보다 두려운 건 색다른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였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심성은 저를 향해 꽂히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상당히 지쳐있었다. 새로 다니게 된 아트스쿨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커리큘럼도 색달랐고 자유롭게 작업실도 쓸 수 있었고, 무리 짓기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자기만 충실히 노력해서 뽑아낸 결과물이 가장 우선시 되는 그런 환경은 차라리 백기가 선호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통학하던 한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백기는 전 학년 기숙사제인 학교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부터 크고 작은 트러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1인실을 이용하고 싶었던 바람이 이루어지기엔 2인실이 기본인 곳이었고, 처음 만났던 룸메이트는 백기와 정반대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이였다. 시차에 허덕이긴 했지만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적응한 백기를 무시하듯 한밤중에 일어나 소란스럽게 떠들었고, 학교를 가기위해 일어나는 백기와 바통터치를 하듯 아침이나 한낮에 잠들던 녀석은 준비하느라 부스럭 거리는 백기에게 잔뜩 신경질을 내곤 했던 꽤나 뻔뻔한 이였다. 그 덕에 움찔거리며 눈치 보기 바빴고, 밤에 숙면을 취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었으니 예민한 감성이 쩌적 쩌적 갈라지는 건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결국 몇 달을 못 버티고 거의 울먹이는 얼굴과 함께 룸메이트를 바꿔 달라 청했고 그제야 조용해서 있는 듯 없는 듯 한 룸메이트와 꽤나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문제가 그것뿐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으니 백기는 유학생활이 시작 된지 몇 달 만에 진지하게 중도 포기를 고민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제 고집으로 시작되었던 유학이었고, 꽤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시작한 생활인데 여기서 포기한다면 부모님께도 엄청나게 혼쭐이 날게 뻔한 상황이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간신히 버텨냈다 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든 몇 년은 견뎠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사히 예술대학으로 진학도 했다. 어쨌든 배우고 싶었던 것도 배우고, 처음으로 개인 전시회도 열어보고. 평범치 않은 경험을 많이 쌓은 건 사실이었다. 그게 백기 저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는 글쎄, 알 수 없다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림을 그리면 행복한 아이였던 장백기가 의무감에 간신히 필드에서 버티고  있는 이로 전락할 줄은 저도 몰랐지만. 어렸을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내내 쏟아지던 칭찬세례는 유학생활과 동시에 뚝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백기에게 남은 건 자유였고, 틀에 박힌 것에만 익숙했던 아이에겐 그 자유는 마치 방치와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칭찬을 먹고 쑥쑥 자랐던 아이에게 영양분을 갑작스레 뺀것과 진배없었다.
결국 또 포기였다 포기. 자존심 때문이라도 포기란 단어를 입에 담지도 않았던 아이는 결국 스스로 그것을 인정했고, 또다시 중도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쌓인 커리어와 실력과는 상반되게 잔뜩 너덜거리는 멘탈을 수습조차 못한 채 장백기는 다시 한국으로 입국했다.


힘겨움에 허덕이면서도 여전히 어깨에 묵직하게 매달려있는 가방 속에 한가득 들어있는 미술도구며 크로키 북들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놓을 수가 없다는 게 허탈하기도 하고 아직은 괜찮구나. 도 싶고 참으로 복잡한 심정에 입술을 질근 깨물 수밖에 없었다.

 

*

 

“내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
“지금 당장 이 강의실에서 나가도 좋습니다.”
“.....네?”
“저도 수업에 불만이 많아 보이는 학생까지 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니까요.”
“지금 그게 학생에게 할 소리입니까...!”
“지금 그게 학생이 교수에게 할 태도인가요, 장백기 학생.”


그에 움찔 하면서도 매서운 눈을 숨기지 않는 백기를 보며 비죽, 꽤 심술궂은 웃음을 머금었다. 저리 느끼는 대로 다 표현해서야 어찌 살아가려고. 한심하기 짝이 없고, 참으로 어리고. 해준은 이 설전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것인지 알기에 백기와 마주하던 시선을 먼저 몸을 돌림으로써 끊어냈다. 제 뒤통수며 뒷목에 꽂히는 뜨거운 열기가 여전히 느껴지지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 치기에 집어 먹혀 어찌 행동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버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저 무덤덤한 목소리로 한 가지만 덧붙일 뿐이었다.


“수업 방해 그만하고 나갈 거면 나가고 계속 있을 거면 앉으세요.”


고저 없는 목소리가 여전히 서서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던 백기에게 날아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존댓말은 끊이지 않았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음에도 백기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분노로 몸이 떨리는 걸 느끼며, 무어라 반박하려 했음에도 저를 향해 불만의 소리를 터뜨리는 학생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이를 부득 갈면서도 의자에 털썩 앉을 수밖에 없던 백기가 떨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 백기 쪽엔 한조각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해준은 마저 강의를 이어나갔다. 화면에 띄워놓은 민화 속 호랑이의 매서운 눈빛이 어쩐지 저를 질책하는 것만 같아 백기는 이제 입술까지 꾹 앙다문 채로 고개를 숙여 교재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듣기 싫은 해준의 잔잔한 목소리는 계속 강의실에 울리고 있었다.
강해준. 저 교수는 늘 그랬다. 대체 저의 어떤 점이 그리도 마음에 차지 않는 건지 –백기가 보기엔- 사사건건 시비걸기 일쑤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짐작 가는 부분은 물론 있었다. 첫 과제를 제출하는 날 해준이 제시했던 과제문장에 이것저것 첨언을 달았었으니까. 이 당시 시대상을 봐서는 이 기법은 아닌 것 같은데요 교수님. 문장에 어패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따위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물론 저가 생각해도 건방진 부분이 있긴 했다. 그리고 저의 문제제기가 결국 틀렸던 것도 맞았고. 그렇다고 그걸 이제껏 끌고올건 또 뭔가. 어른스럽지 못하긴. 백기는 그때 해준이 줬던 무안이 다시금 생각이 나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뻔히 저를 바라보던 눈. 약간의 비웃음을 짓던 입술이 열리고 쏘아내던 잔잔한 음성.


“장백기 학생은 참, 잘난 척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인가 봅니다. 헌데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밀어붙이는 건 어디서 배운 겁니까?”


빌어먹을. 나쁜 새끼. 다시는 저 교수 수업을 듣나봐라. 학기마다 전공필수 과목을 하나이상 맡고 있는 강해준 수업을 피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백기는 어쨌든 그렇게 중얼거렸다. 안될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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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에 제출했던 글입니다!  2015.9.7

미술사 교수 강해준 X 유화전공 장백기

 

 

 

*해준백기 온리전 (10월 10일)에 나오는 소설본 "같이의 가치" 샘플입니다.*

*수정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뭐 꼭 집이 하나씩 있어야 합니까?”



예? 

멍하게 되묻는 저를 슬쩍 인상 긋고 바라보는 해준의 표정에 묻어나는 질책의 의미를 읽은 백기는 무어라 항변의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아니 그럼 대리님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말씀을 하셔야죠! 라고. 물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에 백기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장백기는 강해준을 이기는 방법 따윈 몰랐으니까 여기선 저가 한번 지고 들어갈 타이밍이었다. 어색하게 입 꼬리를 당겨 웃으며 순진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슬쩍 한 번 더 되묻는다. 

무슨, 말씀이세요? 역시나 평소처럼 동요 없는 표정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어. 아니 거의 처음이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준은 백기의 되물음에 꽤나 표정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굳게 닫혀있는 입매며 덤덤한 듯 보이는 무표정은 여전했지만 평소와 시선의 방향이 달랐다. 항상 시선과 함께 마음까지 몽땅 잡아 삼킬 듯이 곧았던 시선이 살짝 백기의 얼굴 옆쪽으로 엇나가 있는 게 너무도 확연히 보였다. 덩달아 당혹스런 표정을 지은 백기가 몸을 해준쪽으로 가까이 숙이자 딱 그만큼 뒤로 멀어진다. 그리곤 툭.



“원래 그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예?”

“같이 살자고요.”

“예?”



예? 예? 예? 한 가지 말밖에 하지 못하는 인형처럼 딱 그렇게 세 번 정도 더 의미없는 소리로 되묻자 해준은 시끄럽다는 듯 한번 혀를 한 후 단박에 입술을 비벼 누르며 백기의 벌려진 입을 다물게끔 했었다.



참 멋도 없으시지, 우리 대리님. 큭큭 다시 떠올리니 또 목구멍 저 아래부터 슬쩍슬쩍 간지러움과 함께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물론 해준은 꾸며내는 말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고, 드라마 대사처럼 멋진 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란 걸 알고는 있었음에도. 고백의 말이 될 수도 있는 쇼킹한 동거 제안을 어쩜 그리 멋없게 할 수 있는 건지 감탄, 또 감탄만 일 뿐이다. 목장갑을 끼고 스탠드를 한손에 든 채 어깨를 약간씩 떨며 웃고 있는 백기를 바라보는 해준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느껴지는 시선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백기가 해준을 보며 히죽 웃어보여도, 여전히 눈썹만 꿈틀할 뿐 의문스럽단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대리님! 이 스탠드는 서재 책상에 두면 됩니까?”

“예. …장백기씨 괜찮습니까? 오늘 영 이상하네요.”

“하하, 멀쩡하죠. 옙.”



이상해 보이는데. 설마 못 들었을까봐 친절하게 한 번 더 중얼거린 해준이 욕실용품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는 걸 보는 백기의 입 꼬리가 한 번 더 씰룩였다. 사실 어젯밤엔 기대돼서 잠도 설쳤는데. 물론 말했다간 제대로 된 수면이 우리 몸에 얼마나 필요한가로 시작하는 걱정 가득한 해준의 잔소리를 들을게 뻔해서 그저 합, 입을 다물고 서재 책상에 스탠드를 올려두곤 살짝 쌓인 먼지를 손바닥으로 훑을 뿐이었다. 


물론 그런 멋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건 백기 저였으니 해준을 뭐라 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냥 얌전히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안타깝게 그마저도 아니었다. 


자꾸만 예? 예? 되묻는 백기에게 짧게 키스하고 해준이 입술을 뗐을 때는 눈물 콧물 뚝뚝 흘려대며 이상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백기가 있었다. 저를 보며 해맑게 웃어주는 백기를 기대하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해준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었다. 그 울음을 거절의 의미로 생각했는지 짧은 순간동안 마구 떨리던 해준의 동공에서 상당한 번뇌와 우울함이 스쳐갔다. 그런 게 아니라 말하려 해도 입에선 끅, 흑. 따위에 물기 가득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고, 원하는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울기밖에 못하는 제 모습이 서러워서, 해준의 말을 듣고 흘리던 기쁨의 눈물은 금방 바보 같은 제 모습에 대한 속상함의 눈물로 바뀌어 있었다. 바보 장백기. 바로 예! 라고 얘기해도 시원찮을 텐데 지금 뭐하는 거야. 답답함에 스스로 가슴부근을 퍽퍽 내려치자 해준이 기겁하며 제지했다. 헐떡이며 우는 장백기와, 그런 장백기를 보고 별 생각을 다 하며 입술만 깨물고 있던 강해준. 다행히도 울음을 삼킨 백기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간신히 튀어나온 덕에 강해준의 고난에 가까운 고민은 금방 끝마쳐질 수 있었지만 그 짧은 순간동안 정말 놀란 건지 잔뜩 배어나와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이 백기의 목덜미와 등에 닿아왔고, 그대로 한숨과 함께 크게 끌어안는 해준이 있었다.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사 후 일주일간은 야근이나 외근이다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에 사실상 ‘새 집’에서 생활 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짧았다. 기껏해야 퇴근 후에서 기상 전 까지 시간 정도. 음식을 해먹기는커녕 집에 있어도 사용하게 되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자주 사용했던 건 욕실이나 침실 정도였기에 그다지 불편함이나 부족함을 모르고 생활했었지만. 이사 후 처음 맞는 주말 아침 해준과 백기는 집 주변에 있는 큰 마트로 부랴부랴 향할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일찍 퇴근했던 어젯밤. 월요일에 출근해서 처리해야할 서류와, 자재창고에 부품 등에 대해서 제법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소소하게 야식이나 해 먹을까 하는 마음에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직 제대로 된 식기세트조차 구비해 놓지 않았던 주방의 상태와 처음으로 마주했다.


각자의 집에서 쓰던 접시며 컵, 숟가락은 새로운 기분으로 새 집을 맞이하자! 하는 마인드와 함께 대부분 정리하고 들어왔기에 부엌 찬장에는 고작 커피 타먹을 때 썼던 머그컵 두 개와 작은 접시 두어 개뿐이었다. 휑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한 찬장 문을 급하게 닫고 그제야 두 사람은 집안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부엌과 별다를 게 없는 게 당연했다. 그나마 많이 사용했던 주방이 그 정도였으니까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있던 가구나, 각자가 가지고 온 짐들은 정리가 되어있기 보다는 그저 아무데나 ‘배치’ 되어 있을 뿐이었고, 실제로 생활하기에 꼭 필요한 생필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실제로 집에서는 커피 몇 번이나 마트에서 포장된 채로 사온 과일 정도밖에 먹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하자 야식이고 뭐고 당장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사야할 목록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호기롭게 목록이 적힌 쪽지를 들고 마트로 향한 것은 좋았으나 생각보다 큰 규모와 많은 사람들로 인해 이미 상당히 주눅 들어 있던 두 사람이 한참을 헤매다 애써 찾아낸 카트를 끌며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우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생활용품 코너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가자 필요한 것들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큼직한 공간이 보였다. 


어디부터 가야할지 눈이 핑핑 도는 느낌에 우선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쪽에 있는 곳부터 카트를 끌고 다가갔다.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식기세트와 두 사람이 쓰는데 필요한 용도의 접시를 카트에 조심스럽게 담아냈다. 집안일에서는 해준보다 훨씬 야무진 백기는 꼼꼼하게 메모에 적힌 목록을 살피다가 주방세제와 수세미까지 꼼꼼하게 챙겨 카트위에 올렸다. 접시가 불안하게 흔들거리고 있는 걸 걱정하며 살살 카트를 밀던 해준이 다음엔 뭘 사야하나 살피고 있는 백기의 손에 들린 쪽지를 어깨 너머로 빤히 쳐다봤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가며 적어온 결과였지만, 꼭 사야하는 목록을 적은 쪽지보다는 직접 마트에 와서 이것저것 살펴가며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들이 훨씬 많았다는 것에 둘은 머쓱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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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의 가치] 예약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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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백기] 쓴 커피

                     w. 박두부



스스로가 세운 계획은 웬만하면 지키고자 한다.

타인에겐 그게 집착으로 보일지언정 어쨌든 백기 저에겐 그 일련의 규칙적인 일들이 반복되지 않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으니까.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 백기는 가방을 내려두고 외투를 의자에 걸었다. 구김이 가지 않도록 손가락을 이용해서 어깨선을 잡아 펴고 손바닥으로 팡팡, 가볍게 쳐내는 손짓이 꽤나 가볍다. 역시나 오늘도 전 층에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15층 내에선 백기가 첫 출근인 듯 싶었다. 가동된 지 얼마 안되어 선선한 에어컨 바람, 사람들의 움직임에 의해 뽀얗게 떠오르는 먼지도 아직 이었고 창밖으론 선명한 하늘. 어느 하나 백기의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인간은 참 단순한 동물이지. 어쨌든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은 백기도 늘 공감하는 바였다. 그 시작이 아주 사소한 하루의 시작이더라도 그랬다. 알람이 울기 전에 일어나 산뜻하게 샤워를 하고, 주말에 백화점에 가서 구매했던 마음에 드는 패턴의 넥타이도 단정하게 매졌고. 출근길의 버스는 한산했고, 15층의 자동문을 지나친 첫 사람이 되었고. 백기는 스믈스믈 올라가는 입 꼬리를 막지 않았다. 휘파람을 잘 불지 못하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랄까. 즐거움을 소리로 표현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휘파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신 백기는 구두를 굴려 색다른 소리를 만들어냈다


, 따악. 경쾌하게 들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백기는 탐비실로 향했다. 달달한 설탕과 프림이 일정량씩 소분되어있는 믹스커피를 즐기곤 했지만 원래 묘한 도전을 하고픈 날이 있었고, 백기는 그게 바로 지금이라고 느꼈다. 혼자 마실 거니 쟁반은 필요가 없겠지. 습관처럼 위쪽 선반 문을 열기위해 올렸던 손을 내리고 백기는 조금 높은 길이의 종이컵을 빼들었다. 도전. 다시 한 번 중얼거린 뒤 백기는 곰곰이 석율의 몸짓을 떠올렸다. 분명 기계 뒤편의 물통에 물이 충분히 들었나를 살폈었지. 찰랑찰랑 반 이상의 투명한 물이 담겨있다. 그리고 원하는 커피를 선택하고. 에스프레소는 아무리 도전이 끌리는 날이라 하여도 무리였다. 실패가 뻔히 보이는 건 애초에 하지 않는 게 맞았으니 패스. 그냥 원두커피나 한잔 내리기로 마음먹는다. 버튼을 누르자 초록빛 불빛이 들어왔다. 한 번 더 꾹 누르니까 드드득, 원두 갈리는 소리와 함께 뱉어내는 진한 커피 원액을 어쩐지 뿌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쓴걸 애초부터 입에 대지도 않는 백기는 늘상 믹스커피를 마시는 자신을 놀려대는 석율을 떠올리고 가슴을 뿌듯하게 추켜올린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탓에 허리 즈음에 주름이 잡히는 것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는지 향긋한 향을 내며 종이컵에 얌전히 고여 있는 커피를 들어올렸다. 종이컵이 뜨거운 탓에 입구 쪽을 손가락을 감아쥐고 조심스럽게 입앞에 가져다댔다. 후우 후우, 쓴 것만큼이나 쥐약인 뜨거운 것을 후후 불며 식히고 드디어 대망의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리고 장백기는 딱 2.5초 만에 후회했다.

우읍. 종이컵을 한쪽 구석에 던지듯 내려놓고 입을 틀어막은 채로 탕비실 이곳저곳을 살피는 백기의 눈이 한없이 바쁘다. 개수대는 애초부터 바랄수도 없었고. 슬쩍 입구를 눈치 보듯 바라본 백기가 조심스럽게 쓰레기통에 여전히 머금고 있던 커피를 뱉어냈다. 퉤퉤. 혀끝이며 입 구석구석 남아있는 쓴맛이 사라지길 바라며 침을 모아 한 번 더 뱉어냈다. 쓴맛 없애기에 한껏 열중해 있던 백기가 입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눈을 들어 올린 순간 들어찬 해준의 모습에 헛숨이 들어 삼켜진다.

 


“....대리님.”

장백기씨, 뭐 합니까?”

, . 하하. 아닙, 아닙니다. 별거.”

 


본건지 못 본건지 해준의 질문은 평소처럼 간결했고, 물어놓고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백기 쪽으로 다가와 종이컵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오히려 찔리는 마음에 한걸음 뒤로 몸을 물린 건 백기였다. 맑은 소리와 함께 다시금 원두 기계가 울리고 해준이 놓은 종이컵에 커피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기대감을 잔뜩 담은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언제고 백기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보는 양 인상을 잔뜩 쓴 채 입을 합 다물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커피가 종이컵에 떨어지고 해준은 컵을 입에 가져대다 말고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백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할 말 있습니까?”

? ? . ...커피. 쓰지 않을까 해서요.”

늘 먹던 거라. 장백기씨는 웬일로 원두커피를 먹네요.”

……. 하하. …….”

 


저 한편에 밀려나있는 종이컵은 또 언제 봤는지 그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커피를 마시는 해준의 입 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눈치 챈게 분명해 보이는 표정에 백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젠장, 젠장. 좋았던 기분따윈 언제든 바닥에 처박힐 수 있단 걸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기회였다고 치자, 는 무슨 젠장!

 


부끄러움에 종이컵을 꽤 거칠게 잡아채고 백기는 흘리듯 뱉은 인사와 함께 다급하게 떠났다. 무슨 생각으로 쓴 커피를 도전한 건지. 가끔씩 과장님이 쥐어주는 카드와 함께 하는 커피심부름에서조차 봉긋하게 솟은 휘핑크림이 올려진 달디단 커피만 먹는 사람이. 한손에는 커피를 쥐고 반대쪽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해준은 또 입 꼬리를 올려 웃음 지었다. 책상 서랍에 있으려나. 며칠 전 동식이 억지로 쏟아 붓고 간 것들이 아직 남아있을 터였다. 딸기 맛이든 레몬 맛이든 장백기의 한없이 씁쓸한 입안을 헹궈주기엔 부족함이 없겠지. 해준은 어떻게 하면 장백기가 민망해 하지 않고 저가 준 사탕을 먹을까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며 종이컵을 수거함에 밀어 넣고 걸음을 옮겼다.

 


*


오랜만에 올려봅니다! 전력 참가는 오랜만이라 급하게 써보았네요 ㅠㅠ

제목짓는 센스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흑흑  



* * *


사랑니, 아래위턱의 영구치열 치아 중 가장 안쪽에 나오는 세 번째 큰 어금니. 백기는 푸른 컴퓨터 화면이 보여주는 사랑니의 정의를 읽다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눌러 그 창을 꺼버렸다. 위치는 지금 이런 설명 없이도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그딴 거 말고 제발 이 통증이 없어지는 방법 좀!


욱신 또다시 아릿한 통증이 백기의 어금니를 찔러왔다. 치통 따윈 생전 느낄 일 없을 거라 자부해왔던 건치의 상징 장백기였는데, -사실 건치인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미친 듯이 쑤셔오는 사랑니의 고통에 매일 밤 눈물 콧물 쏙 빼느라 백기는 요 며칠간 밤에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쓰으읍, 아파. 눈꼬리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않은 채 마우스 휠을 굴려 내려 건강 백과를 클릭했다. 그래, 건강 백과라면 내 아픔을 해소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은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백기는 어질어질한 눈을 한번 비볐다.


 ‘…. 큰 어금니 중 세 번째 위치인 제3대구치를 말하는데 구강 내에 제일 늦게 나오는 치아이다. 보통 사춘기 이후 17~25세 무렵에 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는 이성(異性)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때며 특히, 새로 어금니가 날 때 마치 첫사랑을 앓듯이 아프다고 하여 “사랑니”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또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시기에 나온다고 하여…….’


욱신! 아, 방금 이건. 진, 짜 아팠다. 바늘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뜨개질바늘같이 끝이 뭉뚝한 것으로 어금니를 사정없이 찔러오는 듯한 둔한 격통에 백기가 황급히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볼 살이 밀려 입술이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눌렀음에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심해지는 치통에 기어이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은 백기가 신음했다. 맞닿은 어금니를 여러 번 꽉꽉 물어도 기존의 끔찍한 치통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딴 게 첫사랑의 통증이라면 백기 저는 평생 첫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전원을 끌힘조차 없어 대충 화면만 끈 백기가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몸을 눕혔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이젠 한기까지 도는 몸을 다급히 두꺼운 이불로 감싸며 백기는 절로 나오는 앓는 소리를 참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비척거리며 들린 약국에서 무조건 잘 드는, 효과 좋은 진통제를 달라며 울먹인 백기가 용법도, 용량조차 보지 않은 채 손에 잡히는 대로 씹어 삼켜낸 약은 이빨의 통증을 가라앉혀주긴 커녕 빈속을 자극해 구토감만 유발할 뿐이었다. 깨 있어 봐야 고통에 괴로워할 뿐이란 게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제발, 제발 잠들어 버리자. 억지로 눈을 꾹 눌러 감는다. 속눈썹이 눈꺼풀에 눌려 잔뜩 구겨지는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고. 이불 속에 잔뜩 웅크린 몸을 숨기며 백기가 이를 악물었다.




* * *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두려움에 풀려버릴 것만 같은 다리를 애써 다잡으며 백기는 가까스로 병원 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백기는 병원이라면 질색을 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감기는 약국에서 약만 타 먹으며 버텼고, 주사는 꼭 맞아야 하는 필수 예방접종이 아니면 아예 맞아야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워낙 티를 내지 않는 탓에 주변 사람들은 백기가 병원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어린아이였을 때도 묘한 자존심만 세서 두려움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엄마에게 끝까지 괜찮다고, 무섭지 않다고 말하며 버텼단 말을 듣긴 했었다. 어렸을 때는 치기어린 마음에 버티기라도 했지, 어른이 되어서 병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으면 좋으련만 공포심을 태연함으로 가장하는 방법에만 능숙해졌으니.


 아플 때도 미련하게 상비약만 먹으며 버티는 백기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이 눈앞을 스쳐 갔다. 그래도 무서운 걸 어쩌랴. 내쉬는 한숨에는 깊은 고뇌와 두려움이 서려 있었지만 벌써 며칠 내내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느꼈던 괴로움의 크기가 조금 더 커 백기는 용기 내어 한 걸음을 뗀다. 위잉, 별다른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진동문의 예민한 센서를 원망스럽게 바라본 백기는, 문 열리는 소리에 일어난 간호사와 눈을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도 구면이라고 어쩐지 반가움마저 드는 건 서늘한 공기가 가득한 치과 내에서 그나마 저를 반겨줄 따듯한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장백기씨, 맞으시죠? 일찍 오셨네요?”

“아, 네. 조금 서둘러 와서….”

“10분 정도 뒤에 수술 끝나시니까 그때 선생님과 상담하시러 들어가시면 될 것 같아요. “

“아, 네 감사합니다.”



일찍 오긴 한 모양이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자 약속한 시각보다 약 30분 정도 앞선 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에서 일을 하는 동안의 치통은 견딜수 있을 만한 미미한 것이어서 백기는 오랜만에 제법 즐거워하고 있었다. 


근데 무슨 장난인지. 퇴근하고 치과로 걸어오는 그 짧은 거리부터 슬슬 이빨이 욱신거려 오기 시작하더니 접수를 마치고 대기하려 의자에 앉아있는 이 순간부터 긴장감이 차올라 배도 꼬일 듯 욱신거리고 있었다. 마치 몽둥이질이 쏟아지듯, 목구멍 바로 옆에 있는 사랑니 자리가 두근두근 떨리며 진동하고 있어 백기는 덜컥 겁을 집어삼켰다. 표현력이 부족한 백기 저로서는 이 통증의 정도를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견디기 힘들 정도란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밀려드는 통증에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들썩이고 다리를 구르길 몇 분. 마스크를 낀 서늘한 얼굴이 수술실에서 나타났다. 피곤한 듯 손목을 돌리며 한숨을 쉬던 이가 백기를 보고 마스크를 벗어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일찍 오셨네요.”




*



백른전 (7/19일)에 나오는 해준백기 소설본 [어디까지나 치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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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둘 6

 



백기는 지금 심히 불안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도망가고픈 심정에 절로 들썩여지는 엉덩이를 간신히 소파에 눌러 앉히고 긴장된 표정으로 리모컨만 꾹꾹 눌러댔다. 그 옆에서 백서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요플레를 먹다 화면에 스쳐지나가듯 비친 캐릭터를 용케 보고는 팔에 매달려 뽀로로를 신나게 외쳐대고 있었다. 평소라면 백서의 재미난 반응을 보려 일부러 천천히 놀려대다가 울기 직전인 백서에게 선심 쓰듯 채널을 돌려 줬을 백기가 심란한 마음에 한숨만 푹 쉬며 만화채널로 돌린 뒤 소파로 풀썩 몸을 뉘였다. 아빠가 이리 심란한걸 아는지 모르는지 와아아! 하며 들썩 들썩 뽀로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백서가 얄미워 괜히 백서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여져 있는 요플레 통을 낚아채 그대로 후룩 각도를 기울여 마셔버렸다. 신나서 엉덩이를 흔들던 백서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왔지만 이미 텅 비어버린 요플레 통만 건넨 백기의 눈에 당혹감에 아빠와 빈 통만 번갈아 바라보는 아이의 눈이 보였다.

 


아빠, 이거 없어요.”

, 아빠도 먹고 싶어서 먹었어.”

“...백서 건데.”

백서 어제까지 아야 했지요? 그렇게 차가운 거 먹으면 또 아야, 한다?”

히잉.”


 

불만스레 바라보긴 하지만 맑디맑은 뽀로로의 인사말이 들려오자 요플레의 상실은 금방 잊고 바닥에 앉아서 화면에 열중하는 백서의 뒷머리를 슥 쓰다듬던 백기의 눈이 다시 한 번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로 향한다.


오후 1250. 오겠다고 한 시간에서 대략 10분정도 남은 시간이지만 백기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시간에 딱 맞춰 오는 일이란 건 강해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출근시간도 늘 10분정도 일찍 오고, 점심시간이 끝나는 시간보다 10분정도 먼저 들어와 양치와 손까지 깨끗하게 마친 뒤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는 해준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떠올라 백기는 불안한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자꾸만 시선이 부엌 싱크대며 거실 테이블 위, 소파 위에서 바닥으로 향한다. 혹시나 지저분한 건 없나 다시 한 번 눈으로 점검하던 백기가 갑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간 뒤 손에 쥐고 나온 건 탈취제였다.


딱히 말로 지적을 하지 않았어도 백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늘상 석율과 함께 갖는 흡연타임에서 옷 곳곳에 배인 담배냄새를 해준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별다른 표현이 없는 사람이라 눈치도 한참 뒤에나 챈 저를 얼마나 자책했던가.


꼼꼼하게 고른 향이 아니라 장을 보다가 탈취제란 단어만 보고 아무 통이나 집어넣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콤콤한 먼지 냄새보단 낫겠다 싶어 백기는 백서가 있는 방향을 피해 공중에 칙칙 몇 번이고 분사했다. 살짝 내려앉은 흰 분사물이 사라지고 공기 중에 차오른 향기는 다행히도 특이한 향은 아니었다. 너무 강한 향이었으면 지독하다 생각해 역효과이지 않을까 마음에 걸렸을 텐데 살짝 나는 꽃향기가 만족스러워 백기가 웃음 지으려는 순간 영롱한 차임벨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과거 늦잠을 자 학교로 전력질주 하던 와중 교문을 통과하기 직전 들렸던 종소리도, 수능시험장에서 십분 남았다고 알려주는 시험관들의 냉철한 목소리도, 첫 면접장에서 제 차례라 알려주던 냉정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그 어떠한 순간도 지금 순간만큼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 결론 내리며 백기는 탈취제를 다급히 방 안으로 던져 넣고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어쩜 이리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을까.


백기가 현관 앞에 서서 밍기적 거리느라 문이 열리지 않음에도 해준은 다시 한 번 더 벨을 눌러 독촉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현관문만 응시하며 열리길 기다릴 뿐이었다.출발하기 전에 한 전화로 백기가 집에 있다는 사실은 확인 했으니 괜히 재촉할 것 없었다. 아이를 살피는 지도 모르지. 해준이 고개를 숙여 제 발끝을 잠시 응시하는 동안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백기의 상기된 얼굴이 빼꼼 보였다.


 

“...대리님, 오셨습니까?”

, 쉬는 날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며 조금 비껴선 백기를 스쳐 현관으로 들어선 해준이 신발을 벗느라 고개를 조금 숙인 순간에 말캉한 촉감이 허벅지에서 느껴져 흠칫, 티나지 않게 몸을 떨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동그란 두상과 포근해 보이는 머리칼. 저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며 작은 손아귀로 해준의 옷가지를 한 번 더 단단히 잡아오는 아이. 문을 닫고 막 옆으로 다가온 백기가 놀라 기함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를 잡고 끌어당기려는 걸 해준이 손짓으로 막으며 아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본다는 듯 제 볼을 찔러오는 경악에 가까운 백기의 시선이 느껴졌음에도 해준은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여전히 신발은 벗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아저씨다.”

안녕? 이름이 뭐야?”

나는 장백서 에요. 아저씨는요?”

강해준. 아가, 아저씨 신발 벗고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네에.”

 


착하네, 해준의 말에 잡았던 옷에서 손을 떼고 또닥또닥 거실을 향해 걸어가는 백서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린 해준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해 백기는 괜히 뒷목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아이를 대하는 강해준은 백기에게 참으로 낯선 이였기에 밀려오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해 백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신발을 벗고 그런 백기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 해준의 묘한 눈빛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백기가 다급하게 뒤를 따랐다.

 


대리님, 커피 괜찮으세요?”

, . 부탁해요.”

 


건성으로 대답한 해준은 부엌으로 들어가는 백기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소파 밑바닥에 앉아 뽀로로를 보며 고개를 흔들고 있던 백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에게 다가오는 해준을 고개를 돌려 바라보던 백서가 빙긋, 크게 웃고는 제 옆 바닥을 작은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여기 앉으라 종용했다.


제 아이가 저리도 낯을 가리지 않았던가. 당황스러움에 부엌에서 커피를 타던 백기가 혀를 깨물 뻔한 아찔한 상황 속에서도 해준은 침착하고 다정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옆에 앉을까? 바닥은커녕 소파도 재질과 안락함을 따져가며 앉을 것 같던 해준이 백서가 두드린 딱딱한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투박한 손길이 아닌 천천히 부드럽고 상냥하게 쓰다듬어가는 손이 좋았는지 백서가 다시 한 번 히죽 웃곤 엉덩이를 끌어 해준과 조금 더 밀착해 앉았다. 부엌에서 보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끓어오른 뜨거운 물에 커피가루를 녹이던 백기가 그 낯선 모습에 괜히 근질거려 오는 뒷목을 북북 긁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그림이 아닐 수 없지.

 


 

*

 


아니라니까.”

맞는 데에…….”

아니야. 백서 몰랐어?”

“..... 정말요?”

, 정말이지. 로이가 제일 힘이 세.”

“...아닌데, 폴리가 제일 세다고 그랬는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무얼 그리 토론하나 했더니 백서가 뽀로로 만큼이나 좋아하는 로보카 폴리 주인공중 누가 더 센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그게 중요해? 해준과 백서가 진지하게 토론의 장을 만들고 있는 곳의 열기는 너무나 뜨거워 백기는 피하듯 소파위로 몸을 올려 앉았다.손에 든 커피에서 펄펄 나던 김이 수그러들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백서도 해준도 제 앞에 놓인 요구르트와 커피는 입도 대지 않은 채였다.

 


저기, 다들 마실 것 좀 마시고 하시죠.”

 


그제야 백서가 이야기를 나누느라 발갛게 물든 볼을 하고선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으려 한다. 자꾸만 헛손질을 하며 낑낑거리기에 백기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해준이 백서가 빨대를 쥔 손 위를 겹쳐 잡곤 차근차근 일러주기 시작했다.

 


너무 세게 하면 빨대가 휘어지니까 이렇게. 천천히.”

와아아, 아저씨 잘한다.”


 

해준을 존경스럽단 표정으로 바라본 백서가 방긋 웃으며 요구르트를 입에 물었다. 그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능숙하게 아이 스스로 할 수 있게끔 지도하는 해준의 능력이 감탄스러워 백기는 멍하니 해준의 단정한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다시 백서가 만화에 빠져들자 해준이 아이의 뒷머리를 슥 가볍게 쓰다듬고 몸을 일으켜 백기 옆자리에 앉았다. 무게감에 약간 소파가 꺼지고 사무실 옆자리여도 파티션으로 나눠진 꽤나 물리적 정신적 신체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두 사람으로써는 회식 때 옆자리에 앉은 것 이후로 가장 가까운 거리였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백기의 몸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펄떡이는 심장을 애써 잡아 누르며 백기가 어제부터 궁금했던 물음을 꺼냈다.

 


“-대리님……. 그런데 갑자기 저희 집엔 왜..”

사수가 돼서 갑자기 조퇴한 부사수가 걱정돼서 온 거라고 치죠.”

“..., ...?”

그리고 꽤나 놀랐습니다.”

?”

장백기씨한테 아이가 있다는 거요.”


 

내내 멍하게 되묻기만 하던 백기의 목소리가 딱 멎었다. 그제야 제가 어떤 폭탄 발언을 했는지 깨달은 백기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 맞다.


백서가 아프단 충격에 제가 사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야 깨닫다니.


어젯밤 전화에서는 해준의 갑작스런 방문 소식에 벙찌고, 오늘 아침에는 부산스럽게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해준이 방문 후에 자연스럽게 백서와 놀아주는 모습을 보고 해준의 색다른 모습에 당황하며 아무생각 없이 커피나 홀짝이고 있던 건 저였다.

생각해보면 해준은 또 얼마나 황당했을까. 갑작스레 가방을 쥐고 회사 밖으로 뛰쳐나가려 한 부사수. 그 어이없는 행동에 무슨 짓이냐며 다그치는 사수 앞에서 아이처럼 울며 제 아이를 거론한 부사수. 생각해보니 눈물이 가득 차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보였던 해준의 당황한 표정은 여전히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있었다. 그 전까진 제법 홍조를 매달고 있던 백기가 급격히 하얗게 질려가는 걸 무심한 눈으로 본 해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꺼냈다.

 


,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 대리님.”

이곳저곳에 떠들고 다닐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장백기씨?”

“..., 그건 아닙니다.”

말했듯이 놀라긴 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있겠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심하게도 목이 멨다. 자꾸만 목구멍 너머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감정을 눌러 담느라 백기는 애먼 침이나 두어 번 꿀꺽 꿀꺽 삼켜대고 있었다. 순식간에 서먹해진 분위기를 깬 건 어느새 끝난 만화를 보며 아쉬워하던 백서였다.

 


아빠아, 배고파요.”

“-, 어어?”

그러고 보니 벌써 2시가 다 되어가네요.”

백서 배고파? 그럼 간단하게……. , 대리님은 식사 하셨어요?”

안 먹긴 했는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손님이신데……. 혹시 핫케이크 좋아하세요?”

가리는 건 없습니다.”

 


해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백기가 부엌으로 향하자 백서가 졸졸 뒤를 따른다. 아빠, 백서 딸기도 먹고 싶어요. 졸졸 따르는 아이의 타박이는 발소리가 들리고 그를 눈으로 쫒던 해준이 몸을 일으켜 뒤를 따랐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으며 백서가 내민 빈 요구르트 통을 받아 분리수거 통에 넣던 백기가 해준이 다가오는 걸 보고 눈이 조금 커졌다.

 


, 대리님. 앉아계셔도 되는데…….”

뭐 도와주지 않아도 됩니까?”

, 괜찮습.”

아빠! 백서가 도와줄래요.”

 


괜찮다며 거절하려던 백기의 말은 그대로 백서의 우렁찬 목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씩씩하게 발표하듯 손까지 번쩍 들고 눈을 빛내는 아들을 보고 차마 괜찮다는 말을 뱉기 어려워 백기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재료를 식탁으로 하나둘 옮겼다. 신난 듯 식탁의자로 향하며 조잘거리는 백서가 이끄는 손길에 해준도 백서의 옆 의자에 앉았고 백기는 적당한 무게감이 있는 유리 볼을 백서의 앞으로 놓은 뒤 계란을 볼 모서리에 두드려 깼다. 두 개의 계란이 볼에 담기고 몇 번 해봤는지 능숙하게 거품기를 쥔 백서가 계란을 휘적휘적 젓기 시작했다.

 


흘리지 않게 살살 해야 해. 알지?”

네에!”


 

대답은 늘 씩씩하지. 피식 웃은 백기가 냉장고로 가 우유를 꺼내왔다. 사놓은 지 이틀정도 되었는데 벌써 절반정도밖에 남지 않은 병 우유에 백기가 양을 가늠한다. 한 컵 정도는 반죽에 넣고, 핫케이크 먹을 때 마셔야하니까, 세 컵 정도는 나오겠지. 백서가 조심스레 휘저은 계란물이 노랗게 물들자 백기가 우유를 한 컵 부었다.

 


백서 또 조심해서 섞어봐.”

네에!”


 

백서에게 주의를 주고 우유병을 식탁에 내려놓는 순간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집게로 집어놓은 핫케이크 봉지를 열고 내용을 꼼꼼히 살피던 해준이 백서가 휘젓고 있던 계란과 우유가 적당히 섞이자 빈 컵에 가루를 조심스레 붓는다. 조금의 흘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컵과 가루를 신중한 눈으로 바라보는 해준의 얼굴은 사무실에서 서류를 볼 때와 닮아있었다.


컵 윗부분까지 가루를 가득 채웠음에도 주변은 한없이 깨끗하다. 제법 뿌듯한 표정으로 컵을 바라보는 해준의 표정에 백기는 입술 안쪽을 깨물어 간신히 웃음을 참아냈다. 그렇게 해준이 신중히 담은 가루 한 컵, 두 컵을 볼에 붓고 백서와 함께 저어 반죽을 만든 백기가 잠시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해준이 한손으론 반죽이 담긴 볼, 한손으론 백서의 손을 잡고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식탁 주변에 튄 반죽들을 행주로 훔치던 백기가 다급하게 말리려 했지만 해준은 이미 프라이팬을 꺼내 인덕션 위에 올려둔 뒤 불을 킨 뒤였다. 인덕션이 붉게 가열되고 백기가 미리 꺼내두었던 버터를 조금 떠 프라이팬에 올리자 칙, 소리와 함께 향긋한 버터향이 코를 찔렀다.

 


우와아, 아저씨 요리사 같다!”

뜨거우니까 백서 구경하려면 조금 떨어져서 해야 해, 알겠지?”

네에!”

 


해준의 말에 고분고분 다리를 뒤로 물린 백서가 까치발을 들어 프라이팬을 살피느라 애를 쓴다. 코팅하듯 연노란 빛의 버터물이 프라이팬 바닥을 감싸고 해준이 국자를 이용해 반죽을 예쁜 동그라미 모양으로 올렸다. 대리님, 제가 하겠습니다. 뒤늦게 해준의 뒤로 다가와 안절부절 발을 동동거리는 백기에게 괜찮습니다, 단호한 말만 던진 채 해준은 뒤집개를 이용해서 반죽을 뒤집었다.


딱 좋은 주황색과 갈색 사이의 반죽. 도톰하게 익은 핫케이크를 접시에 옮겨 담는 해준은 조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일련의 과정들을 계속 행했다.백서 것은 크기까지 조절해서 작고 예쁜 동그라미를 만들어준 해준이 마지막으로 두세층으로 쌓인 핫케이크 위에 버터조각 조금과 메이플 시럽을 올렸다. 따끈하고 폭신한 핫케이크를 보고 백서가 작은 손으로 열심히 박수를 치며 기뻐한다.

 


와아, 아저씨! 우리 아빠보다 잘해요!”

“....장백서...!”


 

식탁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컵에 우유를 따르던 백기가 장난스럽게 으스스한 목소리를 꾸며내 백서를 부르자 다시 한 번 함박웃음을 지은 아이가 인덕션이 꺼졌나 꼼꼼히 확인하고 접시를 챙겨 돌아선 해준의 다리에 매달렸다.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접시를 들지 않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곤 어서 가서 먹어야지. 백서 배고프다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도닥였다. 해준의 말에 후닥 식탁으로 달려가 제 의자에 앉은 백서가 먼저 컵을 들어 우유를 마신다.


그리곤 해준이 놔준 접시에 담긴 잊지 않고 딸기까지 올린 핫케이크를 볼까지 붉히며 바라보는 게 귀여워서 웃은 백기가 나이프로 백서가 먹기 좋게 핫케이크를 자른 뒤 포크로 한 조각 찍어 입에 넣어줬다. 빵빵한 볼을 오물거리던 백서가 히죽 웃는 모습을 막 식탁에 앉은 해준이 보고 만족스럽게 웃음 짓는다.

 


대리님, 감사합니다. 제가 대접해야 하는데..”

간단한 건데요 뭐. 장백기씨도 어서 먹어요.”

.”

 


그제야 망설이던 백기도 핫케이크를 조심스레 먹는다. 사르르 녹는 맛. 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백기의 입 꼬리가 움찔 움찔 떨리는 걸 혹여나 민망해할까 못 본 채 하며 해준은 열심히 먹느라 시럽이 묻은 백서의 볼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막 휴지를 내밀려는 백기보다 그 손가락을 쭉 빤 해준의 행동이 빨랐다. 대리님이 맞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오늘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탓에 백기는 또다시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저렇게 남의 피부에 닿은 시럽을 휴지에 닦는 게 아니라 빨아 먹는다? 아무리 아이의 것이라 해도? 충격에 침을 꿀꺽 삼킨 백기는 강대리님이 아이를 (의외로) 좋아하시는구나.’ 하고 저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뒤 핫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부엌이며 식탁에 넘쳐흐르는 향기는 달콤했고, 백서는 미열도 없이 깨끗하게 감기가 나았으며, 엄청난 부담을 가져다 준 해준의 방문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꽤나 예민한 심성을 가진 백기에게 어색한 듯 분명하게 몰아치는 따듯함에 나른하게 기분이 풀린 백기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따듯한 오후였다.

 



**

5편을 올린지 한달이 넘어가서야 6편을 가져오다니 흑흑(쭈글

아이에게 다정한 강대리님의 의외의 모습에 내내 당황하는 백기였습니다! 

 

 

[해준진] 戀心 (연심) (for.렘피님)

                              w. 박두부




“할멈, 그 벚꽃이야기 말이야. 자네가 내게 했던가.”



밤낮 가리지 않은 오입질과 계간 질에 미쳐 날뛰더니 지난날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들어와 제 방에 틀어박혀 반나절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아 집안 종들의 애를 잔뜩 타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진이 이미 미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야장의만 달랑 걸친 채 느릿한 걸음으로 툇마루에 걸터앉아 뱉은 소리란 게 참으로 묘한 것이라, 주변에서 비질을 하던 종놈들도, 진이 행여나 고뿔이라도 걸릴까 푸른빛의 포를 들고 종종걸음 하며 다가온 늙은 여종조차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진을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턱을 손에 괴고는 멀거니 마당과 담장 따위를 바라보는 진의 눈에 가득 머금어진 싱숭생숭함이 퍽 낯설었다. 




*



왜 대체 내가 이곳에 있는 건지 참으로 모르겠구나. 입으로 연신 중얼거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돌이 깨져 곳곳이 울퉁불퉁 거리는 담벼락에 손을 대고 빼꼼 건너편을 바라보던 진이 누군갈 보고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 덕에 손바닥이 깨진 돌에 긁혀 작은 상처가 났지만 진은 그것보다는 아플 정도로 쿵쿵 울리는 심장을 연신 때려대기 바빴다. 이, 이게 무엇이란 말이냐. 왜 저 치를 보고...!


으리으리하다 표현하기엔 조금은 부족한, 높지만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담장은 강대감 집안의 성품을 잘 표현하는 듯 했다. 높은 권세를 휘두르지 않고 아랫것들을 잘도 보살피기로 도성 내 소문이 자자한 강대감집 이야기는 아무리 주변에 관심이 없는 진이어도 귀동냥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댁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그리 청렴결백하다더라. 여색엔 관심도 없고 그저 학문을 쌓고 몸을 단정히 하는 것에만 그리 관심을 가지더라 하는 등. 제 무리들이 괜한 투기 섞인 담화를 할 때도 진은 그저 무심하게 술만 삼켜 넘겼다. 참 재미도 없게 사는구나. 그리 가볍게만 생각해 넘겼었다. 그랬는데. 


가슴을 몇 번 내려치던 진이 그제야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곤 다시 담벼락 밖으로 빼꼼 고개를 잡아 뺐다. 저가 방정을 떨어댈 때 얼마나 걸음이 빠른 건지 어느새 점만 하게 보이는 강대감댁 아들의 모습에 진이 황급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걸이조차 단정했다. 모래며 돌이 대중없이 놓인 흙바닥을 걸으며 어쩜 저리 발소리 하나 흘리지 않을까. 마치 쓸데없는 과정 따윈 모조리 생략이라도 한 듯 한 간결한 움직임이었다. 그와 달리 이리저리 숨고 뛰어다니느라 어느새 신 곳곳에 묻은 흙이 부끄러워져 진이 잠시 허리를 숙이고 흙을 털곤 또 걸음을 바삐 옮겼다. 펄럭이는 도포자락이 햇빛을 만나 은은한 윤기가 흘렀고, 소매 틈에 끼운 책은 정갈했다. 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듯 한 윤곽에 진이 제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여종을 재촉해 최대한 단정한 색감과 모양새의 옷을 입고 나온지라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진은 해준을 처음 본 날 제 옷차림을 상기하고 볼을 붉게 물들였다. 천천히 붉은 염료라도 떨군 듯 볼 중앙에서부터 천천히 얼굴 전체로 퍼져가는 붉은 빛은 부끄러움 보단 수치의 감정이 짙었다. 


저를 어찌 봤을까. 


해가 중천에 뜬 한낮부터 옷을 풀어 헤쳐 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저를. 그때 때 아닌 봄바람만 아니었어도. 그래서 옷자락만 휘날리지 않았더라도. 문득 그에게 보인 맨 몸이 신경 쓰여 진은 주먹을 쥐어 제 이마를 콩콩 때렸다. 또 주변은 왜 하필이면 분홍빛 벚꽃이 가득해 저를 싱숭생숭하게 하는지.


아차, 또 놓칠 뻔 했다. 퍼석하고 모래가 짓이겨지는 소리를 내며 진은 다급히 내달렸다. 

아니, 놓쳤나?



몇 번이나 고개를 두리번거려도 익숙한 뒷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아둔하게 지난날을 후회하다 눈앞의 중요함을 놓치다니. 그대로 벙찐 채 서있는 진의 어깨가 둥글게 쳐졌다. 벚꽃이 다 무어라고.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여럿의 입을 거쳐 퍼진 낭설이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는 게지. 자책에서부터 원망으로까지 흘러간 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역시 저와 맞지 않는 짓을 한 게 문제겠지. 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나 데리고 몸을 섞지 않으면 도무지 이 더러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 이젠 답답하게 목을 죄어오는 것 같은 저고리를 풀어 헤치려던 순간 진의 어깨에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묘한 짜증이 들끓던 와중에 제 어깨를 잡아오는 힘이 달가울 리는 없었던 지라 진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팔을 강하게 쳐냈다. 



“-어딜, 함부…….”

“아, 놀랐다면 미안합니다.”



찰싹하는 제법 매서운 소리와 함께 주춤 뒤로 밀린 몸의 주인에게서 단정한 음성이 들렸다. 내내 뒤만 쫒던 이. 함께 마주볼 일이 또 생기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 강대감댁 아들 강해준. 얼굴을 확인하고 되레 몸을 물린 건 진이었다. 손가락을 몇 번 주억거리다 제 팔에 껴있던 책을 단단히 잡는 손이 붉어진 게 신경 쓰여 진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을 해온건 해준 이었지만 어찌됐든 몸에 붉은 자욱을 만든 건 저였으니. 



미안한 마음이 넘실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애먼 손톱 주변의 여린 살들만 꼬집으며 괴롭히던 진의 볼이 발갛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해준이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놀라게 해서.”

“...아, 아닙니다. 별거.”

“그저 아까부터 자꾸만 뒤를 좇으시기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해서…….”

“!”



아뿔싸. 제 서툰 잠행은 이미 저 사내에게 진즉 들켜버렸었나보다. 저의 뒤를 자꾸만 쫒는 낯선 이를 어찌 생각했을까. 그날의 만남을 혹여나 저만 기억한다면 저 이에겐 정말로 처음 보는 사내가 저를 따라다니는 거였으니. 밀려드는 창피감에 진의 귀 끝까지 열기가 차올랐다. 



“....니까.”

“예?”

“착각이라도 한겝니까!! 제, 제가 왜 댁 뒤를 따라다니겠습니까!”



해준의 단정한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간다. 허나 그 당혹감이 진의 가슴에 퍼져나가는 부끄러움의 크기와 비교할 수 있을까.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수치심에 잔뜩 절어 진의 머릿속이 흐물거린다. 저가 무슨 말을 뱉는지도 모른 채 해준을 흘기다 고개를 푹 숙이다를 반복하던 진이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달음박질 쳤다. 볏짚만 깔린 창고에서 사내의 것을 품고 신음을 흘리는 걸 아비에게 들켰을 때도, 긴 몽둥이로 두들겨 맞느라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집 앞 마당이며 길거리를 기어 다녔을 때도, 이정도로 벌겨 벗겨진 느낌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저 치가  대체 뭐 길래 저에게 이런 감정을 주는지. 


달리느라 요동치는 몸짓 탓에 강하게 씹힌 입술은 부풀다 못해 피가 새어나왔지만 진은 한참이나 그대로 내달렸다. 시장통 길 한가운데에서 멈춘 발이 느릿하게 땅을 구른다. 시익, 거친 숨이 터지는 순간 옷소매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엉망으로 너덜거리는 입술을 훔쳐냈다. 저를 황당하게 보는 해준의 시선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쫒고자 머리를 휘적 여러 번 털어내자 팔랑, 무언가 가볍게 진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절로 가는 눈길 끝에 걸리는 건 분홍빛을 머금은 꽃잎. 제 손바닥 안에서 어롱 거리던 그것이 땅바닥에 추락해서 굴러다니는 모습에 기어이 진의 눈가가 흐릿하게 젖어들었다.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그게 무슨 지독한 농(弄)인가…….”  




역시나 낭설은 낭설일 뿐이지.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띤다. 잠잠함을 얼굴에 덧대고 너덜거리는 심장을 숨기려 해도 떨리는 목소리만은 차마 갈무리가 되지 않는지 이내 입을 꾹 다무는 진의 볼이 푹 팼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벚꽃은 진을 감싸지 못하고 천천히 땅으로 향한다. 어른거리는 분홍빛이 괴로워 진이 눈을 질근 감았다.





벗 그리워 벚꽃인가

님 그리워 벚꽃인가

 

벚꽃닢 피날때 찾아온 님

벚꽃닢 지려니 떠나가네

 

올때는 봄소식 전하더니

갈때는 눈물만 전하더라

 

소소한 바람에도 흩날리는 벚꽃잎

스러지는 꽃잎 슬퍼 무상한듯 하늘보니

벚꽃잎은 아니뵈고 님얼굴만 떠오르네


                               (-벚꽃, 하영란) 




***



렘피님께서 써주신 初恋 ( http://another-hardboiled.tistory.com/128 ) 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삽질하는 김진 하핫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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