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해준진] 戀心 (연심) (for.렘피님)

                              w. 박두부




“할멈, 그 벚꽃이야기 말이야. 자네가 내게 했던가.”



밤낮 가리지 않은 오입질과 계간 질에 미쳐 날뛰더니 지난날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들어와 제 방에 틀어박혀 반나절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아 집안 종들의 애를 잔뜩 타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진이 이미 미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야장의만 달랑 걸친 채 느릿한 걸음으로 툇마루에 걸터앉아 뱉은 소리란 게 참으로 묘한 것이라, 주변에서 비질을 하던 종놈들도, 진이 행여나 고뿔이라도 걸릴까 푸른빛의 포를 들고 종종걸음 하며 다가온 늙은 여종조차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진을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턱을 손에 괴고는 멀거니 마당과 담장 따위를 바라보는 진의 눈에 가득 머금어진 싱숭생숭함이 퍽 낯설었다. 




*



왜 대체 내가 이곳에 있는 건지 참으로 모르겠구나. 입으로 연신 중얼거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돌이 깨져 곳곳이 울퉁불퉁 거리는 담벼락에 손을 대고 빼꼼 건너편을 바라보던 진이 누군갈 보고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 덕에 손바닥이 깨진 돌에 긁혀 작은 상처가 났지만 진은 그것보다는 아플 정도로 쿵쿵 울리는 심장을 연신 때려대기 바빴다. 이, 이게 무엇이란 말이냐. 왜 저 치를 보고...!


으리으리하다 표현하기엔 조금은 부족한, 높지만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담장은 강대감 집안의 성품을 잘 표현하는 듯 했다. 높은 권세를 휘두르지 않고 아랫것들을 잘도 보살피기로 도성 내 소문이 자자한 강대감집 이야기는 아무리 주변에 관심이 없는 진이어도 귀동냥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댁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그리 청렴결백하다더라. 여색엔 관심도 없고 그저 학문을 쌓고 몸을 단정히 하는 것에만 그리 관심을 가지더라 하는 등. 제 무리들이 괜한 투기 섞인 담화를 할 때도 진은 그저 무심하게 술만 삼켜 넘겼다. 참 재미도 없게 사는구나. 그리 가볍게만 생각해 넘겼었다. 그랬는데. 


가슴을 몇 번 내려치던 진이 그제야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곤 다시 담벼락 밖으로 빼꼼 고개를 잡아 뺐다. 저가 방정을 떨어댈 때 얼마나 걸음이 빠른 건지 어느새 점만 하게 보이는 강대감댁 아들의 모습에 진이 황급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걸이조차 단정했다. 모래며 돌이 대중없이 놓인 흙바닥을 걸으며 어쩜 저리 발소리 하나 흘리지 않을까. 마치 쓸데없는 과정 따윈 모조리 생략이라도 한 듯 한 간결한 움직임이었다. 그와 달리 이리저리 숨고 뛰어다니느라 어느새 신 곳곳에 묻은 흙이 부끄러워져 진이 잠시 허리를 숙이고 흙을 털곤 또 걸음을 바삐 옮겼다. 펄럭이는 도포자락이 햇빛을 만나 은은한 윤기가 흘렀고, 소매 틈에 끼운 책은 정갈했다. 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듯 한 윤곽에 진이 제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여종을 재촉해 최대한 단정한 색감과 모양새의 옷을 입고 나온지라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진은 해준을 처음 본 날 제 옷차림을 상기하고 볼을 붉게 물들였다. 천천히 붉은 염료라도 떨군 듯 볼 중앙에서부터 천천히 얼굴 전체로 퍼져가는 붉은 빛은 부끄러움 보단 수치의 감정이 짙었다. 


저를 어찌 봤을까. 


해가 중천에 뜬 한낮부터 옷을 풀어 헤쳐 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저를. 그때 때 아닌 봄바람만 아니었어도. 그래서 옷자락만 휘날리지 않았더라도. 문득 그에게 보인 맨 몸이 신경 쓰여 진은 주먹을 쥐어 제 이마를 콩콩 때렸다. 또 주변은 왜 하필이면 분홍빛 벚꽃이 가득해 저를 싱숭생숭하게 하는지.


아차, 또 놓칠 뻔 했다. 퍼석하고 모래가 짓이겨지는 소리를 내며 진은 다급히 내달렸다. 

아니, 놓쳤나?



몇 번이나 고개를 두리번거려도 익숙한 뒷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아둔하게 지난날을 후회하다 눈앞의 중요함을 놓치다니. 그대로 벙찐 채 서있는 진의 어깨가 둥글게 쳐졌다. 벚꽃이 다 무어라고.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여럿의 입을 거쳐 퍼진 낭설이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는 게지. 자책에서부터 원망으로까지 흘러간 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역시 저와 맞지 않는 짓을 한 게 문제겠지. 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나 데리고 몸을 섞지 않으면 도무지 이 더러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 이젠 답답하게 목을 죄어오는 것 같은 저고리를 풀어 헤치려던 순간 진의 어깨에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묘한 짜증이 들끓던 와중에 제 어깨를 잡아오는 힘이 달가울 리는 없었던 지라 진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팔을 강하게 쳐냈다. 



“-어딜, 함부…….”

“아, 놀랐다면 미안합니다.”



찰싹하는 제법 매서운 소리와 함께 주춤 뒤로 밀린 몸의 주인에게서 단정한 음성이 들렸다. 내내 뒤만 쫒던 이. 함께 마주볼 일이 또 생기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 강대감댁 아들 강해준. 얼굴을 확인하고 되레 몸을 물린 건 진이었다. 손가락을 몇 번 주억거리다 제 팔에 껴있던 책을 단단히 잡는 손이 붉어진 게 신경 쓰여 진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을 해온건 해준 이었지만 어찌됐든 몸에 붉은 자욱을 만든 건 저였으니. 



미안한 마음이 넘실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애먼 손톱 주변의 여린 살들만 꼬집으며 괴롭히던 진의 볼이 발갛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해준이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놀라게 해서.”

“...아, 아닙니다. 별거.”

“그저 아까부터 자꾸만 뒤를 좇으시기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해서…….”

“!”



아뿔싸. 제 서툰 잠행은 이미 저 사내에게 진즉 들켜버렸었나보다. 저의 뒤를 자꾸만 쫒는 낯선 이를 어찌 생각했을까. 그날의 만남을 혹여나 저만 기억한다면 저 이에겐 정말로 처음 보는 사내가 저를 따라다니는 거였으니. 밀려드는 창피감에 진의 귀 끝까지 열기가 차올랐다. 



“....니까.”

“예?”

“착각이라도 한겝니까!! 제, 제가 왜 댁 뒤를 따라다니겠습니까!”



해준의 단정한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간다. 허나 그 당혹감이 진의 가슴에 퍼져나가는 부끄러움의 크기와 비교할 수 있을까.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수치심에 잔뜩 절어 진의 머릿속이 흐물거린다. 저가 무슨 말을 뱉는지도 모른 채 해준을 흘기다 고개를 푹 숙이다를 반복하던 진이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달음박질 쳤다. 볏짚만 깔린 창고에서 사내의 것을 품고 신음을 흘리는 걸 아비에게 들켰을 때도, 긴 몽둥이로 두들겨 맞느라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집 앞 마당이며 길거리를 기어 다녔을 때도, 이정도로 벌겨 벗겨진 느낌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저 치가  대체 뭐 길래 저에게 이런 감정을 주는지. 


달리느라 요동치는 몸짓 탓에 강하게 씹힌 입술은 부풀다 못해 피가 새어나왔지만 진은 한참이나 그대로 내달렸다. 시장통 길 한가운데에서 멈춘 발이 느릿하게 땅을 구른다. 시익, 거친 숨이 터지는 순간 옷소매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엉망으로 너덜거리는 입술을 훔쳐냈다. 저를 황당하게 보는 해준의 시선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쫒고자 머리를 휘적 여러 번 털어내자 팔랑, 무언가 가볍게 진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절로 가는 눈길 끝에 걸리는 건 분홍빛을 머금은 꽃잎. 제 손바닥 안에서 어롱 거리던 그것이 땅바닥에 추락해서 굴러다니는 모습에 기어이 진의 눈가가 흐릿하게 젖어들었다.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그게 무슨 지독한 농(弄)인가…….”  




역시나 낭설은 낭설일 뿐이지.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띤다. 잠잠함을 얼굴에 덧대고 너덜거리는 심장을 숨기려 해도 떨리는 목소리만은 차마 갈무리가 되지 않는지 이내 입을 꾹 다무는 진의 볼이 푹 팼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벚꽃은 진을 감싸지 못하고 천천히 땅으로 향한다. 어른거리는 분홍빛이 괴로워 진이 눈을 질근 감았다.





벗 그리워 벚꽃인가

님 그리워 벚꽃인가

 

벚꽃닢 피날때 찾아온 님

벚꽃닢 지려니 떠나가네

 

올때는 봄소식 전하더니

갈때는 눈물만 전하더라

 

소소한 바람에도 흩날리는 벚꽃잎

스러지는 꽃잎 슬퍼 무상한듯 하늘보니

벚꽃잎은 아니뵈고 님얼굴만 떠오르네


                               (-벚꽃, 하영란) 




***



렘피님께서 써주신 初恋 ( http://another-hardboiled.tistory.com/128 ) 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삽질하는 김진 하핫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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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성준] 생일

단문2015. 6. 9. 00:43


“불, 만지지마. 뜨거우니까.”



몇 번이나 반복되는 경고임에도 식탁 의자에서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자꾸만 들썩거리는 통에 벌써 10분이 넘도록 성냥 끝은 촛불과 맞닿지 못하고 있었다. 성냥을 긁어 불꽃을 내자마자 눈을 빛내며 입으로 후, 후우. 불어대는 지라 지금 기준의 손가락에 쥐여진 성냥이 딱 6번째 새 성냥이었다. 



“후, 불지도 마.”

“네, 네에, 성, 성주니 안붑, 붑니다아. 후우, 안합니다.”

“한번만 더 불면, 생일축하 노래 안한다.”



진심을 담아 기준이 엄하게 뱉은 말에 그제야 성준이 입을 꾹 다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 손바닥으로 꾸욱 코 밑부터 턱까지 눌러 막는 모습에 기준이 안심하곤 성냥갑에 성냥을 긁었다. 칙, 마찰음과 함께 붉은 불이 일렁이고 성준의 엉덩이가 다시 한 번 들썩였지만 이번엔 기특하게도 참아내고 있었다. 물론 바닥을 다다다 구르는 발은 여전했지만. 


저리 안절부절 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묘한 심술이 고개를 들어 기준은 일부러 천천히 촛불에 불을 붙였다. 고작 스무 개 남짓 되는 촛불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생일축하 노래와 촛불 끄는 걸 꼭 하고 싶었는지 간신히 참아낸 성준이 동의를 구하듯 기준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성준이, 불 끄고 와.”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였던 손을 내리고 후다닥 달려가서 부엌 불을 끄고 다시 뛰어온 성준의 입에 함박웃음이 물려있다.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맞붙이고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눈이 꼼꼼하게 촛불을 살피는 중이었다. 기준이 먼저 운을 띄자 성준이 신나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약간은 더듬지만 제법 완벽하게 부르는 게 신기해 기준이 노래를 마친 성준을 향해 박수를 두어 번 쳐주었다.



“...혀, 형아아. 성, 성준이 이제, 후, 후우 합니다.”

“너무 강하게 말고 입술 모으고. 응, 그렇게.”

“후우, 해도 되, 요오?”

“응.”



기준의 허락을 끝까지 기다리던 성준이 케이크 앞으로 고개를 붙여 바람을 후후 불었다. 행여나 앞머리가 탈까 기준이 성준의 이마를 슬쩍 손바닥으로 밀어내도 고개는 여전히 뻣뻣했다.


촛불이 다 꺼지고 희뿌연 연기가 공기 중에 퍼지자 성준이 킁킁 냄새를 맡다가 코를 다급히 막으며 우는소리를 냈다. 그런 성준을 슬쩍 보며 입 꼬리를 올린 기준이 촛불을 빼내자 성준의 고개가 다시금 바짝 다가왔다. 



“....서, 성, 성준, 성준이. 딸기, 딸기 먹습니다.”

“딸기랑 또 뭐 먹을래.”

“초, 초코도 성준이, 먹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부분을 콕 집으며 손가락으로 몰래 생크림을 찍어 입에 가져가는 성준을 눈감아주며 기준이 접시에 예쁘게 케이크를 담아 성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먼저 손이 나가려는걸 기준이 손등을 찰싹, 쳐 저지한 뒤 포크를 내밀었다. 서툴게 손에 포크를 말아 쥐곤 딸기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느라 입 주변이 생크림 범벅인 성준을 보며 기준이 한숨과 함께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훑어 닦았다.


한참 무아지경에 빠져 케이크를 먹던 성준이 팔짱낀 자세로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기준을 보고 고개를 갸웃 저었다. 




“형, 형아... 안 먹습니다.”

“응, 단거 싫어.”

“성..성주니, 혼, 혼자...먹습니다.”

“성준이 많이 먹으면 되잖아.”

“....혼, 혼자아....싫습,니다아...”




눈은 케이크 조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면서도 무슨 고집인지 포크까지 식탁위에 올려놓는 성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하, 고집불통. 기준이 졌다는 듯 제 앞에 있던 포크를 들어 케이크 윗부분 생크림을 긁어 옆으로 치우고는 스펀지와 딸기만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우윽, 달아.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보란 듯이 바라보자 그제야 얼굴이 좀 풀리곤 포크를 다시 쥔 성준이 기준이 포크로 밀어 치운 생크림을 포크에 담아 제 입으로 쏙 가져갔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성준의 발그레한 볼을 바라보며 기준이 입안에 남은 단맛을 커피로 애써 밀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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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효신] 한 발짝

단문2015. 5. 29. 00:54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

 -김현승 [고독]




짝사랑이란 게 이렇게 거지같은 거였단 걸 미리 알았더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몇 년째 반복하고 있는 생각이지만, 후회하기엔 많이 늦었다는 걸 잘 안다. 벗어날 수 있었다면 진즉 벗어났겠지. 잔뜩 날을 세운 그에게 낮 동안 할퀴어져 뚝뚝 피를 흘리는 제 불쌍한 심장을, 고독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마다 덕지덕지 밴드를 붙여 임시방편일 뿐인 치료를 한다. 그러나 본래 질기지 못한 살굿빛의 천은 영도의 심장에 난 많은 상처를 덮기도 전에 붉은 피에 절어 접착력을 잃곤 했다. 황망하게 주저앉아 아픈 부근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고만 있던 영도가 울컥 치미는 감정에 주먹으로 바닥을 쿵, 내려쳤다. 카펫이 깔린 호텔방은 제 아비가 당당하게 뽐냈듯 소음 따윈 가볍게 집어삼킬 뿐이어서 풀 데 없는 분노가 영도를 잠식해 나갔다. 


벗어날 수 없으면 끊어내는 게 맞을 터였다. 저를 위해서도, 효신을 위해서도. 하긴 여기서 효신을 위해서라는 것 자체가 꽤나 웃긴 자기변명이었다. 저 혼자만 앓던 사랑을, 누군가에겐 몇 년 동안이나 닿지 않은 애절한 혼자만의 외침, 그저 저 혼자만 아프면 됐으니까. 효신이 돕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냥 혼자만. 아무도 모르던 사랑을 정리하면 됐으니까.



-



붉게 충혈 된 눈이 뻐근함에 달아오르자 효신은 막 교문을 지나치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누르다 가볍게 비볐다. 어젯밤 감금되듯 갇힌 제 방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오랜만에 치정이 끈적하게 얽힌 내용으로 유명한 불륜 소설을 밤새 읽었더니 눈은 뒤늦게 항의하듯 잔뜩 비명을 질러댔다. 메말라 뻑뻑했던 눈동자가 손가락에 비벼진 탓에 억지로나마 물기를 머금어냈고, 그제야 아픔이 가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효신이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 끝에 길쭉한 것이 걸렸다. 오늘도 교칙은 어디다가 갔다 버리고 셔츠 없이 달랑 카키 빛의 니트나 걸친 건지. 교칙에 잔뜩 어긋난 니트나 맨투맨을 입는 주제에 꼬박꼬박 남색의 교복 마이를 걸치는 건 또 이상한 고집이라 효신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한소리 해야겠다 싶어 성큼 한걸음을 뗀 순간 영도가 효신을 향해 흐리게 웃고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갔다. 어,




“...저거 가방도 없이 등교하기는.”



분명 저를 봤음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뒤돌아선 영도가 당황스럽긴 했지만 거기에 대고 딱히 뱉을 말이 없어 눈만 데룩 굴리던 효신은 마음과는 다른 실없는 소리나 툭 흘렸다. 생각해보면 날카롭게 비죽이는 얼굴, 굳은 표정, 당황한 표정, 갑자기 혼자 잔뜩 붉어진 얼굴로 다급히 손부채질을 하던 모습까지. 오히려 다른 이들이 보기 힘든 의외의 모습들을 효신에게 잔뜩 보여줬던 최영도지만 효신은 영도의 뒷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침과 동시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다시 눈을 덮쳐왔다. 아무래도 양호실에서 인공눈물이라도 받아야겠다 여긴 효신이 멈췄던 걸음을 떼 학교 건물로 향해갔다. 잠시 멈춰있었을 뿐인데 벌써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영도를 저도 모르게 찾던 효신이 치미는 짜증에 고개를 붕, 휘저었다. 선배를 보고 인사도 않고, 진짜 건방이 점점 하늘을 찌르는구나. 닿지 않는 분노를 눈을 비비는 것으로 대신한 효신의 손이 꾸욱, 제법 세게 눈두덩을 눌러왔다.



-



손에 든 일회용 인공눈물 튜브를 뚫어져라 바라본 효신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얼굴에서 10센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똑, 똑 투명한 액체가 떨어져 효신의 눈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서늘한 온도에 놀란 것도 잠시 금방 효신의 체온을 닮아진 인공눈물은 효과가 제법 빠르게 나타났다. 뻑뻑하게 마르다 못해 붉은 핏줄까지 도독 나타났던 효신의 눈가가 유리구슬처럼 반짝였으니까. 허나 마치 사막의 모래바닥처럼 한참동안이나 메말랐던 눈가는 금방 그 수분을 좀먹었고 빡빡함을 다시 호소하기 시작했다. 어우, 두 셋방울이면 된다더니 이거 제약회사에서 용법을 잘못 설명한 거야 뭐야. 투덜거린 효신이 다시 뒷목을 젖히고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제문이 벽에 냅다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기운 의자에 걸터앉아있던 효신은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한 아찔한 상황을 야기한 깜찍한 놈이 누구인가 뻑뻑한 눈을 들어 도끼눈을 떴다. 범인은 늘 현장에 있는 법. 역시나 입구에서 껄렁거리는 자세를 하고 있는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쑤셔오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느라 바로 누군지 알아채진 못했지만 효신은 저런 짓을 할 놈은 한 놈밖에 없다 여겨 눈을 뜨지도 않고 손으로 비비적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낮게 이름을 뱉어냈다.



“...최영도, 기물파손은 엄연한 범죄거든? 형법 제366조.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기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근데 넌 타인의 재물뿐만이 아니라 공공기관인 학교의 재물인 방송실 문을 파손했어. 이제야 좀 심각성이 보이냐?”

“이효신, 여기 최영도 없어?”

“...탄이? 너였어?”

“아, 어디 간 거야 이 새끼는.”




투덜거리는 조금은 맑은 소년의 목소리는 탄이 맞았다. 그제야 초점을 바르게 맞추고 문가를 바라보자 남색 후드 집업을 입고 뒤통수를 성의 없이 긁어대는 탄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최영도 일줄 알았는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점심시간이 15분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원래는 점심시간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귀신같이 나타나서 밥을 거르고 늘어지게 잠이나 자려는 저를 식당으로 끌고가던 녀석이 웬일로 늦게 오나 했는데. 평소에도 흔한 일이니 반성문 따위나 쓰고 있겠네 했었다. 




“-최영도를 왜 여기서 찾아?”

“아, 맨날 이효신 너랑 최영도랑 밥 먹는 거 다 알고 왔거든?”

“나 형, ...뭐 됐고, 나도 오늘 아침에밖에 못 봤는데?”




어? 놀란 듯 동그래진 눈이 효신을 살펴왔다. 내가 거짓말해서 어디에 쓰겠니. 하는 마음을 담아 어깨를 으쓱 얄밉게 들어 올리자 탄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최영도를, 왜.”

“아니 뭐, 은상이랑 걔랑 나랑 어이없게도 같은 조거든.”

“흐음, 안타깝게도 나도 오늘 한번밖에 못 봤다.”

“걔가 형 아니면 찾아갈 사람도 없는데.”

“오버하긴.”




어이없어 피식 웃는 효신을 보며 되레 더 어이없단 표정을 지은 탄이 성큼성큼 걸어와 효신이 팔을 기대고 있는 책상을 쿵쿵 두드렸다. 

철제 책상이 울려와 짜증스럽게 시선을 올리자 탄의 표정이 제법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진심은 아니지?”

“진심인데. 걔 친구 있잖아. 몰려다니는 애들.”

“그게 친구냐? 필요에 의한 관계지. 그리고 최영도가 정말 형을 친구라

여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형 눈치 빠른 거 알아.”

“-별로.”

“받아주지 않는 건 자유지만, 가지고 노는 건 안 되지.”




가지고 논다니. 불쾌한 문장에 절로 인상을 쓰자 탄이 피식 웃곤 효신의 구깃한 미간을 거칠게 문질러온다. 그리고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불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자 탄은 조금 곤란하게 웃었다.




“걔, 불쌍한 새끼야.”

“…….”

“그렇다고.”



어정쩡한 끝맺음과 함께 탄은 미련 없이 방송실을 떠났다. ...야, 문! 느릿하게 튀어나온 효신의 음성에는 잔뜩 힘이 빠져있어 천천히 느릿하게 공기 중으로 가라앉았다. 와서 잔뜩 이상한 말이나 하고 가는 탄에 괜한 싱숭생숭함이 들어 효신은 손가락에 쥐고 있던 인공눈물을 괜스레 책상에 집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를 수가 있나. 남들을 대할 때와 저를 대할 때의 최영도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는데, 그걸 모른다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핑계지.


효신은 며칠 전 점심시간에 역시나 찾아온 영도에게 처음으로 권했다. 학교 앞에 국수 잘하는데 있던데 오늘은 거기 갈래? -국수요? 내내 생글 거리던 얼굴이 짐짓 굳었다 싶더니 입 꼬리를 올려 웃는 최영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방울져 떨어질 것만 같은 슬픔에 가득 차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굳힌 효신을 보더니 금세 웃으며 어깨에 팔을 걸치며 조잘 거리는 최영도의 모습을 보며 금방 착각임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착각도 아니었나 싶어 효신은 답답해오는 가슴을 퍽, 두드렸다. 가지고 놀다니 누가.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인데.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만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이리 고생하지 않겠지. 기다린 건 최영도 뿐만은 아니란 거다. 효신이 덜컹, 의자가 밀리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다급하게 일으켰다. 




-



예비 종에 이어 울리는 수업 종에 영도의 주변에서 떠들어댄 놈들이 교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웬일로 네가 우리랑 밥을 먹냐? 토마토를 씹어 삼키며 한 놈이 말하자 시끌벅적 목소리가 잔뜩 겹쳐 울렸다. 묻지 말라는 듯 포크로 접시를 소리 나게 찍자 몸을 가볍게 움츠리더니 저들끼리 눈치한번 보고 실없는 소리로 화재를 돌려대는 놈들을 보며 영도는 멍하니 효신을 떠올렸었다.


이젠 습관처럼 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효신. 달그락 거리며 정리하는 주방의 소음을 배경삼아 영도가 느릿하게 허리를 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입맛이 없어 대부분이 그대로인 식판을 보기도 싫다는 듯 툭 친 영도가 또 떠오른 효신의 모습에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의 암전. 그리고 곧바로 컴컴한 눈꺼풀 안 세상은 폭죽이 퍼지듯 노란 불꽃이 툭툭 터졌다. 몽글 몽글 솟아나오기도 하고, 둥실둥실 떠다니기도 하는 노란 불꽃에 집중하니 최영도.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 돼.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에 노란 불꽃이 몽글몽글 모여 어떠한 실루엣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다부지긴 하지만 저보다 작은 키와 덩치,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바쁘게 교정을 걸어가는 이효신, 밥 먹자며 헤실 웃어 보이는 저에게 인상을 찌푸리는 이효신. 옷 똑바로 입으랬지 하며 제 복부에 주먹을 내지르던 그 – 아, 이건 좀 사랑스럽다. -. 제기랄, 실패다. 눈을 감으니 더욱 떠오르는 그의 모습이 싫어 입술을 잘근거리던 영도가 눈을 뜨자 밝은 빛이 차들었다. 



“하아.”

“한숨은. 어린놈이.”

“....?!”



덜컹, 환청인줄 알았더니 정말 이 사람이 저를 부른 거였나? 어느새 맞은편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저를 바라보는 이는 분명 이제껏 계속 생각하고 있던 그가 맞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헉헉거리지. 의아함에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영도는 식판 옆에 놓여있는 물 컵을 효신에게 내밀었다. 마시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효신에 어쩐지 민망해져 입 안댔어요. 하자 그거 때문 아니야. 슬쩍 타박해온다. 어젯밤에 강하게 결심하고 하루 종일 피해 다닌 것이 효신의 얼굴을 보자 단숨에 흐물거리며 녹아버리는 저가 웃겨 영도가 슬쩍 웃었다. 그 웃음은 물 컵에 손을 뻗던 효신이 방향을 틀어 영도의 손목을 쥐어오지 않았다면 분명 꽤나 오래 유지될 거였다.  



“...?!”

“내가 네 손을 이렇게 잡으면.”

“무, 뭘, 이렇게 갑작스럽게 스킨십 하고, 그, 그래요?”

“-떨려?”  “.....떨리게.”



푸하, 제 말과 묘하게 이어지는 영도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웃겨 효신이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종국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식탁에 이마까지 대고 끅끅 거리는 효신에게 웃지 말라며 화를 내려던 영도는 그 와중에도 제 손목을 놓지 않고 더욱 강하게 틀어쥐어오는 효신의 손바닥과 손가락 감촉에 말을 잊고 그저 달뜬 눈으로 둘의 접합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 좀, 웃,죠? 불퉁하게 터진 영도에 한 번 더 키킥, 어깨를 떤 효신이 갑자기 식탁과 맞붙어있던 이마를 뗐다. 


“-선배, 오늘 이상하네요? 내 앞에서 웃질 않나.”

“너 앞에서 웃는 게 이상한거야?”

“맨날 찌푸린 얼굴만 했으면서.”

“그래? 그럼 앞으로는 자주 웃어줄게.”

“...그게.”



-무슨 의미에요? 철없이도 떨려버린 말끝에 민망함이 차오르긴 했지만 영도는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


영도의 손목을 가만히 쥐고만 있던 효신이 입 꼬리를 슬슬 올리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영도가 이어지는 효신의 움직임에 기함해 몸을 들썩였다. 평소 가느다랗고 예쁘다고 생각해온 손가락이 제 투박한 손가락에 얽힌다는 건, 상상 그 이상의 감촉과, 기쁨을 넘어선 충격이라 영도가 입을 꾹 다문 순간 효신이 어깨를 으쓱, 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의미.”



참으로 인간은 단순하기 그지없지. 맞닿은 온기를 놓칠 새라 마치 엄마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영도가 다급히 반대쪽 손까지 들어 효신의 손을 다잡았다. 그리고 힘주어 쥐어오는 영도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한걸 느끼고 효신이 다시 한 번 웃자 그제야 영도도 한숨 섞인 미소를 흘릴 수 있었다. 





*



꽤 오래전에 영도효신 합작 참가했던 건데 이제야 올리다니 흡 제 건망증...

존잘님들 연성은 http://dearydhs.dothome.co.kr/  이쪽에서 보실수 있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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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그래] 가끔은

단문2015. 2. 28. 19:37

[석율그래] 가끔은

 

 

더 얘기하면 나 화낼 거야. 장그래.”

 

순식간에 낮아진 목소리에는 간신히 눌러 담은 듯한 분노가 있었다.말이 나오는 대로 뱉어대던 그래가 조금 주춤했지만, 오히려 석율의 적반하장적인 문장을 듣고는 다시 꿈틀 미간을 좁혔다.

 

화요? 화는 지금 제가 내야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화가 나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는 거야.”

 

그만 하라는 듯 눈을 의식적으로 피한 석율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자 그래는 목덜미부터 뜨끈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먼저 잘못한 게 누군데. 지금 사과해야할 사람이 누군데 왜 저한테 뭐라고쏘아붙이는지. 그래는 치미는 분노를 견디기 힘들어 떨리는 손으로 아파오는 눈두덩을 꾹 눌렀다.

 

 

사귄지 1년여가 넘는 시간동안 두 사람이 다툰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벼운 웃음을 짓는 석율의 애교 섞인 치댐과 그를 적당히 밀어내는 그래. 남들이 보기엔 그저 조금 친한 직장동료.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가끔 보면 닭살이지만 대부분은 꽁트같은 커플. 딱 그 정도 선을 지키는 건 석율과 그래의 보이지 않는 룰 같은 거였다. 이정도 선을 지킵시다. 라고 딱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사귀다보니 서로 자연스럽게 두 사람만의 룰이 만들어진 경우였다.

 밝고 타인과 관계를 쌓는 게 익숙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상처도 많고, 그런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러한 모든 상황이 과부하에 걸릴 경우 한없이 우울해지기 일쑤인 한석율과, 석율을 밀어내고 귀찮다는 듯 털어대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석율 에게 다가가고, 관심을 가져달라 부르짖기도 하는 장그래. 두 사람은 적정한 온도차를 조절해가며 지금껏 잘 사귀어오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지킨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커플이었다.

 허나 여느 커플이나 그렇듯 다툼은 항상 사소한 데서 일어났다. 그저 단순한, 한쪽의 야근 때문에 약속이 깨진. 평소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그런 사소한 일. 석율이 우는 소리와 함께 약속을 파하는 사과 전화를 했고, 그래도 별다른 반응 없이 웃으며 넘길 수 있던. 허나 그래는 저번 주 주말에도 석율이 집에 내려가 봐야 한다며 갑작스레 깼던 약속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 당시는 아무생각도 없던 그 일이 오늘의 상황과 겹쳐지자 순식간에 서운함이 몰려와서 그래는 뚱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었다.

 

그럼 앞으로도 만나지 마시던가요. 자꾸 이렇게 약속 깰거면.”

 

그래가 뚱한 목소리로 뱉긴 했지만 평소였으면 아이 왜 그래~미안하다니까!’ 라며 애교 섞인 말투로 달래줬을 석율 또한 그래의 말에 날카로운 반응을 뱉었다.

 

“-? 무슨 말을 그리해?”

그렇잖습니까. 자꾸만 깰 건데 약속 잡는 의미가 있나요?”

“...장그래.”

 

얘기 좀 해. 내가 탕비실로 내려갈게. 차갑게 뚝뚝 끊어지는 말과 함께 끊어진 전화가 뱉어내는 차가운 기계음에 그래가 울컥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전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이제 막 퇴근준비를 하려 재킷을 입던 김대리가 화들짝 놀라 왜 그러냐 물어왔지만 차마 웃지도 못한 채 꿀꺽, 분노를 삼켜내고 아니라 짧게 답한 뒤 탕비실로 급하게 향했다. 분노로 점철된 그래의 발걸음이 복도를 쾅쾅 울려 강대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백기마저 힐끗 바라 볼 정도였다.

 

 

탕비실에 먼저 도착해 복사기에 몸을 살짝 기대고 있던 석율의 눈이 그래를 보자 번뜩 빛났다. 왔냐는 인사도 없이 쏘아붙이듯 뱉어내는 석율의 말에 그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아까 그거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자꾸만 약속 깰 거면 차라리 만나지 말자고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문장인거 알지? 말 똑바로 해.”

글쎄요, 오해일지 아닐지는 한석율씨가 판단하시면 되겠네요.”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듯 넘나드는 말에 잔뜩 솟은 가시가 두 사람을 난도질하듯 찔러온다. 저도, 상대방도 상처받는 건 알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 두 사람은 이를 악물었다.

 

 

*

 

 

말을 마치고 몇 번이고 더 뒷머리를 긁적이던 석율이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열을 식히려는 건지 손가락을 곧게 펴 파닥파닥 흔들어대기도 하고 퍽이나 부산스럽지만 그래는 반면에 얌전했다.

단지 이빨로 통통한 제 입술을 못살게 굴 뿐이었다. 분노에 차 그래에게 모진소리를 뱉긴 했지만, 그 하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입술만 깨물고 있는 그래를 보는 석율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허나 그래가 뱉었던 말이 마치 저와의 만남 자체를 끊어내려 하는 것으로 들려 도무지 화가 안날수가 없었다. 물론 저번 주말도, 오늘도 얼마나 둘이 기대를 했던가. 먼저 만나서 어디를 가고, 그 다음에는 이걸 보러가고 계획을 짜느라 신났던 건 오히려 석율쪽이 더 했던지라 약속을 깬 입장인 저가 할 말은 없었다. 허나 평소였으면 유하게, 아니면 시크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을 그래의 반응에 당황스럽기도 했던지라 오히려 더욱 버럭 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두 사람의 다툼이 잦지 않았던 건 두 사람 모두 참는 성향이 있다는 게 큰 이유였다. 괜한 다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 다투며 감정 소모할 시간에 그저 둘이서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놀고 싶다. 라는 게 그래의 의견이었고 석율도 그에 동의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지금껏 웬만한 서운한 일은 가슴에 묻고 원만하게 지냈던 거였는데. 석율은 힐끗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꽤나 찌르르했던 설전 끝에 찾아온 침묵이 이어진지 벌써 십 여분. 그래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푹 숙인 채 입술만 꽉꽉 물고 있고, 석율은 한숨만 푹 쉬고 있었다.

 

쉽게 달아오른 뜨거운 머리와 입이 뱉은 말들이 창피할 만큼 석율은 어느새 화가 많이 가라앉아있었다. 마음에 담아둔 말을 쏟아낸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무엇보다 저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래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는 게 화가 가라앉은 결정적 이유였다. 석율이 좋아하는 그래의 모습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물끄러미 앞만, 정면만 바라보는 꿋꿋한 아이였으니까.

 

어쩔 수 없으니 저가 지고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석율이 꿀꺽 목울대를 한번 울리고는 그래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장그래.”

 

역시나 대답은 없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씁쓸함에 위가 쓰렸다. 장그래. 그래야. 한층 다정해진 석율의 목소리가 그래의 어깨를 흠칫 울렸다.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게 안심돼서 한번 메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훑던 석율이 용기내 그래의 양 팔뚝을 그러쥐었다.

평소보다 뜨끈한 체온에 많이 화났나 싶어 난감했던 석율이 고개를 조금 숙여 여전히 땅만 보고 있는 그래의 얼굴을 살핀 순간 놀라 저도 모르게 헉, 헛숨을 뱉어냈다.

 

, 장그래. 그래야. 울어?”

 

언제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건지 동그란 눈매 가득 그렁그렁 들어차있는 맑은 액체가 똑똑 떨어지다 못해 양 볼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술만 깨물 뿐 그 흔한 물기어린 소리하나 내지 않은 그래의 모습에 석율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같이 꾹꾹 눌러 참고 있었을 그래가 안쓰러워 석율은 서둘러 그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의 반항도 없이 끌려 들어온 여린 몸이 그제야 가볍게 떨린다. 허나 석율이 그래의 등허리를 감아와도 그래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석율의 허리에 손을 감아오지도 않았다. 많이 서러웠구나. 우리 그래. 석율은 제 자신을 자책하며 그래의 몸을 더욱 꼭 안았다.

 

미안해. 장그래. 정말 미안. 내가 약속 깨서 서운했을 텐데 나쁜 말이나 하고.”

“.....니다.”

?”

“...아닙니다. 한석율씨 잘, 못 흑, 아닙니다.”

그래야..”

 

석율이 고개를 틀어 뜨끈한 그래의 볼에 가벼운 입술을 내리자 그래가 기어이 서러운 울음소리를 터뜨린다. , . 아이처럼 헐떡이는 숨을 막지도 못한 채 그래는 덜덜 떨리는 몸을 하고선 그제야 석율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볼을 석율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기대왔다. 헐떡이며 우는 와중에도 계속 제,. , 잘못, 훌쩍, . 띄엄띄엄 말을 해오는 그래의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쉿, 석율이 다정하게 말렸다.

 

, 괜찮으니까 그래야. 그만 말하고, 뚝하자.”

“..., ,석율씨.”

, 그래야.”

나 헤어지자고, , 말한, 거 아닙,,.”

 

새삼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아까보다 더 몸을 들썩이는 그래를 다독이며 석율은 몇 번이고 귓가에 다정한 말을 쏟아냈다.

"그럼, 알지 우리 그래가 그럴 리가.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우리 다음 주에는 꼭 놀러가자. ?"

 

그제야 안심되는 지 작게 끄덕이는 조그마한 머리가 어깨에서 느껴지자 석율이 목으로 웃고는 그래의 드러난 흰 목덜미에 쪽쪽 입맞춤을 퍼부었다.

 

다음주에는 12일로~?”

“....좋습니다.”

 

분위기 파악 하시죠. 라며 발을 세게 밟아 올까봐 언제든 뒤로 뺄 준비를 하고 있던 석율의 구둣발이 흠칫 흔들렸다. 석율의 말에 몸을 더욱 기대오며 수줍게 뱉어낸 그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율은 귀부터 얼굴,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아까와는 다른 열이 차올라 급히 제 얼굴을 부채질 하는 석율과, 그런 석율의 움직임에 작게 웃는 장그래가 있었다.

 

 

*

 

와 석율그래 제대로는 처음써본다(벙찜)

얼마전 트친분과 이야기나눴던 석율그래의 성격? 느낌? 을 바탕으로 두사람의 다툼

적정한 온도차를 유지하며 무난히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두사람이 좋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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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백기] 달큰한

단문2015. 2. 28. 19:37

[해준백기] 달큰한.

(어슴푸레한 새벽의 물 한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문득 컴퓨터 화면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보자 보이는 시계는 이미 새벽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을 체감하자마자 온 몸이 이때다 싶게 찌부드 한 게 백기는 잠시간 고통에 신음했다. 밝은 빛을 내는 화면에 가득한 서류와 보고서의 글자마저 흐릿하게 보임에 안경을 벗어 눈을 가볍게 주무른다.

 

딱히 강해준 대리는 숙제를 주듯 퇴근 후까지 일을 끌어가서 할 만큼 무리하게 일을 주는 편이 아니었다. 늘 마감기한에 촉박하지 않게 주는 편임에 지금껏 백기는 조금 늦게 퇴근하거나, 아니면 조금 이른 출근으로 커버가 가능한 일만 해왔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백기의 착각일지 모르지만-내일 아침까지 갑작스럽게 제출해야하는 기안서가 있다며 백기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뭐라 불만은 터뜨리기도 애매한 건 해준의 손과 가방에는 더욱 많은 서류뭉치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덕분에 취미에도 없던 회사 일을 집까지 끌어들여 백기는 어슴푸레하게 새벽빛을 뿜는 시간까지 서류를 작성해야했다. 얼추 마무리 지어져 내일 조금 이르게 출근하면 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백기는 제 메일로 서류를 보낸다.

 

물 한잔만 마시고 잠들어야지. 저릿한 다리를 대충 주먹을 말아 톡톡 두드리며 일어선 백기는 냉수 한잔을 들이켰다. 목젖부터 천천히 적시며 내려가는 차가운 물이 그대로 느껴져 백기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역시 새벽녘은 쌀쌀하구나. 일하느라 올렸던 니트의 소맷자락을 내리며 다시금 물을 머금는다. 송골송골 찬 물방울이 표면에 잔뜩 맺힌 유리컵을 뻑뻑한 눈에 가져다댄다. 눈이 뻑뻑할 때 가끔 하는 백기의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꼬물, 애벌레처럼 몸을 말아 포근한 이불로 파고들었다. 축 몸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이불을 가슴 앞으로 모아 고개를 이불에 파묻는다.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것에 머리가 지끈거릴 것만 같지만 잡생각을 줄이자 슬슬 잠이 오는 게, 크게 하품이나 하고 눈을 감는다.

 

*

 

  내가 알람을 어제 맞췄던가.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요. 젠장! 불에 덴 듯 일어난 백기가 발에 휘감긴 이불로 인해 휘청 이며 코를 방바닥에 찧었다. 욱신거리는 코를 대강 문지르며 화장실로 달려가 폭풍 같은 양치를 하고 대강 옷을 주워 입었다. 늘 고수했던 단정한 패션과 깔끔한 스타일은 어디가고 머리를 세울 생각조차 못한 채 넥타이를 휘날리며 길가로 나섰다. 어젯밤에 머리를 감아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눈을 찔러오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택시에 올라탔다.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저를 도와줄 조력자를 찾았지만 눈에 띄는 이름이 영 없었다. 석율은 저번에 부탁했지만 그마저도 소용없이 강 대리님께 바로 걸려버렸고. 영이나 그래에게 부탁하긴 뭔가 껄끄러웠다. 액정을 몇 번이나 위아래로 쓸어내던 백기의 손가락이 강해준 대리님. 이름 위에서 멈칫했다. 사우나도 다녀왔고, 이젠 제법 농도 걸만큼의 사이는 된 것 같은데 말씀을 드릴까, 싶었지만 백기는 이내 그만뒀다.

 

빨리 달려가서 준비하면 되겠지. 택시아저씨를 몇 번이고 재촉하며 백기는 불안감에 다리를 떨어댔다.

 

 

*

 

 

, 오우 백기쒸, 머리스탈 바꿨.

바빠요, 미안해요.

 

15층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석율의 말을 끊으며 백기는 후닥 뛰어 들어갔다. 뒤에서 아, 백기씨~! 라며 항의하는 석율의 소리가 들리지만 나중에 대충 커피나 타줘야겠다 생각하며 백기가 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급하게 시계를 확인한다. 9시 정각. 지각은 아니지만 팀의 막내로서 제일 늦게 들어간 게 영 눈치가 보여서 옆자리를 힐끔거리자 해준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늦을 뻔 했네요.”

“..., , 죄송합니다. 대리님.”

, 시간상으론 늦진 않았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주의하세요.”

“....”

 

해준의 표정을 살펴도 그리 화나보이진 않아서 안심하던 백기가 무심코 후끈한 이마를 훑자 닿는 머리카락에 그제야 제 머리상태를 상기한다., 이럴 수가. 낭패감에 귓가가 더욱 후끈하다. 기본적으로 제일 먼저 출근해서 책상 정리 후 조간신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여유로움을 만끽하는걸 중요시 여기는 백기로써는 오늘은 시작부터 참으로 엉망이었다.

일을 하다가 늦게 일어나지 않나, 아침부터 쓸데없는 택시비 지출에, 뛰느라 땀이 비 오듯 하고, 단정하고 스마트하게 보이기 위해서 늘 고정시키듯 올린 머리스타일은 어디가고 정신없이 산발이 돼 붕붕거리는 제 부스스한 머리칼. 당황스러움에 재킷을 대강 걸치고 화장실로 가려던 백기를 해준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붙잡는다. 장백기씨, 서류는 다 됐습니까.

아차, 아직 마무리 할 부분이 남은 서류가 번뜩 머리를 스친다.

 

“10, 10. 아니 5분이면 마무리 됩니다.”

“...서둘러 주세요.”

 

잠깐 이어진 침묵 속에서 복잡한 듯 한 눈빛을 읽었지만 애써 참아낸 듯 낮은 음성만 뱉을 뿐인 해준에게 면목이 없어 백기는 뒷목을 한번 주무르곤 무섭도록 타자를 두드린다.

 

 

*

 

하아, 간신히.., 기진맥진한 백기가 눅진한 몸을 다잡으려 노력하며 비틀 탕비실로 향했다. 쓴 커피라도 마셔야지 도무지 핑핑 도는 머리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보다 훨씬 피곤할 것이 분명한 대리님은 백기가 미친 듯이 마무리 한 서류를 들고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늘 완벽하고 단정했던 해준이지만 오늘따라 퀭한 눈을 숨기기 힘들어 보이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백기는 15층 탕비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그제야 제가 왜 코트를 안 챙겨왔는지 원망을 삼키며 얇은 셔츠차림으로 오들오들 떨며 회사와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커피전문점으로 향했다. 강 대리님은 아메리카노..., 평소 사수의 취향을 떠올리며 주문하려던 백기의 눈에 무언가 달달한 단어가 보였다. , 이런 거 싫, 어 하시려나. 드리면 인상부터 확 찌푸리시는 거 아냐?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카운터 앞에서 조용하게 고민하는 백기에 주문이 진행이 없자 뒷자리 여자가 무어라 큰소리로 불평했다. 그에 어깨까지 떨며 놀란 백기가 무심결에 외친 단어가 삑, 제 눈앞의 액정에 입력되는 걸 봤음에도 차마 무를 생각조차 못한 채 백기는 살그머니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뻐근한 눈을 비비며 제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던 해준이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후우, 절로 나오는 한숨소리에 더욱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라 애써 털어내려 미간을 한번 꾹, 눌렀다. ..., . 리님. 옆에서 잔뜩 기죽은 백기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그대로 손을 내려 바라보자 쭈뼛, 어깨가 잔뜩 움츠러져 있다. 오늘은 별다른 말도 안했는데 왜 저러지.

 

왜요, 장백기씨.”

, 그게. 이런 거, 싫어 하실 꺼 같지만, , 아는데 그래도.”

장백기씨, 누누이 말했죠.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하게 말해야 상대방이 쉽게 인지한다고. 바이어들에게도 그리 자신감 없이 말할 껍니까?”

, 이거 드십시오!!!”

 

냉정한 해준의 말이 쏟아짐에 따라 점차 숙여지던 고개가 별안간 불쑥 들리더니 해준의 코앞으로 무언가 후끈한 게 들어찼다. 놀라 동그래진 해준의 얼굴을 쳐다도 못 본 채 계속 바들거리는 손으로 붙잡고 있는 건 테이크아웃 컵이었다. 아니 커피 주면서 계속 그렇게 우물거리는 거였어? 의아함에 받아들자 달큰한 냄새가 훅 끼쳤다. 저도 모르게 코를 씰룩이자 백기가 해준의 얼굴을 확인하고 어쩐지 울상이 된다.

 

, 시 바꿔올까요?”

이게 뭡니까 장백기씨?”

, . 대리님께서 아메리카노를 즐겨 드시는걸 아, 는데요.”

.”

피곤할 땐……..., 좋다고...해서요...”

 

끝으로 갈수록 음소거를 하는 건지 점차 입안으로 먹히는 소리에 끝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척하니 알아들은 해준이 백기의 붉은 눈 꼬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컵을 기울여 핫초코를 머금었다. 이리 달짝지근 한건 영 취향이 아니었다. 제 건강을 해치는 것만 같은 그런 해로운 느낌이었기에 즐기지 않았다. 그런데 썩 나쁘지 않은 게,

 

맛있네요. 장백기씨.”

?”

마침 피곤했는데, 고맙습니다.”

“.......”

이제 일 하러가죠?”

, !”

 

금방 사무적인 톤으로 돌아온 해준에 다닥, 뒷걸음질을 쳐 제 자리로 돌아간 백기가 잠시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쏙, 파티션 안으로 몸을 숙인다.

무얼 하는지 모르겠지만 다리를 제자리에서 굴려대는 게 보여 해준이 조금 웃었다.

 

*

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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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백기] 무딘 이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평소처럼 출근을 해 평소처럼 일을 했고, 중간에 사소한 실수로 인해서 날카로운 한소리를 듣기도 하고. 소란스러운 동기들과 함께 탕비실에서 실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도 하고, 평소처럼 그의 차를 탔고, 그의 집에 갔고. 지독히도 똑같은 일은 마치 정해진 일정처럼 또다시 반복하던 순간을 깨트린 건

백기, 저였다.

 

우리, 헤어졌으면 좋겠어요.”

 

그 말마저도 참으로 가볍게 떨어졌다.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을 뱉은 순간만은 망설임 따위 없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해왔던 짧은 문장이지만, 고민이 끝나자 말은 쉬웠다.그 말에 저에게 따끈한 핫초코가 든 머그컵을 건네던 그의 손이 조금 멈칫 한 듯도 싶었지만, 그는 컵을 백기의 손에 쥐어준 채 그저 옆자리에 풀썩 앉을 뿐이었다.후룩, 그가 든 컵에선 씁쓸한 커피향이 풍겼다. 몇 년을 봐도 익숙해 질 수 없는 맛과 향이었지만, 그 마저도 강해준이기에 좋았다.

 

  그래요.”

 

그가 입을 열자 쌉쌀한 향이 풍겨왔다. 아직도 온기를 품은 그의 숨이었지만, 그 온기는 백기에게로 닿기 전에 차갑게 식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럴 때마저도 지극히 사무적인 톤에 서운함과 분노가 치솟았지만,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마시길 좋아했던 커피를 꿀꺽, 꿀꺽 단숨에 의무적으로 들이마시는 그의 모습이 보여 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기뻤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의식은 하는군요.

더 이상 제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으니, 가볼게요. 그의 방으로 들어가 큰 가방을 메고나오자 그의 눈이 조금 둥그레졌다. 이제와서 놀라지 마세요. 당신의 무관심에 지쳐갈 무렵부터 하루에 내 물건 한 개씩, 그렇게 싸왔던 짐이니까. 몰랐다고 할 수 없겠죠.

당신의 집을 채우고 있던 내 물건을 하루에 한 개씩 챙겼다는 건, 당신이 이런 나를 눈치 채고 챙길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는 거. 그러나 당신은 그리 하지 못했다는 거.하지만 당신의 그런 성격을 지독히도 아는 건 저였는데, 뭐 그리 미련을 떨었는지 모를 일이네요. 백기는 조금 우는 듯 울었다.

  가방의 무게가 새삼 백기의 몸을 휘청 이게 했다. 떨림에 당기는 턱을 조금 강하게 닫아 물고 백기는 연인으로써 마지막일 인사를 고했다.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제 2년 전의 풋내기가 아니니. 회사에서 티를 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 하긴. 아무도 대리님과 제가 그런 관계란 걸 몰랐을 테지만요워낙 철저하게 숨겨지는 둘 사이의 관계가 서운하기도 했다. 사적인 일을 공적인 공간에 끌어들이지 말자는 그의 분명한 말에 동의한 저도 잘못인지라 할 말은 없지만.

내일부터는 정말로 공적인 관계가 되겠네요. 사수-부사수. 그런 관계.

 

백기는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를 하곤 집 밖으로 나갔다. 차마 목도리를 걸치지 못해 드러난 훤한 목덜미가 시렸다.

 

*

 

해준은 소파 등받이에 천천히 등을 기댔다. 제가 썩 마음에 들어하던 푹신하고 매끈한 질감의 소파였지만, 오늘은 제 등을 편안히 받아주는 게 아니라, 밀쳐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분명 집안의 온도는 후끈할 정도였음에도 해준은 손끝부터 차갑게 얼어붙었다. 서늘한 손가락을 문질러 온기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히려 손이 더욱 시려 그만둔다.

백기가 지쳐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숨기지 못하는 아이니까. 사랑해주세요, 늘 눈으로 말하던 아이니까. 하지만 그만큼 해준도 그런 백기에게 질려갔었다.

 

본디 다정하지 못한 성격인 저로써는 해준은 백기에게 참으로 저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다르지만 둘이 함께 가서 맞춘 커플링이나, 매일 저녁 제 집으로 데려와 사랑을 나누고, 만지고 접촉하는 일련의 과정들. 누군가와 닿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던 저가 살을 맞대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 것 자체. 백기의 커다란 가방이 하나씩 채워지는 걸 보고도 모른체 한다. 가벼웠던 가방이 하루하루 묵직해지지만 해준은 애써 무시해왔다. 늘 그 가방을 들고 제 곁을 떠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니었다. 아니 아닐꺼라 믿었던 거겠지. 묵묵히 앉아있던 해준이 쑤셔오는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지독한 두통이다.

 

 

-

지독한 권태로움 끝에 찾아온 무딘 이별. 눈물따윈 없는 이별을 쓰고싶었는데....(결과물:뭐, 뭐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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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대리님 주의 ;ㅅ;

 

[해준백기] 동상이몽

(같은 침상(寢床)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같이 행동(行動)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딴 생각을 함을 이르는 말)

 

고작 부러지기 쉬운 얇은 뼈를 감쌀 뿐인 얇은 피부는 상처입기 쉽다. 파리하게 긴장된 근육과 힘줄의 떨림이 얇은 피부를 통해 해준에게로 전해진다. 맥박의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점를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강하게 눌러주자 제 밑에 깔린 여자가 파득 몸을 떨었다. 반항이라 치기도 민망할 정도의 연약한 밀어냄은 해준의 눈빛에 더욱 이채만 가중시킬 뿐인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윽. 확보되지 않은 기도의 좁은 틈새로 눌린 신음이 새어나오지만 해준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더니 이내 여자의 얇은 목에서 우득, 하는 소리가 났고, 이내 여자의 몸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 그제야 탁한 숨을 뱉어낸 해준의 입꼬리가 찬찬히 올라간다.

 

수고많았어요.”

 

-

 

끄응, 앓는 소리와 함께 쥐고있던 서류조차 떨군 채 백기는 책상위로 쏟아지듯 엎드렸다. 후우우, 낮게 뱉어낸 한숨에 묻어나는 달큰한 술냄새는 해준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어제 한석율이 방방 뛰며 다가와 백기의 귀에 귓속말과 함께 윙크를 날린거로 보아 친목도모를 핑계로한 술자리였음이 분명했다.

 

끄으으, 가래가 껴 걸걸해진 백기의 목소리 끝에 톡,토독 하고 손가락이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숙취에 고통스러워 하는 와중에도 손가락이 액정위를 부산스레 움직이는 것, 그리고 장문의 욕설이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 보나마나 수신인은 한석율이겠지. 해준은 소리만으로도 뻔히 예상되는 백기의 행동에 작게 웃음짓다가 지잉 소리를 내며 울리는 프린터기로 다가간다. 인쇄된 서류의 오탈자와 함께 내용을 다시금 정리하던 꼼꼼한 눈빛이 조금 틀어져 백기의 엎드린 뒷모습에 가 꽂힌다. 평소 단정히 손질하던 백기의 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것만으로도 백기의 컨디션은 알만했다. 안쓰러운 부사수를 위해 작은 위로라도 해줄까 싶어 해준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친절을 배풀기로 마음먹고 백기의 등 뒤로 다가갔다.

 

장백기씨.”

“...!!! ! 대리님!”

 

, 일어나란 얘기는 아니었는데. 해준의 목소리에 버릇처럼 벌떡 일어난 백기가 울리는 머리를 얼른 짚었다. 골이 딩 딩, 종소리라도 나는 양 흔들렸다.

 

앉아도 됩니다. 별로 뭐 시킬 껀 아니니까.”

......”

장백기씨. 놀라지 마십시오.”

“...?”

 

그 말을 끝으로 해준은 양 손을 백기의 어깨에 올리고 가볍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 , . 잠시만요 대리님. 괜찮은...!당황스러움에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손을 위로 아래로 어찌할지 몰라하던 백기가 해준이 손에 힘을 줘 누르자 작게 신음을 냈다. -.

 

놀라지 말라니까.”

아니, 그 저...”

 

무뚝뚝하고 저와는 옷깃을 스치는 일조차도 적었던 해준의 갑작스런 터치, 그리고 안마에 백기는 정신없이 눈알을 데루룩 굴렸다. 말려야하는데. 대리가, 일개 그것도 새파랗게 아래인 신입사원의 어깨를 주물러준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를 백기또한 알기에 엉덩이를 자꾸만 들썩이자 해준의 손가락이 스물스물 머리카락이 끝나는 지점의 목덜미로 올라와 꾹, 누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요.

. 습관적으로 대답한 백기가 고개를 푹 숙인채 움직임을 멈추자 해준은 그제야 조용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백기의 목덜미부터 어깨를 쓰담듯 주물렀다. , . 백기의 몸이 파득 떨리자 해준의 움직임이 조금 잠잠해졌다.

 

, 대리님 그게, 아픈건 아니구요...정말인데...”

압니다.”

 

백기의 흐트러져 하늘 높이 솟아있는 뒷머리에 고정되어 있던 해준의 시선이 제가 쥐고있는 남자치곤 가느다란 목덜미를 향해 점점이 내려갔다. 조금씩 스쳐가는 어제의 선명한 기억이 백기의 뒷모습에 오버랩된 순간 해준이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뺐다.

 

“...대리님?”

장백기씨.”

, ...?”

 

수고 많았어요.”

 

무슨 뜻인지 감조차 잡지 못한채 뒤돌아 멍하니 해준을 바라보던 백기가 ... 작게 대답을 흘리곤 작게 웃음지었다. 해준또한 입꼬리를 찬찬히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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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백기] 분노

단문2015. 2. 28. 19:34

*모바일 주의



해준백기/대리백기




명치께부터 스믈스믈 올라오는 불쾌함이 숨 막히게 답답해 백기는 가슴 언저리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이 답답한 통증의 원인이 불분명하다면 속이 안좋다던지, 아니면 피곤해서라던지 등의 판단으로 소화제나 꿀떡 삼켰을테지만 원인이 너무나도 분명한것이 백기의 신경을 더욱 건드는 요소였다. 이게 소위 말하는 잡은 물고기한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라는 걸까.



백기는 얼마전 복사를 위해 간 탕비실에서 신나게 이 '잡은 물고기-먹이 이론' 을 떠들어 대는 석율의 말을 불현듯 기억해냈다.


그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도 못했고, 또 으레 던지는 석율의 실없는 수다거리겠거니 치부해버리고 가볍게 흘려들었는데, 백기는 그때의 저를 찾아가 넥타이를 세게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런 연애의 이론 쯤으로 떠돌아 다니는 문장을 제가, 그것도 직접 몸으로 뼈저리게 느낄일이 존재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백기는 한손에 쥐고있던 볼펜이 빠득 소리를 내며 바들거리는 것도 신경쓰지 못한 채 고개를 작게 틀어 제 오른편을 가로막은 파티션을 바라봤다. 항상 그와 저를 갈라놓던 회색빛의 차디찬, 그리고 어쩐지 한없이 높게만 느껴졌던 원망스럽게도 큰 존재감의 벽이 있다는걸 처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극상. 하극상이 일어났을겁니다. 이게 없었으면.

잇새로 스읍. 숨을 들이 마시며 백기는 여직 쥐고있던 볼펜을 책상에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분명 책상에 부딪히고 도루룩 굴러가는 플라스틱 소재의 볼펜 소리가 들렸을것이었음에도 무심하게 컴퓨터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한채 키보드만 두드리고있는 제 사수. 강해준 대리를 백기은 몸을 굳이 뒤로 젖혀가는 노력도 서슴지 않으며 지긋이 쳐다본다. 드드득 당겨진 의자가 내는 소음이 작게 울린다.
끝까지 안보실껍니까? 대리님?



"장백기씨"
"에-네?!"
"일 안합니까"



시선은, 그 놈의 시선은 빌어먹게도 앞으로 고정한 채 무뚝뚝한 '상사'로서의 말이라니. 백기는 치미는 분노에 얼굴이 홧홧해져 신경질적으로 뜨끈한 눈을 짓눌렀다. 진짜 미워. 분노에 뒷목부터 정수리께가 쭈삣 일어서는게 느껴진다. -장백기씨. ...예.



"네. 일 안합니다."
"-네?"
"일 못하겠습니다. 저 잠시...



숨과 함께 목끝에서 간질거리는 분노를 겨우 삼켜낸 백기가 쥐어짜듯 소리를 냈다.



"잠시만 쉬었다 오겠습니다. "



대답을 기다릴 여력도 없어 백기는 말만 툭 뱉어내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런 백기의 통보아닌 통보에 그제야 시선을 옮긴 해준의 시야에 백기의 시뻘건 목덜미가 잡힌다.
부끄러움? 부끄러울때 마다 목덜미부터 귀, 얼굴 전체로 붉음이 퍼져나가는 백기를 떠올린 해준이었지만, 그 생각은 곧바로 해준의 머릿속에서 묵살되었다.

백기를 부끄럽게 만들만한 상황은 한가지도 없었을 뿐더러, 저를 힐끗거리며 바라보던 백기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른 온도였던걸 생각하며 해준은 손가락을 책상에 천천히 두드렸다.


딱,
​따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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