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석율그래] 가끔은

단문2015. 2. 28. 19:37

[석율그래] 가끔은

 

 

더 얘기하면 나 화낼 거야. 장그래.”

 

순식간에 낮아진 목소리에는 간신히 눌러 담은 듯한 분노가 있었다.말이 나오는 대로 뱉어대던 그래가 조금 주춤했지만, 오히려 석율의 적반하장적인 문장을 듣고는 다시 꿈틀 미간을 좁혔다.

 

화요? 화는 지금 제가 내야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화가 나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는 거야.”

 

그만 하라는 듯 눈을 의식적으로 피한 석율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자 그래는 목덜미부터 뜨끈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먼저 잘못한 게 누군데. 지금 사과해야할 사람이 누군데 왜 저한테 뭐라고쏘아붙이는지. 그래는 치미는 분노를 견디기 힘들어 떨리는 손으로 아파오는 눈두덩을 꾹 눌렀다.

 

 

사귄지 1년여가 넘는 시간동안 두 사람이 다툰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벼운 웃음을 짓는 석율의 애교 섞인 치댐과 그를 적당히 밀어내는 그래. 남들이 보기엔 그저 조금 친한 직장동료.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가끔 보면 닭살이지만 대부분은 꽁트같은 커플. 딱 그 정도 선을 지키는 건 석율과 그래의 보이지 않는 룰 같은 거였다. 이정도 선을 지킵시다. 라고 딱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사귀다보니 서로 자연스럽게 두 사람만의 룰이 만들어진 경우였다.

 밝고 타인과 관계를 쌓는 게 익숙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상처도 많고, 그런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러한 모든 상황이 과부하에 걸릴 경우 한없이 우울해지기 일쑤인 한석율과, 석율을 밀어내고 귀찮다는 듯 털어대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석율 에게 다가가고, 관심을 가져달라 부르짖기도 하는 장그래. 두 사람은 적정한 온도차를 조절해가며 지금껏 잘 사귀어오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지킨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커플이었다.

 허나 여느 커플이나 그렇듯 다툼은 항상 사소한 데서 일어났다. 그저 단순한, 한쪽의 야근 때문에 약속이 깨진. 평소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그런 사소한 일. 석율이 우는 소리와 함께 약속을 파하는 사과 전화를 했고, 그래도 별다른 반응 없이 웃으며 넘길 수 있던. 허나 그래는 저번 주 주말에도 석율이 집에 내려가 봐야 한다며 갑작스레 깼던 약속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 당시는 아무생각도 없던 그 일이 오늘의 상황과 겹쳐지자 순식간에 서운함이 몰려와서 그래는 뚱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었다.

 

그럼 앞으로도 만나지 마시던가요. 자꾸 이렇게 약속 깰거면.”

 

그래가 뚱한 목소리로 뱉긴 했지만 평소였으면 아이 왜 그래~미안하다니까!’ 라며 애교 섞인 말투로 달래줬을 석율 또한 그래의 말에 날카로운 반응을 뱉었다.

 

“-? 무슨 말을 그리해?”

그렇잖습니까. 자꾸만 깰 건데 약속 잡는 의미가 있나요?”

“...장그래.”

 

얘기 좀 해. 내가 탕비실로 내려갈게. 차갑게 뚝뚝 끊어지는 말과 함께 끊어진 전화가 뱉어내는 차가운 기계음에 그래가 울컥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전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이제 막 퇴근준비를 하려 재킷을 입던 김대리가 화들짝 놀라 왜 그러냐 물어왔지만 차마 웃지도 못한 채 꿀꺽, 분노를 삼켜내고 아니라 짧게 답한 뒤 탕비실로 급하게 향했다. 분노로 점철된 그래의 발걸음이 복도를 쾅쾅 울려 강대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백기마저 힐끗 바라 볼 정도였다.

 

 

탕비실에 먼저 도착해 복사기에 몸을 살짝 기대고 있던 석율의 눈이 그래를 보자 번뜩 빛났다. 왔냐는 인사도 없이 쏘아붙이듯 뱉어내는 석율의 말에 그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아까 그거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자꾸만 약속 깰 거면 차라리 만나지 말자고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문장인거 알지? 말 똑바로 해.”

글쎄요, 오해일지 아닐지는 한석율씨가 판단하시면 되겠네요.”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듯 넘나드는 말에 잔뜩 솟은 가시가 두 사람을 난도질하듯 찔러온다. 저도, 상대방도 상처받는 건 알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 두 사람은 이를 악물었다.

 

 

*

 

 

말을 마치고 몇 번이고 더 뒷머리를 긁적이던 석율이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열을 식히려는 건지 손가락을 곧게 펴 파닥파닥 흔들어대기도 하고 퍽이나 부산스럽지만 그래는 반면에 얌전했다.

단지 이빨로 통통한 제 입술을 못살게 굴 뿐이었다. 분노에 차 그래에게 모진소리를 뱉긴 했지만, 그 하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입술만 깨물고 있는 그래를 보는 석율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허나 그래가 뱉었던 말이 마치 저와의 만남 자체를 끊어내려 하는 것으로 들려 도무지 화가 안날수가 없었다. 물론 저번 주말도, 오늘도 얼마나 둘이 기대를 했던가. 먼저 만나서 어디를 가고, 그 다음에는 이걸 보러가고 계획을 짜느라 신났던 건 오히려 석율쪽이 더 했던지라 약속을 깬 입장인 저가 할 말은 없었다. 허나 평소였으면 유하게, 아니면 시크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을 그래의 반응에 당황스럽기도 했던지라 오히려 더욱 버럭 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두 사람의 다툼이 잦지 않았던 건 두 사람 모두 참는 성향이 있다는 게 큰 이유였다. 괜한 다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 다투며 감정 소모할 시간에 그저 둘이서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놀고 싶다. 라는 게 그래의 의견이었고 석율도 그에 동의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지금껏 웬만한 서운한 일은 가슴에 묻고 원만하게 지냈던 거였는데. 석율은 힐끗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꽤나 찌르르했던 설전 끝에 찾아온 침묵이 이어진지 벌써 십 여분. 그래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푹 숙인 채 입술만 꽉꽉 물고 있고, 석율은 한숨만 푹 쉬고 있었다.

 

쉽게 달아오른 뜨거운 머리와 입이 뱉은 말들이 창피할 만큼 석율은 어느새 화가 많이 가라앉아있었다. 마음에 담아둔 말을 쏟아낸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무엇보다 저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래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는 게 화가 가라앉은 결정적 이유였다. 석율이 좋아하는 그래의 모습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물끄러미 앞만, 정면만 바라보는 꿋꿋한 아이였으니까.

 

어쩔 수 없으니 저가 지고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석율이 꿀꺽 목울대를 한번 울리고는 그래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장그래.”

 

역시나 대답은 없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씁쓸함에 위가 쓰렸다. 장그래. 그래야. 한층 다정해진 석율의 목소리가 그래의 어깨를 흠칫 울렸다.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게 안심돼서 한번 메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훑던 석율이 용기내 그래의 양 팔뚝을 그러쥐었다.

평소보다 뜨끈한 체온에 많이 화났나 싶어 난감했던 석율이 고개를 조금 숙여 여전히 땅만 보고 있는 그래의 얼굴을 살핀 순간 놀라 저도 모르게 헉, 헛숨을 뱉어냈다.

 

, 장그래. 그래야. 울어?”

 

언제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건지 동그란 눈매 가득 그렁그렁 들어차있는 맑은 액체가 똑똑 떨어지다 못해 양 볼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술만 깨물 뿐 그 흔한 물기어린 소리하나 내지 않은 그래의 모습에 석율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같이 꾹꾹 눌러 참고 있었을 그래가 안쓰러워 석율은 서둘러 그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의 반항도 없이 끌려 들어온 여린 몸이 그제야 가볍게 떨린다. 허나 석율이 그래의 등허리를 감아와도 그래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석율의 허리에 손을 감아오지도 않았다. 많이 서러웠구나. 우리 그래. 석율은 제 자신을 자책하며 그래의 몸을 더욱 꼭 안았다.

 

미안해. 장그래. 정말 미안. 내가 약속 깨서 서운했을 텐데 나쁜 말이나 하고.”

“.....니다.”

?”

“...아닙니다. 한석율씨 잘, 못 흑, 아닙니다.”

그래야..”

 

석율이 고개를 틀어 뜨끈한 그래의 볼에 가벼운 입술을 내리자 그래가 기어이 서러운 울음소리를 터뜨린다. , . 아이처럼 헐떡이는 숨을 막지도 못한 채 그래는 덜덜 떨리는 몸을 하고선 그제야 석율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볼을 석율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기대왔다. 헐떡이며 우는 와중에도 계속 제,. , 잘못, 훌쩍, . 띄엄띄엄 말을 해오는 그래의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쉿, 석율이 다정하게 말렸다.

 

, 괜찮으니까 그래야. 그만 말하고, 뚝하자.”

“..., ,석율씨.”

, 그래야.”

나 헤어지자고, , 말한, 거 아닙,,.”

 

새삼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아까보다 더 몸을 들썩이는 그래를 다독이며 석율은 몇 번이고 귓가에 다정한 말을 쏟아냈다.

"그럼, 알지 우리 그래가 그럴 리가.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우리 다음 주에는 꼭 놀러가자. ?"

 

그제야 안심되는 지 작게 끄덕이는 조그마한 머리가 어깨에서 느껴지자 석율이 목으로 웃고는 그래의 드러난 흰 목덜미에 쪽쪽 입맞춤을 퍼부었다.

 

다음주에는 12일로~?”

“....좋습니다.”

 

분위기 파악 하시죠. 라며 발을 세게 밟아 올까봐 언제든 뒤로 뺄 준비를 하고 있던 석율의 구둣발이 흠칫 흔들렸다. 석율의 말에 몸을 더욱 기대오며 수줍게 뱉어낸 그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율은 귀부터 얼굴,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아까와는 다른 열이 차올라 급히 제 얼굴을 부채질 하는 석율과, 그런 석율의 움직임에 작게 웃는 장그래가 있었다.

 

 

*

 

와 석율그래 제대로는 처음써본다(벙찜)

얼마전 트친분과 이야기나눴던 석율그래의 성격? 느낌? 을 바탕으로 두사람의 다툼

적정한 온도차를 유지하며 무난히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두사람이 좋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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