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해준백기] 무딘 이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평소처럼 출근을 해 평소처럼 일을 했고, 중간에 사소한 실수로 인해서 날카로운 한소리를 듣기도 하고. 소란스러운 동기들과 함께 탕비실에서 실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도 하고, 평소처럼 그의 차를 탔고, 그의 집에 갔고. 지독히도 똑같은 일은 마치 정해진 일정처럼 또다시 반복하던 순간을 깨트린 건

백기, 저였다.

 

우리, 헤어졌으면 좋겠어요.”

 

그 말마저도 참으로 가볍게 떨어졌다.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을 뱉은 순간만은 망설임 따위 없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해왔던 짧은 문장이지만, 고민이 끝나자 말은 쉬웠다.그 말에 저에게 따끈한 핫초코가 든 머그컵을 건네던 그의 손이 조금 멈칫 한 듯도 싶었지만, 그는 컵을 백기의 손에 쥐어준 채 그저 옆자리에 풀썩 앉을 뿐이었다.후룩, 그가 든 컵에선 씁쓸한 커피향이 풍겼다. 몇 년을 봐도 익숙해 질 수 없는 맛과 향이었지만, 그 마저도 강해준이기에 좋았다.

 

  그래요.”

 

그가 입을 열자 쌉쌀한 향이 풍겨왔다. 아직도 온기를 품은 그의 숨이었지만, 그 온기는 백기에게로 닿기 전에 차갑게 식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럴 때마저도 지극히 사무적인 톤에 서운함과 분노가 치솟았지만,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마시길 좋아했던 커피를 꿀꺽, 꿀꺽 단숨에 의무적으로 들이마시는 그의 모습이 보여 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기뻤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의식은 하는군요.

더 이상 제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으니, 가볼게요. 그의 방으로 들어가 큰 가방을 메고나오자 그의 눈이 조금 둥그레졌다. 이제와서 놀라지 마세요. 당신의 무관심에 지쳐갈 무렵부터 하루에 내 물건 한 개씩, 그렇게 싸왔던 짐이니까. 몰랐다고 할 수 없겠죠.

당신의 집을 채우고 있던 내 물건을 하루에 한 개씩 챙겼다는 건, 당신이 이런 나를 눈치 채고 챙길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는 거. 그러나 당신은 그리 하지 못했다는 거.하지만 당신의 그런 성격을 지독히도 아는 건 저였는데, 뭐 그리 미련을 떨었는지 모를 일이네요. 백기는 조금 우는 듯 울었다.

  가방의 무게가 새삼 백기의 몸을 휘청 이게 했다. 떨림에 당기는 턱을 조금 강하게 닫아 물고 백기는 연인으로써 마지막일 인사를 고했다.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제 2년 전의 풋내기가 아니니. 회사에서 티를 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 하긴. 아무도 대리님과 제가 그런 관계란 걸 몰랐을 테지만요워낙 철저하게 숨겨지는 둘 사이의 관계가 서운하기도 했다. 사적인 일을 공적인 공간에 끌어들이지 말자는 그의 분명한 말에 동의한 저도 잘못인지라 할 말은 없지만.

내일부터는 정말로 공적인 관계가 되겠네요. 사수-부사수. 그런 관계.

 

백기는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를 하곤 집 밖으로 나갔다. 차마 목도리를 걸치지 못해 드러난 훤한 목덜미가 시렸다.

 

*

 

해준은 소파 등받이에 천천히 등을 기댔다. 제가 썩 마음에 들어하던 푹신하고 매끈한 질감의 소파였지만, 오늘은 제 등을 편안히 받아주는 게 아니라, 밀쳐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분명 집안의 온도는 후끈할 정도였음에도 해준은 손끝부터 차갑게 얼어붙었다. 서늘한 손가락을 문질러 온기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히려 손이 더욱 시려 그만둔다.

백기가 지쳐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숨기지 못하는 아이니까. 사랑해주세요, 늘 눈으로 말하던 아이니까. 하지만 그만큼 해준도 그런 백기에게 질려갔었다.

 

본디 다정하지 못한 성격인 저로써는 해준은 백기에게 참으로 저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다르지만 둘이 함께 가서 맞춘 커플링이나, 매일 저녁 제 집으로 데려와 사랑을 나누고, 만지고 접촉하는 일련의 과정들. 누군가와 닿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던 저가 살을 맞대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 것 자체. 백기의 커다란 가방이 하나씩 채워지는 걸 보고도 모른체 한다. 가벼웠던 가방이 하루하루 묵직해지지만 해준은 애써 무시해왔다. 늘 그 가방을 들고 제 곁을 떠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니었다. 아니 아닐꺼라 믿었던 거겠지. 묵묵히 앉아있던 해준이 쑤셔오는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지독한 두통이다.

 

 

-

지독한 권태로움 끝에 찾아온 무딘 이별. 눈물따윈 없는 이별을 쓰고싶었는데....(결과물:뭐, 뭐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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