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해준백기] 달큰한

단문2015. 2. 28. 19:37

[해준백기] 달큰한.

(어슴푸레한 새벽의 물 한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문득 컴퓨터 화면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보자 보이는 시계는 이미 새벽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을 체감하자마자 온 몸이 이때다 싶게 찌부드 한 게 백기는 잠시간 고통에 신음했다. 밝은 빛을 내는 화면에 가득한 서류와 보고서의 글자마저 흐릿하게 보임에 안경을 벗어 눈을 가볍게 주무른다.

 

딱히 강해준 대리는 숙제를 주듯 퇴근 후까지 일을 끌어가서 할 만큼 무리하게 일을 주는 편이 아니었다. 늘 마감기한에 촉박하지 않게 주는 편임에 지금껏 백기는 조금 늦게 퇴근하거나, 아니면 조금 이른 출근으로 커버가 가능한 일만 해왔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백기의 착각일지 모르지만-내일 아침까지 갑작스럽게 제출해야하는 기안서가 있다며 백기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뭐라 불만은 터뜨리기도 애매한 건 해준의 손과 가방에는 더욱 많은 서류뭉치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덕분에 취미에도 없던 회사 일을 집까지 끌어들여 백기는 어슴푸레하게 새벽빛을 뿜는 시간까지 서류를 작성해야했다. 얼추 마무리 지어져 내일 조금 이르게 출근하면 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백기는 제 메일로 서류를 보낸다.

 

물 한잔만 마시고 잠들어야지. 저릿한 다리를 대충 주먹을 말아 톡톡 두드리며 일어선 백기는 냉수 한잔을 들이켰다. 목젖부터 천천히 적시며 내려가는 차가운 물이 그대로 느껴져 백기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역시 새벽녘은 쌀쌀하구나. 일하느라 올렸던 니트의 소맷자락을 내리며 다시금 물을 머금는다. 송골송골 찬 물방울이 표면에 잔뜩 맺힌 유리컵을 뻑뻑한 눈에 가져다댄다. 눈이 뻑뻑할 때 가끔 하는 백기의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꼬물, 애벌레처럼 몸을 말아 포근한 이불로 파고들었다. 축 몸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이불을 가슴 앞으로 모아 고개를 이불에 파묻는다.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것에 머리가 지끈거릴 것만 같지만 잡생각을 줄이자 슬슬 잠이 오는 게, 크게 하품이나 하고 눈을 감는다.

 

*

 

  내가 알람을 어제 맞췄던가.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요. 젠장! 불에 덴 듯 일어난 백기가 발에 휘감긴 이불로 인해 휘청 이며 코를 방바닥에 찧었다. 욱신거리는 코를 대강 문지르며 화장실로 달려가 폭풍 같은 양치를 하고 대강 옷을 주워 입었다. 늘 고수했던 단정한 패션과 깔끔한 스타일은 어디가고 머리를 세울 생각조차 못한 채 넥타이를 휘날리며 길가로 나섰다. 어젯밤에 머리를 감아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눈을 찔러오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택시에 올라탔다.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저를 도와줄 조력자를 찾았지만 눈에 띄는 이름이 영 없었다. 석율은 저번에 부탁했지만 그마저도 소용없이 강 대리님께 바로 걸려버렸고. 영이나 그래에게 부탁하긴 뭔가 껄끄러웠다. 액정을 몇 번이나 위아래로 쓸어내던 백기의 손가락이 강해준 대리님. 이름 위에서 멈칫했다. 사우나도 다녀왔고, 이젠 제법 농도 걸만큼의 사이는 된 것 같은데 말씀을 드릴까, 싶었지만 백기는 이내 그만뒀다.

 

빨리 달려가서 준비하면 되겠지. 택시아저씨를 몇 번이고 재촉하며 백기는 불안감에 다리를 떨어댔다.

 

 

*

 

 

, 오우 백기쒸, 머리스탈 바꿨.

바빠요, 미안해요.

 

15층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석율의 말을 끊으며 백기는 후닥 뛰어 들어갔다. 뒤에서 아, 백기씨~! 라며 항의하는 석율의 소리가 들리지만 나중에 대충 커피나 타줘야겠다 생각하며 백기가 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급하게 시계를 확인한다. 9시 정각. 지각은 아니지만 팀의 막내로서 제일 늦게 들어간 게 영 눈치가 보여서 옆자리를 힐끔거리자 해준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늦을 뻔 했네요.”

“..., , 죄송합니다. 대리님.”

, 시간상으론 늦진 않았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주의하세요.”

“....”

 

해준의 표정을 살펴도 그리 화나보이진 않아서 안심하던 백기가 무심코 후끈한 이마를 훑자 닿는 머리카락에 그제야 제 머리상태를 상기한다., 이럴 수가. 낭패감에 귓가가 더욱 후끈하다. 기본적으로 제일 먼저 출근해서 책상 정리 후 조간신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여유로움을 만끽하는걸 중요시 여기는 백기로써는 오늘은 시작부터 참으로 엉망이었다.

일을 하다가 늦게 일어나지 않나, 아침부터 쓸데없는 택시비 지출에, 뛰느라 땀이 비 오듯 하고, 단정하고 스마트하게 보이기 위해서 늘 고정시키듯 올린 머리스타일은 어디가고 정신없이 산발이 돼 붕붕거리는 제 부스스한 머리칼. 당황스러움에 재킷을 대강 걸치고 화장실로 가려던 백기를 해준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붙잡는다. 장백기씨, 서류는 다 됐습니까.

아차, 아직 마무리 할 부분이 남은 서류가 번뜩 머리를 스친다.

 

“10, 10. 아니 5분이면 마무리 됩니다.”

“...서둘러 주세요.”

 

잠깐 이어진 침묵 속에서 복잡한 듯 한 눈빛을 읽었지만 애써 참아낸 듯 낮은 음성만 뱉을 뿐인 해준에게 면목이 없어 백기는 뒷목을 한번 주무르곤 무섭도록 타자를 두드린다.

 

 

*

 

하아, 간신히.., 기진맥진한 백기가 눅진한 몸을 다잡으려 노력하며 비틀 탕비실로 향했다. 쓴 커피라도 마셔야지 도무지 핑핑 도는 머리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보다 훨씬 피곤할 것이 분명한 대리님은 백기가 미친 듯이 마무리 한 서류를 들고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늘 완벽하고 단정했던 해준이지만 오늘따라 퀭한 눈을 숨기기 힘들어 보이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백기는 15층 탕비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그제야 제가 왜 코트를 안 챙겨왔는지 원망을 삼키며 얇은 셔츠차림으로 오들오들 떨며 회사와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커피전문점으로 향했다. 강 대리님은 아메리카노..., 평소 사수의 취향을 떠올리며 주문하려던 백기의 눈에 무언가 달달한 단어가 보였다. , 이런 거 싫, 어 하시려나. 드리면 인상부터 확 찌푸리시는 거 아냐?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카운터 앞에서 조용하게 고민하는 백기에 주문이 진행이 없자 뒷자리 여자가 무어라 큰소리로 불평했다. 그에 어깨까지 떨며 놀란 백기가 무심결에 외친 단어가 삑, 제 눈앞의 액정에 입력되는 걸 봤음에도 차마 무를 생각조차 못한 채 백기는 살그머니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뻐근한 눈을 비비며 제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던 해준이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후우, 절로 나오는 한숨소리에 더욱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라 애써 털어내려 미간을 한번 꾹, 눌렀다. ..., . 리님. 옆에서 잔뜩 기죽은 백기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그대로 손을 내려 바라보자 쭈뼛, 어깨가 잔뜩 움츠러져 있다. 오늘은 별다른 말도 안했는데 왜 저러지.

 

왜요, 장백기씨.”

, 그게. 이런 거, 싫어 하실 꺼 같지만, , 아는데 그래도.”

장백기씨, 누누이 말했죠.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하게 말해야 상대방이 쉽게 인지한다고. 바이어들에게도 그리 자신감 없이 말할 껍니까?”

, 이거 드십시오!!!”

 

냉정한 해준의 말이 쏟아짐에 따라 점차 숙여지던 고개가 별안간 불쑥 들리더니 해준의 코앞으로 무언가 후끈한 게 들어찼다. 놀라 동그래진 해준의 얼굴을 쳐다도 못 본 채 계속 바들거리는 손으로 붙잡고 있는 건 테이크아웃 컵이었다. 아니 커피 주면서 계속 그렇게 우물거리는 거였어? 의아함에 받아들자 달큰한 냄새가 훅 끼쳤다. 저도 모르게 코를 씰룩이자 백기가 해준의 얼굴을 확인하고 어쩐지 울상이 된다.

 

, 시 바꿔올까요?”

이게 뭡니까 장백기씨?”

, . 대리님께서 아메리카노를 즐겨 드시는걸 아, 는데요.”

.”

피곤할 땐……..., 좋다고...해서요...”

 

끝으로 갈수록 음소거를 하는 건지 점차 입안으로 먹히는 소리에 끝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척하니 알아들은 해준이 백기의 붉은 눈 꼬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컵을 기울여 핫초코를 머금었다. 이리 달짝지근 한건 영 취향이 아니었다. 제 건강을 해치는 것만 같은 그런 해로운 느낌이었기에 즐기지 않았다. 그런데 썩 나쁘지 않은 게,

 

맛있네요. 장백기씨.”

?”

마침 피곤했는데, 고맙습니다.”

“.......”

이제 일 하러가죠?”

, !”

 

금방 사무적인 톤으로 돌아온 해준에 다닥, 뒷걸음질을 쳐 제 자리로 돌아간 백기가 잠시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쏙, 파티션 안으로 몸을 숙인다.

무얼 하는지 모르겠지만 다리를 제자리에서 굴려대는 게 보여 해준이 조금 웃었다.

 

*

150109. 

'단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준백기] 꿀꺽 (비번: 장백기 나이)  (0) 2015.02.28
[석율그래] 가끔은  (0) 2015.02.28
[해준백기] 무딘이별  (0) 2015.02.28
[해준백기] 동상이몽  (0) 2015.02.28
[해준백기] 분노  (0) 2015.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