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덧대다

 

 

 

 

장백기는 그림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물감이, 그 중에서도 그것의 냄새가 좋았다. 약간의 기름기를 머금은 쾌쾌한 냄새. 옷이고 손톱 사이고 이미 찌들어버리면 잘 빠지지도 않는 이 지독한 냄새가 뭐가 좋냐. 며 부모님은 늘 질색 하곤 했지만 백기는 그러한 반응에 대해선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내가 좋다는데 뭐.
제 작업실에 들어오면 백기는 허공을 응시하다 마치 의식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깊게 들이마셔 폐가 부풀어 오르고, 절로 감기는 눈. 그 일련의 행동의 결과로 지어지는 표정은 참으로 고요했다. 그리고 냄새가 빠져나가는 게 아쉽다는 듯 내쉴 때에는 한없이 느리고 천천히. 후, 우.
오래되어 나뭇결이 하나둘씩 일어나 꺼칠거리기 시작한 나무 이젤은 습한 향이 가득 배어있었다. 그 곳에 가만히 놓인 하얀 캔버스를 마주하고 작은 의자에 앉으면 백기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등을 약간 구부정하게 한 채로 한 손에 든 붓을 성의 없게 까딱이던 백기가 진회색 빛의 물감이 둥글게 뭉쳐있는 팔레트에 붓을 가져다댄다. 어린 시절 TV에서 본 웬 외국 화가의 팔레트가 멋져 보여 사달라고 졸랐던 둥글넓적한 나무 팔레트가 이제는 멋지고 뭐고 무어라 색다른 감상을 뱉기엔 너무나 오래된, 그저 한없이 익숙한 백기의 동반자가 되어있었다.


공기 중에 노출되어 표면이 살짝 굳어 건조해 보이던 물감뭉치는 기름기를 잔뜩 머금은 붓털이 주는 힘에 의해 부드럽게 뭉개졌다. 동시에 코끝에 훅 끼쳐오는 진득한 물감냄새에 백기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물감이 범벅 된 붓끝이 향한 캔버스에 굵직한 선이 꽤나 과감하게 그려졌다. 단정한 손끝이 단단하게 붓을 쥐고 하얀 천을 천천히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

 

 

시작은 특별할 것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지만 아이가 무언가 에도 흥미를 느껴하지 않는다는 것이 백기의 부모가 가진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갖고 싶어 하는 한참 유행인 장난감이고 독특한 재질감을 가지고 있는 신기한 책이고, 모두 사서 아이에게 들이밀어도 그저 몇 번 만져보다가 슥 밀어내곤 했던 아이었으니까.


백기의 흥미를 끌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어떤 것도 만족스런 결과를 끌어내진 못했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어린 아이임에도 아무것에도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그저 공허한 눈을 하고 있는 백기가 걱정이 되었던 부모는 부러 아이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녔더랬다.
그 노력이 빛을 본건지 어느 날 아이는 전에 없던 생기를 띄고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둥에 매인 빨간 천 때문에 더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게 영 아쉬웠는지 뒤꿈치를 들어 발돋움을 한 아이는 눈을 빛내며 제 앞에 놓인 커다란 그림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가득 채워진 붉은 빛깔에 매료되었는지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림을 향해 쭉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그림 속 무언가를 쥘 듯이 꽤나 다급하게.


당장 품에 넣어버릴 듯이 노골적인 소유욕을 보이는 아이를 위해 그림을 곧바로 구매한 백기의 어머니도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그 뒤부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마치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백기는 차근차근 그림에 흥미를 가져가기 시작했으니까.
제 방 벽 한편을 차지한 그림을 하루에 몇 시간이고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게 첫째였다. 모아 세운 무릎에 가만히 턱이며 볼 따위를 괴고 그림을 빤히 바라보는 백기의 눈은 이미 아이의 것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집중이라는 단어도 백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진 않아 보일정도로 백기는 그저 ‘몰입’. ‘몰입’ 했다. 눈앞에 있는 것의 색깔이나 형태 따위의 외적인 것을 보는 걸 넘어 캔버스의 질감 위에 쌓아진 물감의 뭉쳐진 존재감. 세월에 따라 바래진 색감과 살짝 벗겨진 칠 부분을 훑는 눈이 한없이 끈적함을 담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아이를 걱정해 백기의 엄마는 간식거리가 잔뜩 담긴 쟁반을 들고 오다 이내 방문 앞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발소리를 숨기지 않은 엄마의 기척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백기의 주변을 고요가 감싸고 있었다. 보는 이까지 절로 숨을 죽이게 되는 완전한 침묵. 귀도 촉감도 모조리 닫아버린 듯 가만히 눈만 데룩 굴리던 백기의 숨이 갑자기 터졌다. 후욱, 아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던 건지 종국에는 숨 끝에 연한 기침이 묻어난다. 뻑뻑하게 울려오는 눈가를 고 작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아이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닥에 널브러진 책가방 속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스케치북 쪽이었다.
단순히 학교에서 주어지는 미술 숙제를 위해서밖에 펴보지 않았던 스케치북으로 손을 뻗은 아이는 서툴게 깎여있는 연필을 정돈하듯 전동 연필깎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끈하게 깎인 나뭇결하며 흑심이 뾰족하게 솟아있는걸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는 종이 위에 벅찬 시작점을 알렸다. 사각, 종이를 긁어내리는 거친 소리에 어렸던 백기는 전율했다. 막무가내로 긁어내리는 탓에 금방 닳은 심은 몇 번이나 바닥을 드러내 나뭇결로 종이를 찍어 눌렀고, 백기는 다급하게 연필을 또 연필깎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떠한 형태를 그려내지 못하는 서툰 손길에 금방 종이는 까맣게 물들었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뒷장으로 넘겨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아이가 멈춘 건 기어이 스케치북이 바닥을 보였을 즈음이었다.

 

 

*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니?
라는 질문을 듣고 이제 막 물감을 뭉개 색을 섞던 백기가 붓을 쥔 손까지 우뚝 멈추고는 답을 내기위해 골몰한다. 이젠 제법 그리고자 하는 물체의 형태를 잡고, 한창 색을 스스로 연구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온 백기는 여전히 그림을 참으로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으음.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떠오르는 수많은 순간들에 순위를 매기기가 어려운 것인지 앓는 신음을 뱉던 백기가 턱을 괜스레 긁적이다 히죽 웃어보였다.

 

“오늘이요. 오늘.”
“오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제가 원하던 색을 만든 날이에요.


선생님 도움도 받지 않았어요. 저! 말하는 동안에도 신이 나는지 자랑하듯 아까 전 색칠까지 완성하고 말리느라 옆 책상에 두었던 그림을 들고 손가락으로 일일이 짚으며 연신 즐겁게 재잘거린다. 뿌듯함이 잔뜩 묻어나는 뽀얀 얼굴에 지어지는 미소는 역시나 어린아이다웠다.
처음 그림이란 것을 접했던 유치원 때를 지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음에도 백기는 여전히 미술에, 그림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 시들해질 법도 하고, 아무리 제 부탁으로 시작하게 된 미술수업임에도 욕심 많은 어머니 관리 하에 철저하게 짜인 시간표는 어린 아이에겐 벅찰 법도 했음에도 백기는 한 번의 지각도, 결석도 없이 매 순간을 충실히 즐겼다.
오늘만 해도 기뻤던 순간이면 갖고 싶었던 물건을 선물로 받았을 때라든지, 어디 기억에 남는 장소에 갔던지 하는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올법한 대답을 듣겠거니 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물어봤던 거였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고민 없이 내놓은 백기의 말은 새삼 충격으로 다가왔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

 

지금껏 무언가에 집착해 본적이 없던 백기에게 ‘집착할 수 있는’ 것이 생긴다는 건 동시에 과할정도의 몰입을 가져왔다. 단순한 취미생활에서 그칠 거라 생각했던 부모님의 예상을 가볍게 깨고 집착에 가까운 몰입 끝에 백기는 기어이 예고 합격장을 따냈다. 아이의 탄탄한 직업이나 높은 지위를 원한 건 백기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지만 구태여 아이의 몇 번 없던 고집을 꺾진 않았다. 어차피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끔 만들어봤자 고집이 쇠심줄보다도 질긴 백기에겐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일찍부터 포기한 걸지도 몰랐고. 그나마 다행인건 백기의 실력이 평범치 않다는 것에 있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현명한 머리는 기본적인 이론부터 스펀지처럼 흡수했고, 머릿속에 정리되어있는 이론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만한 꼼꼼한 손끝은 지식과 실력이 합쳐져 저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준 그림은 묘하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탄탄한 집안의 뒷바라지까지 합쳐진 백기는 나날이, 그리고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

 

미끈거리는 재질의 천보다 백기는 우둘투둘한 면으로 이뤄진 앞치마를 선호했다. 물감이 미끄러지면 괜히 옷이고 손이고 이곳저곳에 묻어 종종 그림을 상하게 하곤 했으니까.
도화지에서 캔버스로 바꾸게 된 건 유화를 접하면서 부터였다. 두껍게 물감을 쌓아가며 묵직함을 더하는 유화의 매력에 빠져 아주 작은 캔버스부터 백기의 앉은키만한 흰 캔버스 가득 제 생각을 쏟아내곤 했다.
거칠게 갈라지는 붓 끝이 주는 날카로운 느낌이 미치게 좋아 백기는 여러 번 선을 긋는 걸 멈추지 않았다. 밝은 밑 톤을 묵직한 어둠으로 덮어내고 그 위에 다시금 밝은 톤을 쌓아올리는 일련의 과정이 약간의 비약을 더하자면 마치 백기, 제 모습 같았으니까.
그림 그리는 게 마냥 행복하고 즐겁던 순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뜸하게 백기를 찾아왔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색을 하기엔 이미 많은 경험을 쌓았고, 칭찬을 받고 부러움의 시선을 받는 것엔 이미 무감해져있는 상태였고. 가장 큰 문제는 부러움의 시선이 저를 향한 질투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날아드는 걸 버티기엔 장백기의 멘탈은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독특하고 또래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백기를 향한 선생님들의 관심과 칭찬은 백기보다는 주변 아이들을 예민하게 자극했고, 그 질투의 화살이 주체인 백기에게 쏟아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친근한 눈빛이 더 이상 저를 향하지 않고, 저를 버젓이 눈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속닥이는 일련의 행동들에 너덜너덜하게 치인 백기가 택한 건 꽤나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이제 졸업까지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유학을 보내 달라 조르는 백기의 말에 또 무슨 변덕이냐며 부모님은 몇 번이나 반대했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했던가, 미련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독일로 실력증진 이라는 명목과 함께 떠난 백기는 상당히 홀가분해 보였다. 더 이상 뾰족한 시선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거긴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방식으로 실력을 쌓을 수 있게 되는 거니까. 혼자서 떠나는 유학이지만 그래도 꽤나 들떠있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러한 감정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

 

언어의 장벽보다 두려운 건 색다른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였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심성은 저를 향해 꽂히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상당히 지쳐있었다. 새로 다니게 된 아트스쿨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커리큘럼도 색달랐고 자유롭게 작업실도 쓸 수 있었고, 무리 짓기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자기만 충실히 노력해서 뽑아낸 결과물이 가장 우선시 되는 그런 환경은 차라리 백기가 선호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통학하던 한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백기는 전 학년 기숙사제인 학교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부터 크고 작은 트러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1인실을 이용하고 싶었던 바람이 이루어지기엔 2인실이 기본인 곳이었고, 처음 만났던 룸메이트는 백기와 정반대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이였다. 시차에 허덕이긴 했지만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적응한 백기를 무시하듯 한밤중에 일어나 소란스럽게 떠들었고, 학교를 가기위해 일어나는 백기와 바통터치를 하듯 아침이나 한낮에 잠들던 녀석은 준비하느라 부스럭 거리는 백기에게 잔뜩 신경질을 내곤 했던 꽤나 뻔뻔한 이였다. 그 덕에 움찔거리며 눈치 보기 바빴고, 밤에 숙면을 취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었으니 예민한 감성이 쩌적 쩌적 갈라지는 건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결국 몇 달을 못 버티고 거의 울먹이는 얼굴과 함께 룸메이트를 바꿔 달라 청했고 그제야 조용해서 있는 듯 없는 듯 한 룸메이트와 꽤나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문제가 그것뿐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으니 백기는 유학생활이 시작 된지 몇 달 만에 진지하게 중도 포기를 고민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제 고집으로 시작되었던 유학이었고, 꽤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시작한 생활인데 여기서 포기한다면 부모님께도 엄청나게 혼쭐이 날게 뻔한 상황이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간신히 버텨냈다 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든 몇 년은 견뎠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사히 예술대학으로 진학도 했다. 어쨌든 배우고 싶었던 것도 배우고, 처음으로 개인 전시회도 열어보고. 평범치 않은 경험을 많이 쌓은 건 사실이었다. 그게 백기 저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는 글쎄, 알 수 없다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림을 그리면 행복한 아이였던 장백기가 의무감에 간신히 필드에서 버티고  있는 이로 전락할 줄은 저도 몰랐지만. 어렸을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내내 쏟아지던 칭찬세례는 유학생활과 동시에 뚝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백기에게 남은 건 자유였고, 틀에 박힌 것에만 익숙했던 아이에겐 그 자유는 마치 방치와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칭찬을 먹고 쑥쑥 자랐던 아이에게 영양분을 갑작스레 뺀것과 진배없었다.
결국 또 포기였다 포기. 자존심 때문이라도 포기란 단어를 입에 담지도 않았던 아이는 결국 스스로 그것을 인정했고, 또다시 중도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쌓인 커리어와 실력과는 상반되게 잔뜩 너덜거리는 멘탈을 수습조차 못한 채 장백기는 다시 한국으로 입국했다.


힘겨움에 허덕이면서도 여전히 어깨에 묵직하게 매달려있는 가방 속에 한가득 들어있는 미술도구며 크로키 북들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놓을 수가 없다는 게 허탈하기도 하고 아직은 괜찮구나. 도 싶고 참으로 복잡한 심정에 입술을 질근 깨물 수밖에 없었다.

 

*

 

“내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
“지금 당장 이 강의실에서 나가도 좋습니다.”
“.....네?”
“저도 수업에 불만이 많아 보이는 학생까지 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니까요.”
“지금 그게 학생에게 할 소리입니까...!”
“지금 그게 학생이 교수에게 할 태도인가요, 장백기 학생.”


그에 움찔 하면서도 매서운 눈을 숨기지 않는 백기를 보며 비죽, 꽤 심술궂은 웃음을 머금었다. 저리 느끼는 대로 다 표현해서야 어찌 살아가려고. 한심하기 짝이 없고, 참으로 어리고. 해준은 이 설전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것인지 알기에 백기와 마주하던 시선을 먼저 몸을 돌림으로써 끊어냈다. 제 뒤통수며 뒷목에 꽂히는 뜨거운 열기가 여전히 느껴지지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 치기에 집어 먹혀 어찌 행동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버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저 무덤덤한 목소리로 한 가지만 덧붙일 뿐이었다.


“수업 방해 그만하고 나갈 거면 나가고 계속 있을 거면 앉으세요.”


고저 없는 목소리가 여전히 서서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던 백기에게 날아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존댓말은 끊이지 않았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음에도 백기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분노로 몸이 떨리는 걸 느끼며, 무어라 반박하려 했음에도 저를 향해 불만의 소리를 터뜨리는 학생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이를 부득 갈면서도 의자에 털썩 앉을 수밖에 없던 백기가 떨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 백기 쪽엔 한조각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해준은 마저 강의를 이어나갔다. 화면에 띄워놓은 민화 속 호랑이의 매서운 눈빛이 어쩐지 저를 질책하는 것만 같아 백기는 이제 입술까지 꾹 앙다문 채로 고개를 숙여 교재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듣기 싫은 해준의 잔잔한 목소리는 계속 강의실에 울리고 있었다.
강해준. 저 교수는 늘 그랬다. 대체 저의 어떤 점이 그리도 마음에 차지 않는 건지 –백기가 보기엔- 사사건건 시비걸기 일쑤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짐작 가는 부분은 물론 있었다. 첫 과제를 제출하는 날 해준이 제시했던 과제문장에 이것저것 첨언을 달았었으니까. 이 당시 시대상을 봐서는 이 기법은 아닌 것 같은데요 교수님. 문장에 어패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따위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물론 저가 생각해도 건방진 부분이 있긴 했다. 그리고 저의 문제제기가 결국 틀렸던 것도 맞았고. 그렇다고 그걸 이제껏 끌고올건 또 뭔가. 어른스럽지 못하긴. 백기는 그때 해준이 줬던 무안이 다시금 생각이 나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뻔히 저를 바라보던 눈. 약간의 비웃음을 짓던 입술이 열리고 쏘아내던 잔잔한 음성.


“장백기 학생은 참, 잘난 척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인가 봅니다. 헌데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밀어붙이는 건 어디서 배운 겁니까?”


빌어먹을. 나쁜 새끼. 다시는 저 교수 수업을 듣나봐라. 학기마다 전공필수 과목을 하나이상 맡고 있는 강해준 수업을 피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백기는 어쨌든 그렇게 중얼거렸다. 안될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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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에 제출했던 글입니다!  2015.9.7

미술사 교수 강해준 X 유화전공 장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