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영도효신] 한 발짝

단문2015. 5. 29. 00:54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

 -김현승 [고독]




짝사랑이란 게 이렇게 거지같은 거였단 걸 미리 알았더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몇 년째 반복하고 있는 생각이지만, 후회하기엔 많이 늦었다는 걸 잘 안다. 벗어날 수 있었다면 진즉 벗어났겠지. 잔뜩 날을 세운 그에게 낮 동안 할퀴어져 뚝뚝 피를 흘리는 제 불쌍한 심장을, 고독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마다 덕지덕지 밴드를 붙여 임시방편일 뿐인 치료를 한다. 그러나 본래 질기지 못한 살굿빛의 천은 영도의 심장에 난 많은 상처를 덮기도 전에 붉은 피에 절어 접착력을 잃곤 했다. 황망하게 주저앉아 아픈 부근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고만 있던 영도가 울컥 치미는 감정에 주먹으로 바닥을 쿵, 내려쳤다. 카펫이 깔린 호텔방은 제 아비가 당당하게 뽐냈듯 소음 따윈 가볍게 집어삼킬 뿐이어서 풀 데 없는 분노가 영도를 잠식해 나갔다. 


벗어날 수 없으면 끊어내는 게 맞을 터였다. 저를 위해서도, 효신을 위해서도. 하긴 여기서 효신을 위해서라는 것 자체가 꽤나 웃긴 자기변명이었다. 저 혼자만 앓던 사랑을, 누군가에겐 몇 년 동안이나 닿지 않은 애절한 혼자만의 외침, 그저 저 혼자만 아프면 됐으니까. 효신이 돕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냥 혼자만. 아무도 모르던 사랑을 정리하면 됐으니까.



-



붉게 충혈 된 눈이 뻐근함에 달아오르자 효신은 막 교문을 지나치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누르다 가볍게 비볐다. 어젯밤 감금되듯 갇힌 제 방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오랜만에 치정이 끈적하게 얽힌 내용으로 유명한 불륜 소설을 밤새 읽었더니 눈은 뒤늦게 항의하듯 잔뜩 비명을 질러댔다. 메말라 뻑뻑했던 눈동자가 손가락에 비벼진 탓에 억지로나마 물기를 머금어냈고, 그제야 아픔이 가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효신이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 끝에 길쭉한 것이 걸렸다. 오늘도 교칙은 어디다가 갔다 버리고 셔츠 없이 달랑 카키 빛의 니트나 걸친 건지. 교칙에 잔뜩 어긋난 니트나 맨투맨을 입는 주제에 꼬박꼬박 남색의 교복 마이를 걸치는 건 또 이상한 고집이라 효신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한소리 해야겠다 싶어 성큼 한걸음을 뗀 순간 영도가 효신을 향해 흐리게 웃고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갔다. 어,




“...저거 가방도 없이 등교하기는.”



분명 저를 봤음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뒤돌아선 영도가 당황스럽긴 했지만 거기에 대고 딱히 뱉을 말이 없어 눈만 데룩 굴리던 효신은 마음과는 다른 실없는 소리나 툭 흘렸다. 생각해보면 날카롭게 비죽이는 얼굴, 굳은 표정, 당황한 표정, 갑자기 혼자 잔뜩 붉어진 얼굴로 다급히 손부채질을 하던 모습까지. 오히려 다른 이들이 보기 힘든 의외의 모습들을 효신에게 잔뜩 보여줬던 최영도지만 효신은 영도의 뒷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침과 동시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다시 눈을 덮쳐왔다. 아무래도 양호실에서 인공눈물이라도 받아야겠다 여긴 효신이 멈췄던 걸음을 떼 학교 건물로 향해갔다. 잠시 멈춰있었을 뿐인데 벌써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영도를 저도 모르게 찾던 효신이 치미는 짜증에 고개를 붕, 휘저었다. 선배를 보고 인사도 않고, 진짜 건방이 점점 하늘을 찌르는구나. 닿지 않는 분노를 눈을 비비는 것으로 대신한 효신의 손이 꾸욱, 제법 세게 눈두덩을 눌러왔다.



-



손에 든 일회용 인공눈물 튜브를 뚫어져라 바라본 효신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얼굴에서 10센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똑, 똑 투명한 액체가 떨어져 효신의 눈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서늘한 온도에 놀란 것도 잠시 금방 효신의 체온을 닮아진 인공눈물은 효과가 제법 빠르게 나타났다. 뻑뻑하게 마르다 못해 붉은 핏줄까지 도독 나타났던 효신의 눈가가 유리구슬처럼 반짝였으니까. 허나 마치 사막의 모래바닥처럼 한참동안이나 메말랐던 눈가는 금방 그 수분을 좀먹었고 빡빡함을 다시 호소하기 시작했다. 어우, 두 셋방울이면 된다더니 이거 제약회사에서 용법을 잘못 설명한 거야 뭐야. 투덜거린 효신이 다시 뒷목을 젖히고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제문이 벽에 냅다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기운 의자에 걸터앉아있던 효신은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한 아찔한 상황을 야기한 깜찍한 놈이 누구인가 뻑뻑한 눈을 들어 도끼눈을 떴다. 범인은 늘 현장에 있는 법. 역시나 입구에서 껄렁거리는 자세를 하고 있는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쑤셔오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느라 바로 누군지 알아채진 못했지만 효신은 저런 짓을 할 놈은 한 놈밖에 없다 여겨 눈을 뜨지도 않고 손으로 비비적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낮게 이름을 뱉어냈다.



“...최영도, 기물파손은 엄연한 범죄거든? 형법 제366조.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기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근데 넌 타인의 재물뿐만이 아니라 공공기관인 학교의 재물인 방송실 문을 파손했어. 이제야 좀 심각성이 보이냐?”

“이효신, 여기 최영도 없어?”

“...탄이? 너였어?”

“아, 어디 간 거야 이 새끼는.”




투덜거리는 조금은 맑은 소년의 목소리는 탄이 맞았다. 그제야 초점을 바르게 맞추고 문가를 바라보자 남색 후드 집업을 입고 뒤통수를 성의 없이 긁어대는 탄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최영도 일줄 알았는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점심시간이 15분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원래는 점심시간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귀신같이 나타나서 밥을 거르고 늘어지게 잠이나 자려는 저를 식당으로 끌고가던 녀석이 웬일로 늦게 오나 했는데. 평소에도 흔한 일이니 반성문 따위나 쓰고 있겠네 했었다. 




“-최영도를 왜 여기서 찾아?”

“아, 맨날 이효신 너랑 최영도랑 밥 먹는 거 다 알고 왔거든?”

“나 형, ...뭐 됐고, 나도 오늘 아침에밖에 못 봤는데?”




어? 놀란 듯 동그래진 눈이 효신을 살펴왔다. 내가 거짓말해서 어디에 쓰겠니. 하는 마음을 담아 어깨를 으쓱 얄밉게 들어 올리자 탄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최영도를, 왜.”

“아니 뭐, 은상이랑 걔랑 나랑 어이없게도 같은 조거든.”

“흐음, 안타깝게도 나도 오늘 한번밖에 못 봤다.”

“걔가 형 아니면 찾아갈 사람도 없는데.”

“오버하긴.”




어이없어 피식 웃는 효신을 보며 되레 더 어이없단 표정을 지은 탄이 성큼성큼 걸어와 효신이 팔을 기대고 있는 책상을 쿵쿵 두드렸다. 

철제 책상이 울려와 짜증스럽게 시선을 올리자 탄의 표정이 제법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진심은 아니지?”

“진심인데. 걔 친구 있잖아. 몰려다니는 애들.”

“그게 친구냐? 필요에 의한 관계지. 그리고 최영도가 정말 형을 친구라

여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형 눈치 빠른 거 알아.”

“-별로.”

“받아주지 않는 건 자유지만, 가지고 노는 건 안 되지.”




가지고 논다니. 불쾌한 문장에 절로 인상을 쓰자 탄이 피식 웃곤 효신의 구깃한 미간을 거칠게 문질러온다. 그리고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불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자 탄은 조금 곤란하게 웃었다.




“걔, 불쌍한 새끼야.”

“…….”

“그렇다고.”



어정쩡한 끝맺음과 함께 탄은 미련 없이 방송실을 떠났다. ...야, 문! 느릿하게 튀어나온 효신의 음성에는 잔뜩 힘이 빠져있어 천천히 느릿하게 공기 중으로 가라앉았다. 와서 잔뜩 이상한 말이나 하고 가는 탄에 괜한 싱숭생숭함이 들어 효신은 손가락에 쥐고 있던 인공눈물을 괜스레 책상에 집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를 수가 있나. 남들을 대할 때와 저를 대할 때의 최영도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는데, 그걸 모른다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핑계지.


효신은 며칠 전 점심시간에 역시나 찾아온 영도에게 처음으로 권했다. 학교 앞에 국수 잘하는데 있던데 오늘은 거기 갈래? -국수요? 내내 생글 거리던 얼굴이 짐짓 굳었다 싶더니 입 꼬리를 올려 웃는 최영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방울져 떨어질 것만 같은 슬픔에 가득 차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굳힌 효신을 보더니 금세 웃으며 어깨에 팔을 걸치며 조잘 거리는 최영도의 모습을 보며 금방 착각임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착각도 아니었나 싶어 효신은 답답해오는 가슴을 퍽, 두드렸다. 가지고 놀다니 누가.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인데.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만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이리 고생하지 않겠지. 기다린 건 최영도 뿐만은 아니란 거다. 효신이 덜컹, 의자가 밀리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다급하게 일으켰다. 




-



예비 종에 이어 울리는 수업 종에 영도의 주변에서 떠들어댄 놈들이 교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웬일로 네가 우리랑 밥을 먹냐? 토마토를 씹어 삼키며 한 놈이 말하자 시끌벅적 목소리가 잔뜩 겹쳐 울렸다. 묻지 말라는 듯 포크로 접시를 소리 나게 찍자 몸을 가볍게 움츠리더니 저들끼리 눈치한번 보고 실없는 소리로 화재를 돌려대는 놈들을 보며 영도는 멍하니 효신을 떠올렸었다.


이젠 습관처럼 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효신. 달그락 거리며 정리하는 주방의 소음을 배경삼아 영도가 느릿하게 허리를 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입맛이 없어 대부분이 그대로인 식판을 보기도 싫다는 듯 툭 친 영도가 또 떠오른 효신의 모습에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의 암전. 그리고 곧바로 컴컴한 눈꺼풀 안 세상은 폭죽이 퍼지듯 노란 불꽃이 툭툭 터졌다. 몽글 몽글 솟아나오기도 하고, 둥실둥실 떠다니기도 하는 노란 불꽃에 집중하니 최영도.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 돼.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에 노란 불꽃이 몽글몽글 모여 어떠한 실루엣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다부지긴 하지만 저보다 작은 키와 덩치,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바쁘게 교정을 걸어가는 이효신, 밥 먹자며 헤실 웃어 보이는 저에게 인상을 찌푸리는 이효신. 옷 똑바로 입으랬지 하며 제 복부에 주먹을 내지르던 그 – 아, 이건 좀 사랑스럽다. -. 제기랄, 실패다. 눈을 감으니 더욱 떠오르는 그의 모습이 싫어 입술을 잘근거리던 영도가 눈을 뜨자 밝은 빛이 차들었다. 



“하아.”

“한숨은. 어린놈이.”

“....?!”



덜컹, 환청인줄 알았더니 정말 이 사람이 저를 부른 거였나? 어느새 맞은편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저를 바라보는 이는 분명 이제껏 계속 생각하고 있던 그가 맞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헉헉거리지. 의아함에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영도는 식판 옆에 놓여있는 물 컵을 효신에게 내밀었다. 마시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효신에 어쩐지 민망해져 입 안댔어요. 하자 그거 때문 아니야. 슬쩍 타박해온다. 어젯밤에 강하게 결심하고 하루 종일 피해 다닌 것이 효신의 얼굴을 보자 단숨에 흐물거리며 녹아버리는 저가 웃겨 영도가 슬쩍 웃었다. 그 웃음은 물 컵에 손을 뻗던 효신이 방향을 틀어 영도의 손목을 쥐어오지 않았다면 분명 꽤나 오래 유지될 거였다.  



“...?!”

“내가 네 손을 이렇게 잡으면.”

“무, 뭘, 이렇게 갑작스럽게 스킨십 하고, 그, 그래요?”

“-떨려?”  “.....떨리게.”



푸하, 제 말과 묘하게 이어지는 영도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웃겨 효신이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종국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식탁에 이마까지 대고 끅끅 거리는 효신에게 웃지 말라며 화를 내려던 영도는 그 와중에도 제 손목을 놓지 않고 더욱 강하게 틀어쥐어오는 효신의 손바닥과 손가락 감촉에 말을 잊고 그저 달뜬 눈으로 둘의 접합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 좀, 웃,죠? 불퉁하게 터진 영도에 한 번 더 키킥, 어깨를 떤 효신이 갑자기 식탁과 맞붙어있던 이마를 뗐다. 


“-선배, 오늘 이상하네요? 내 앞에서 웃질 않나.”

“너 앞에서 웃는 게 이상한거야?”

“맨날 찌푸린 얼굴만 했으면서.”

“그래? 그럼 앞으로는 자주 웃어줄게.”

“...그게.”



-무슨 의미에요? 철없이도 떨려버린 말끝에 민망함이 차오르긴 했지만 영도는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


영도의 손목을 가만히 쥐고만 있던 효신이 입 꼬리를 슬슬 올리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영도가 이어지는 효신의 움직임에 기함해 몸을 들썩였다. 평소 가느다랗고 예쁘다고 생각해온 손가락이 제 투박한 손가락에 얽힌다는 건, 상상 그 이상의 감촉과, 기쁨을 넘어선 충격이라 영도가 입을 꾹 다문 순간 효신이 어깨를 으쓱, 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의미.”



참으로 인간은 단순하기 그지없지. 맞닿은 온기를 놓칠 새라 마치 엄마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영도가 다급히 반대쪽 손까지 들어 효신의 손을 다잡았다. 그리고 힘주어 쥐어오는 영도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한걸 느끼고 효신이 다시 한 번 웃자 그제야 영도도 한숨 섞인 미소를 흘릴 수 있었다. 





*



꽤 오래전에 영도효신 합작 참가했던 건데 이제야 올리다니 흡 제 건망증...

존잘님들 연성은 http://dearydhs.dothome.co.kr/  이쪽에서 보실수 있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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