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해준진] 戀心 (연심) (for.렘피님)

                              w. 박두부




“할멈, 그 벚꽃이야기 말이야. 자네가 내게 했던가.”



밤낮 가리지 않은 오입질과 계간 질에 미쳐 날뛰더니 지난날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들어와 제 방에 틀어박혀 반나절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아 집안 종들의 애를 잔뜩 타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진이 이미 미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야장의만 달랑 걸친 채 느릿한 걸음으로 툇마루에 걸터앉아 뱉은 소리란 게 참으로 묘한 것이라, 주변에서 비질을 하던 종놈들도, 진이 행여나 고뿔이라도 걸릴까 푸른빛의 포를 들고 종종걸음 하며 다가온 늙은 여종조차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진을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턱을 손에 괴고는 멀거니 마당과 담장 따위를 바라보는 진의 눈에 가득 머금어진 싱숭생숭함이 퍽 낯설었다. 




*



왜 대체 내가 이곳에 있는 건지 참으로 모르겠구나. 입으로 연신 중얼거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돌이 깨져 곳곳이 울퉁불퉁 거리는 담벼락에 손을 대고 빼꼼 건너편을 바라보던 진이 누군갈 보고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 덕에 손바닥이 깨진 돌에 긁혀 작은 상처가 났지만 진은 그것보다는 아플 정도로 쿵쿵 울리는 심장을 연신 때려대기 바빴다. 이, 이게 무엇이란 말이냐. 왜 저 치를 보고...!


으리으리하다 표현하기엔 조금은 부족한, 높지만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담장은 강대감 집안의 성품을 잘 표현하는 듯 했다. 높은 권세를 휘두르지 않고 아랫것들을 잘도 보살피기로 도성 내 소문이 자자한 강대감집 이야기는 아무리 주변에 관심이 없는 진이어도 귀동냥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댁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그리 청렴결백하다더라. 여색엔 관심도 없고 그저 학문을 쌓고 몸을 단정히 하는 것에만 그리 관심을 가지더라 하는 등. 제 무리들이 괜한 투기 섞인 담화를 할 때도 진은 그저 무심하게 술만 삼켜 넘겼다. 참 재미도 없게 사는구나. 그리 가볍게만 생각해 넘겼었다. 그랬는데. 


가슴을 몇 번 내려치던 진이 그제야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곤 다시 담벼락 밖으로 빼꼼 고개를 잡아 뺐다. 저가 방정을 떨어댈 때 얼마나 걸음이 빠른 건지 어느새 점만 하게 보이는 강대감댁 아들의 모습에 진이 황급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걸이조차 단정했다. 모래며 돌이 대중없이 놓인 흙바닥을 걸으며 어쩜 저리 발소리 하나 흘리지 않을까. 마치 쓸데없는 과정 따윈 모조리 생략이라도 한 듯 한 간결한 움직임이었다. 그와 달리 이리저리 숨고 뛰어다니느라 어느새 신 곳곳에 묻은 흙이 부끄러워져 진이 잠시 허리를 숙이고 흙을 털곤 또 걸음을 바삐 옮겼다. 펄럭이는 도포자락이 햇빛을 만나 은은한 윤기가 흘렀고, 소매 틈에 끼운 책은 정갈했다. 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듯 한 윤곽에 진이 제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여종을 재촉해 최대한 단정한 색감과 모양새의 옷을 입고 나온지라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진은 해준을 처음 본 날 제 옷차림을 상기하고 볼을 붉게 물들였다. 천천히 붉은 염료라도 떨군 듯 볼 중앙에서부터 천천히 얼굴 전체로 퍼져가는 붉은 빛은 부끄러움 보단 수치의 감정이 짙었다. 


저를 어찌 봤을까. 


해가 중천에 뜬 한낮부터 옷을 풀어 헤쳐 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저를. 그때 때 아닌 봄바람만 아니었어도. 그래서 옷자락만 휘날리지 않았더라도. 문득 그에게 보인 맨 몸이 신경 쓰여 진은 주먹을 쥐어 제 이마를 콩콩 때렸다. 또 주변은 왜 하필이면 분홍빛 벚꽃이 가득해 저를 싱숭생숭하게 하는지.


아차, 또 놓칠 뻔 했다. 퍼석하고 모래가 짓이겨지는 소리를 내며 진은 다급히 내달렸다. 

아니, 놓쳤나?



몇 번이나 고개를 두리번거려도 익숙한 뒷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아둔하게 지난날을 후회하다 눈앞의 중요함을 놓치다니. 그대로 벙찐 채 서있는 진의 어깨가 둥글게 쳐졌다. 벚꽃이 다 무어라고.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여럿의 입을 거쳐 퍼진 낭설이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는 게지. 자책에서부터 원망으로까지 흘러간 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역시 저와 맞지 않는 짓을 한 게 문제겠지. 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나 데리고 몸을 섞지 않으면 도무지 이 더러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 이젠 답답하게 목을 죄어오는 것 같은 저고리를 풀어 헤치려던 순간 진의 어깨에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묘한 짜증이 들끓던 와중에 제 어깨를 잡아오는 힘이 달가울 리는 없었던 지라 진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팔을 강하게 쳐냈다. 



“-어딜, 함부…….”

“아, 놀랐다면 미안합니다.”



찰싹하는 제법 매서운 소리와 함께 주춤 뒤로 밀린 몸의 주인에게서 단정한 음성이 들렸다. 내내 뒤만 쫒던 이. 함께 마주볼 일이 또 생기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 강대감댁 아들 강해준. 얼굴을 확인하고 되레 몸을 물린 건 진이었다. 손가락을 몇 번 주억거리다 제 팔에 껴있던 책을 단단히 잡는 손이 붉어진 게 신경 쓰여 진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을 해온건 해준 이었지만 어찌됐든 몸에 붉은 자욱을 만든 건 저였으니. 



미안한 마음이 넘실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애먼 손톱 주변의 여린 살들만 꼬집으며 괴롭히던 진의 볼이 발갛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해준이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놀라게 해서.”

“...아, 아닙니다. 별거.”

“그저 아까부터 자꾸만 뒤를 좇으시기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해서…….”

“!”



아뿔싸. 제 서툰 잠행은 이미 저 사내에게 진즉 들켜버렸었나보다. 저의 뒤를 자꾸만 쫒는 낯선 이를 어찌 생각했을까. 그날의 만남을 혹여나 저만 기억한다면 저 이에겐 정말로 처음 보는 사내가 저를 따라다니는 거였으니. 밀려드는 창피감에 진의 귀 끝까지 열기가 차올랐다. 



“....니까.”

“예?”

“착각이라도 한겝니까!! 제, 제가 왜 댁 뒤를 따라다니겠습니까!”



해준의 단정한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간다. 허나 그 당혹감이 진의 가슴에 퍼져나가는 부끄러움의 크기와 비교할 수 있을까.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수치심에 잔뜩 절어 진의 머릿속이 흐물거린다. 저가 무슨 말을 뱉는지도 모른 채 해준을 흘기다 고개를 푹 숙이다를 반복하던 진이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달음박질 쳤다. 볏짚만 깔린 창고에서 사내의 것을 품고 신음을 흘리는 걸 아비에게 들켰을 때도, 긴 몽둥이로 두들겨 맞느라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집 앞 마당이며 길거리를 기어 다녔을 때도, 이정도로 벌겨 벗겨진 느낌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저 치가  대체 뭐 길래 저에게 이런 감정을 주는지. 


달리느라 요동치는 몸짓 탓에 강하게 씹힌 입술은 부풀다 못해 피가 새어나왔지만 진은 한참이나 그대로 내달렸다. 시장통 길 한가운데에서 멈춘 발이 느릿하게 땅을 구른다. 시익, 거친 숨이 터지는 순간 옷소매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엉망으로 너덜거리는 입술을 훔쳐냈다. 저를 황당하게 보는 해준의 시선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쫒고자 머리를 휘적 여러 번 털어내자 팔랑, 무언가 가볍게 진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절로 가는 눈길 끝에 걸리는 건 분홍빛을 머금은 꽃잎. 제 손바닥 안에서 어롱 거리던 그것이 땅바닥에 추락해서 굴러다니는 모습에 기어이 진의 눈가가 흐릿하게 젖어들었다.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그게 무슨 지독한 농(弄)인가…….”  




역시나 낭설은 낭설일 뿐이지.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띤다. 잠잠함을 얼굴에 덧대고 너덜거리는 심장을 숨기려 해도 떨리는 목소리만은 차마 갈무리가 되지 않는지 이내 입을 꾹 다무는 진의 볼이 푹 팼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벚꽃은 진을 감싸지 못하고 천천히 땅으로 향한다. 어른거리는 분홍빛이 괴로워 진이 눈을 질근 감았다.





벗 그리워 벚꽃인가

님 그리워 벚꽃인가

 

벚꽃닢 피날때 찾아온 님

벚꽃닢 지려니 떠나가네

 

올때는 봄소식 전하더니

갈때는 눈물만 전하더라

 

소소한 바람에도 흩날리는 벚꽃잎

스러지는 꽃잎 슬퍼 무상한듯 하늘보니

벚꽃잎은 아니뵈고 님얼굴만 떠오르네


                               (-벚꽃, 하영란) 




***



렘피님께서 써주신 初恋 ( http://another-hardboiled.tistory.com/128 ) 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삽질하는 김진 하핫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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