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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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둘 4

 


 

백서의 어린이집 가방을 소파 밑쪽에서 간신히 찾아낸 백기가 어제 밤에 집에서 보내는 말을 작성하느라 식탁에 널브러져 있던 알림장을 넣고 여벌옷을 지퍼 백에 꼼꼼히 집어넣는다. 어제 연락도 없이 집에 불쑥 찾아오신 어머니 덕에 집안이 온통 뒤집어진 터라 말만 그렇지 백서의 옷가지며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침까지도 정신이 없던 백기는 평소보다 더욱 부산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이 팅팅 부은 채로 포크로 찍은 바나나를 야무지게 씹던 백서가 아빠아. 말끝을 늘여 백기를 부른다. 원복을 챙기느라 바쁜 백기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강 대답하자 서운한지 볼을 퉁퉁 부풀린 뒤 어린이용 의자위에서 발을 쿵쿵 굴렸다.

 

아빠아!!”

“!! ! 어어, 백서 불렀어?”

여기, 여기이. 옆에 앉아요.”

? 아빠 지금 좀, 바쁜데..?”

백서 옆에에. ?”

 

난감함에 백서를 둘러보던 백기가 잔뜩 널브러진 소파 위를 바라본다. 오늘 쓸 회의 자료며 가방, 백서의 원복, 기껏 넣은 알림장이 삐죽 튀어나와있는 가방들이 정신없이 널러져있었다. 벽 한편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여유부릴 틈이 없었다. 서류를 대강 정리해서 제 서류가방에 넣고 백서의 옷이며 알림장을 어린이집 가방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원복을 챙겨 식탁으로 다가간 백기가 아이가 여전히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입을 내밀고 포크만 우물거리던 백서가 환하게 웃으며 백기에게 팔을 뻗어온다. 그에 웃으며 백서를 마주본 백기가 한 번 더 시계를 바라보곤 백서 쪽으로 의자를 끽 당겨 앉았다.

 


백서야, 다 먹었으면 옷 입고 어린이집 갈까?”

아빠. 그럼 아빠는?”

아빠는 회사가야지.”

백서 안가.”

? 어린이집? 가야지 백서야.”

백서 오늘 아빠랑 같이 있을 거야.”

오늘 따라 왜 그럴까……. 아빠 오늘 바쁜데 얼른 나가자 아들.”

백서 오늘 안가고 싶은데.”

일어나세요.”

 


백기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자 포크를 접시위에 얌전히 내려놓은 백서가 천천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통통한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가 다시 뱉었다가, 아랫입술을 이빨로 꾹꾹 씹던 아이가 기어이 속상함을 못 참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우는 와중에도 백기의 굳은 표정이 걸리는지 행여 소리라도 낼까 입을 꾹 다문 아이가 애틋해 백기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대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췄다. 마주 바라봐온 아이의 맑은 눈에 고스란히 담기는 제 굳은 얼굴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침부터 아이를 울리기나 하고. 장백기.

 


“...백서야.”

아빠,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아니야, 아빠도 미안. 아빠가 급해서 백서한테..., 미안해.”

 


그리고 아이의 포근한 몸을 끌어안은 백기가 조금은 뜨끈한 아이의 목에 턱을 살짝 비볐다. 목덜미에 팔을 감고 쪽쪽 백기의 볼에 뽀뽀를 날리는 백서의 귀여운 행동에 백기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한번 꼭 안고는 백서의 입술이며 콧잔등에 입술을 마구 내렸다. 그에 헤죽 웃는 아이에 조금 안심하며 백기가 백서와 눈을 다시 맞췄다.

 


백서 오늘 그럼 어린이집 가지 말고 할머니 집에 가있을래?”

할미 집? 아빠느은?”

아쉽게도 아빠는 오늘 회사에 꼭 가야해서. 대신 일찍 올까?”

! 일찍 오세요! 아빠 나 어린이집 갈게요. 데리러 오세요. 일찍

그럴래? 알겠어. 아빠 일찍 데리러갈게.”

 


그에 새끼손가락을 핀 손을 슬쩍 내밀며 웃 아이의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 며칠 전에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약속도장을 보고 궁금해 하기에 알려줬더니 잊지 않고 따라 해오는 게 마냥 귀엽고. 꼭꼭, 약속해. 복사에 도장까지 하고 마무리로 입술에 촉, 뽀뽀를 내리자 백서가 헤헤, 이를 보이게 웃고는 스스로 원복을 입는다. 물론 셔츠에 간신히 팔을 끼곤 슬금 백기에게 단추를 끼워 달라 다가오긴 했지만.

 


*

 


장백기씨, 회의자료 프린트 했습니까?”

, . 10부 복사해뒀습니다. 강대리님.”

그래요. 아 오늘 차과장님도 회의 들어가신다고 아까 연락 오셨습니다. 한부 더 복사해서 철 해두세요.”

!”

 


문서를 순서대로 모아 한부씩 철하고 있던 백기가 다급하게 문서 한부를 들고 탕비실로 뛰어갔다. 회의 시작까지 아직 삼십분은 남았지만 서류를 정리해서 회의실에 두고, 물도 임원들의 수마다 올려놔야하고 프로젝터도 잘 연결이 됐는지 확인하는 것 까지가 회의준비에 속해있는 거였기 때문에 백기는 자료문서를 한부 더 복사하며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에 순서를 매겼다. 자료가 다 복사 되면 들고 회의실로 가서 프로젝터 확인하고, PT 순서가 올바르게 되어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음향도 꼼꼼히 살펴야 할 터였다.


오늘은 철강 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한 프로젝트의 발표 날이었기에 백기는 물론이거나 와 철강팀 내부도 뾰족하게 날이 선 느낌이었다.


실수가 있으면 곤란하니까. 복사되어 나온 문서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백기가 부산스럽게 자리로 돌아왔다. 우웅. 마침 울리는 핸드폰에 찍혀있는 번호가 낯설다. 저장되어 있는 번호도 아니고 이 바쁜 시국에 모르는 번호를 받아 상대할 여유는 없다 생각하며 백기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뒤 사무실 책상 한편으로 밀어 두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또 연락 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백기가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달랑달랑 팔뚝에 걸쳐있는 두툼한 11부의 자료뭉치가 버거울 법도 하지만 다시 잘 추슬러가며.

 


*

 


웃음과 격려가 오가지만 서로 제 쪽의 이득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고자 잔뜩 날이 서있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회의는 끝났다. 다행히도 철강팀이 오랜 시간 준비한 보람은 있는 결과를 얻었기에 차과장도 강대리도, 홍대리도 그리고 분주하게 회의 내내 뛰어다니던 백기도 어깨에 힘을 빼고 간만에 밝게 웃을 수 있었다. 끝나도 팀의 막내에겐 완전한 끝이 아니기에 백기는 널브러진 서류들을 한곳에 모으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이리 큰 규모의 회의에 참가하는 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백기는 등허리가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했었다. 풀린 마음과 동시에 덮쳐오는 어깨며 등, 목 쪽의 찌부드함을 제법 여유 있게 견디며 백기가 막 회의실 의자를 정리하려 할 때 누군가의 온기가 어깨에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휙 돌리자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은은하게 입 꼬리를 올린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해준의 모습이 보였다.

 


, . 강대리님.”

수고 많았어요.”

“..., ! 감사합니다!”


 

잠시간 벙찐 정신을 급히 차리며 백기가 허리를 휙 숙였다. 꾸벅 꾸벅 몇 차례나 인사를 하는 동안 해준이 회의실을 나섰지만 백기는 숙인 허리를 필 수 없었다. 자꾸만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행여나 들킬까 잠시간 입술만 씹고 있다 허리를 마침내 곧게 폈을 때 백기는 입으로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뱉어낼 뻔 했다.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기에 망정이지 회의실에서 터져 나오는 괴상한 비명에 누군가 달려와도 이상치 않을 뻔 했다.

잘게 떨리고 있는 손가락을 빤히 바라본 백기가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었다. 꾹 쥔 주먹이 제법 야무지게 모양을 만들고 백기는 한손은 그대로 입을 틀어막은 채 주먹을 허공에 붕붕 몇 번을 내질렀다. 피로감이고 뻐근함이고 온데간데없이 머릿속에서 퐁퐁 자꾸만 기쁨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기분에 백기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겹도록 칭찬을 들어왔던 백기는 새삼 정식으로 철강 팀에 배속 받은 이후 받은 첫 칭찬임을 상기해냈다. 철없이 칭찬 한마디에 그것도 수고했다. 란 단어 하나에- 기뻐 붕붕거리는 꼴을 누군가 보면 백기의 이미지도 한순간에 무너질 터였지만 백기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자꾸만 해준이 설핏 지어준 미소에 묘한 곳이 떨려오는게 마음에 걸렸지만 단순한 기쁨 탓일 거다 여기며.

 


*

 


부우웅. 회의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조금 더 기쁨을 만끽하다 막 사무실에 들어온 백기가 제 책상이 떨리는 느낌에 그제야 잊고 있던 핸드폰을 떠올리고 손을 뻗었다. 손에 닿자마자 뚝 끊어진 전화에 잠금을 풀자 보이는 건. , 부재중 전화 12? 서둘러 확인하자 두 번 정도 어머니께 온 전화 말고는 전부 같은 전화번호였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봤던 전화임을 확인하고 번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핸드폰 번호가 아닌 지역번호가 찍혀있는 게 영 이상하긴 했지만 여러 번 부재중이 찍혀있는 것에 불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번호를 꾹 터치하자 곧바로 전화가 걸리고 수화기 너머로 여보세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부재중 전화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 혹시 백서 아버님 되시나요?”

? , . 그렇습니다.”

, 아버님 백서가 지금 좀 아파서 연락드렸어요. 계속 안 받으시더라고요.”

“...? , , 잠시만. 잠시만요.”

 


당황함이 그득 묻어나는 백기의 목소리를 듣곤 사무실 여기저기서 시선이 집중되자 백기가 대충 꾸벅 인사를 하고 전화기를 붙들고 다급히 탕비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말씀하세요. 백서가 아프다니요?



백서가 오전간식도 잘 안 먹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낮잠을 자고 일어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영 기운이 없더라구요.”

“..., 어디가.”

체온계로 재보니 지금 38도가 조금 넘어서요 아버님. 아이용 해열제를 먹이고 눕혀뒀는데 자꾸만 아빠를 찾네요...”

“...”

 


너무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해본 적이 얼마만일까. 백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리를 굴리다 이마에 손을 짚었다가 자꾸만 차가워지는 손끝을 꾹꾹 눌렀다. 아버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백서 선생님의 목소리에 파들 몸이 떨렸다.

 


아버님, 그래서 혹시 와서 일찍 아이를 데리고 가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할머님 할아버님도 지금 여행 중이시라고 하시더라고요.”

“..., . 맞습, 아니. ...., 알겠습니다. 금방 갈 테니 조금만 더 돌봐주세요.”

 


맞다. 오늘부터 여행 간다고 하셨지, 그제야 평소 연락도 않으시던 어머니의 부재중이 찍혀 있었다는 게 납득이 됐다. 끊어진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몇 번이나 꿀꺽 꿀꺽 마른 목을 삼켜대던 백기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신경질적으로 쑤셔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자리로 돌아가 책상 밑에 있던 서류가방을 들어 올리고 자켓을 챙기는 모습에 옆에서 서류를 훑어보던 해준이 의아한 눈을 들었다.

 


장백기씨, 지금 뭐하는 겁니까?”

“...”

장백기씨.”

 


해준의 낮아진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백기의 부산스런 움직임이 딱 멎었다. 이제 막 자켓에 한쪽 팔을 끼던 백기의 손이 스륵 내려가고 숙이고 있던 백기의 고개가 천천히 해준 쪽으로 돌아갔다.

어떤 시점이 생각나는 백기의 행동이었다. 신다인씨, 들었죠. 내일까지 하시면 되겠네요. 서류뭉치를 다인의 책상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백기의 부릅뜬 눈이 저에게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을 때.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지는 백기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해준은 드물게도 화가 치솟았었다.웬만한 일에는 그저 무심함으로 일갈했던 해준에게 반항했던 신입은 사실 백기가 처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백기는 얌전한 편이지. 제 책상위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에 밀어 흩뿌리곤 욕설을 뱉으며 그대로 사라졌던 지난번의 부사수를 떠올리며 조금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솟는 화에 해준은 스스로도 놀랐었다. ? 그냥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화를 내곤 멋대로 나가버리는 부사수의 모습을 보다가 무시해버렸으면 될 터였다.장백기도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의지 약한 부사수의 모습에 혀만 가볍게 쯧, 차고 일로 복귀했으면 됐을 터였는데.

신다인씨, 그거 다시 장백기씨 책상에 놔두세요.

 정말 변덕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래 변덕 같은 참견. 그리고 해준은 그 참견을 지금 또 하려하고 있었다.

 


장백기씨, 어디 갑니까.”

“....대리님.”

 


장백기의 목소리에 그득 묻은 당황스러움이 아니었다면 해준은 금방이라도 백기를 다그칠 기세였다. 저를 바라봐오는 백기의 눈에 덕지덕지 묻어나오는 혼란이 아니었다면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습니까. 라며 타박을 할 생각이었다.

 


“...장백기씨, 무슨 일 있습니까?”

 


제 물음에 고개를 슬쩍 젓다가 양 손바닥에 고개를 파묻는 백기의 어깨가 떨리지만 않으면 그리 할 작정이었다. 분명.



-

 

 

 [해준백기] 점멸



, 강대리님...”

 

침묵, 침묵이 이리도 무서운 거였다니. 아니 이건 침묵과는 묘하게 거리가 있었다. 방금까지 저의 눈에 검은 천을 감싸 묶고, 손을 넥타이로 강하게 동여 묶으며 귓가에 쪽, 젖은 입술을 내리던 해준의 소리가 멈춘 건 금방이었다. 정말 사라졌다 라고밖에 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침묵. 푹신한 침대 위에 어정쩡하게 눕혀져 있던 백기가 슬쩍 몸을 일으켰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날아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든지, 하다못해 쯧 혀를 찰 법도 한데 정말로 딱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 백기의 뒷골이 서늘하게 솟았다.

 


조금이라도, 조금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소리를 듣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지만 백기 저의 몸이 시트에 비벼져 나는 소리라던가 삐걱 이는 침대의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찾아들지 않았다.

차츰 죄여오는 침묵의 무게에 백기가 탁한 숨을 뱉었다. , 하아.

 

, 강대리. . 거기, 계시죠?”

 

, 강 대리님, . 해준씨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 백기가 몸을 웅크렸다. 자유롭지 않은 손 탓에 치솟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지만 백기의 시야를 가린 검은 천이 축축하게 젖어들며 백기의 눈물을 담뿍 머금고 있었다. 두려움에 턱이 달달 떨리는 걸 이를 꽉 묾으로서 다잡은 백기가 이마를 웅크리느라 닿아오는 무릎에 푹 파묻었다.묶인 손을 들어 눈에 가려진 천을 내리려 했지만 극심한 공포감 때문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은 백기를 돕기엔 무리였나 보다.


자꾸만 꽉 쥐게 되는 주먹에 끙 힘을 주어 손가락 두어 개를 펴는데 성공한 백기가 떨리는 손을 얼굴로 올려 검은 천에 막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걸었을 때였다.

, 장백기 씨, 누가 풀어도 된다고 했죠?

날카로운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해준의 목소리에 백기의 떨림이 딱 멈췄다. 천을 어정쩡하게 잡고 있는 손가락을 내릴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백기의 볼에 따끈한 온기가 닿아오고, 갑작스레 들어찬 빛에 눈을 질끈 감자 눈두덩에 촉촉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눈이, 그새 부었네요.”

“...대리님.”

 


원망의 말을 쏟을 틈도 없이 백기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예상했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해준이 얄미워 백기가 이마로 해준의 어깨부근을 쿵쿵 찍었지만 제 뒤통수를 슬슬 쓸어오는 해준의 너른 손바닥이 좋아 괜히 애먼 코만 훌쩍였다.

 

“..., 풀어주세요…….”

이리 줘봐요.”

 


세게 묶긴 했지만 그다지 발버둥 치지 않아서인지 자국이 남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꼼꼼히 살피며 넥타이만 매만지던 해준이 손을 잡아 백기를 그대로 뒤로 밀쳐낸다. 의아함과 놀람에 눈을 동그랗게 뜬 백기가 무어라 항의하려 퉁퉁 부은 입술을 벌린 틈을 타 해준의 숨이 훅 다가왔다. 말캉한 혀가 곧바로 백기의 치열을 훑어오자 놀라 히끅, 딸꾹질을 터뜨린 백기를 달래듯 잔뜩 씹은 탓에 부은 아랫입술을 혀로 느리게 핥아왔다. 묶인 손이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은 해준의 셔츠자락을 꾹 잡는 백기에 맞붙은 입술에서 웃음이 터진다.


투정부리듯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백기를 달래듯 다시 혀를 찔러 넣은 해준이 말캉한 백기의 혀를 휘감았다, 물기어린 소리에 백기가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보기 좋게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입맛을 다시던 해준이 말캉한 혀로 턱에서 목까지 쭈욱 훑어 내려가다 어깨 부근에서 이를 박아 넣었다. 까득 하는 살이 씹히는 소리와 함께 크게 들썩인 백기의 몸을 능숙하게 잡아 누르며 해준이 손을 뻗어 무언가를 쥐어온다. 백기의 눈동자가 덩달아 데루룩 굴러가고 해준의 손가락에 들린 것에 눈이 파르르 떨린다.

 


아까, 무서웠습니까?”

“..., 대리님..”

무섭기만 한건 아니죠?”

, 싫어요. 싫습니...”

, 가만히.”

 


어떠한 제재도 없이 단순한 속삭임뿐이었을 터인데 백기는 우뚝, 바르작거리는 미약한 반항의 움직임을 멈췄다. 흐으, 떨리는 잇새로 여린 숨이 터져 나오지만 해준은 가만히 검은 천을 천천히 백기의 눈 위에 올린다. 축축하게 젖어있던 물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검은 천이 서늘하게 닿아오자 백기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머리칼 사이로 꾹 매듭이 지어지고 시야가 완전히 점멸하자 해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예뻐, 장백기.”


 

다정한 듯 잔혹한 속삭임 끝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백기의 몸을 훑어 내렸다. 백기는 어차피 소용 없단 걸 알면서도 그저 무의미하게 천 아래 깔린 눈꺼풀을 천천히 내려닫는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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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해준과 ???

 

강해준은 소위 말하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을 거쳐 학창시절, 더해 군제대후 곧바로 한 취업으로 상사맨 타이틀을 땄을 때조차 해준의 삶에는 막힘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큰 좌절도 맛본 적 없었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수나 실패 따위도 없었다. 몇몇은 강해준 그 새끼가 운이 억세게 좋은 거지. 라며 시기어린 숙덕거림을 보내긴 했지만, 해준은 운조차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드는 사내라는 건 그들도 결국은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해준은 가히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딱 맞을 만한 모습을 하곤 했으니까.

방에 틀어박혀 며칠간 필요할 때 빼고는 나오지 않더니 결국 떡하니 원하는 성적을 냈고, 원하는 대학을 갔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고. 남들은 들어가기조차 힘들다는 원인터에서 가장 빠른 대리승진까지.
잘 닦아놓은 길을 편안히 걸어가기만 한 게 아닌, 잘 닦아져 있는 길을 저가 더욱 단단하게 견고하게 나무를 덧대고 철심을 박아 튼튼히 만들며 그, 강해준은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결점 -동기들은 그리 표현하곤 했다- 이 있다면 바로 젊은 나이에 생긴 이혼남 타이틀일 터였다. 물론 해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어느 날 해준이 담담하게 저의 이혼소식을 전했을 때 동식은 마시던 술을 뱉었고, 성준은 거짓말 하지 말라며 들고 있던 오이스틱을 해준의 입에 쑤시듯 집어넣었다. 준식은 오늘도 술값을 내지 않으려 슬쩍 걸치던 코트가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한 채로 그저 벙한 표정으로 해준의 얼굴만 살필 뿐이었다. 당사자 빼고는 전혀 괜찮지 않은 분위기의 술자리였지만 해준은 동기들의 반응을 눈치 챘음에도 묵묵히 홀로 술병을 기울여 맑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을 뿐이었다.

어, 야. 자작은 마, 맞은편 사람이 재수 없거든! 하며 술병을 빼앗아간 맞은편 자리의 성준이 해준을 향해 병 입구를 기울이려다 씨발. 욕지기를 중얼거리더니 안 그래도 이리저리 뻗쳐있는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마구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술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 입구를 입술로 머금고는 그대로 꿀꺽 꿀꺽. 야, 야! 말리려는 동식의 목소리에도 점점 더 위로 솟아오르는 술병과 뒤로 젖혀지는 고개가 사뭇 씩씩했다. 결국은 반 가까이 남아있던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성준이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있는 그대로 해준을 향해 보이며 씩씩, 거친 목소리를 낸다.

 

“야, 강해준. 이 새끼야.”
“뭐, 왜.”
“뭐? 이혼? 이혼이라고 했냐. 지금?”
“응.”
“야아, 하대리야. 그만해. 지금 싸움거..”
“그래 싸움 건다. 씨발, 야, 너네도 들었지 이혼이란다.”
“…….”
“야, 강해준. 우린 너 결혼한 것도 처음 듣거든?”

 

그와 동시에 동식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성준의 욕설 섞인 말에 미간만 조금 찌푸리던 해준이 그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고, 해준의 그 얼굴이 성준의 화를 더 부추긴 건 명확한 사실인 듯싶었다. 두툼하게 살집 있는 손바닥으로 술집 상을 쾅, 내려쳤으니까.
옆에서 준식이 성준 덕에 튄 술이 비싼 셔츠에 튀었다며 성질을 부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임을 알아채곤 결국은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뽑아 자국을 스스로 벅벅 닦아냈다.

 

“아, 그랬나?”
“아, 그랬나아? 이 새끼가 진짜 답 없네! 결혼사실 말한 것 보다 이혼소식 말한 게 먼저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야야, 하대리야 진정해. 강대리 과묵한 거 뭐 하루 이틀이냐?”
“야, 김동식. 지금 이게 과묵한 거냐?”

 

어떻게든 성준의 화를 가라앉히고 해준을 두둔하려는 동식과, 그런 동식의 노력 따위 관심 없다는 듯 해준의 무심함에 치를 떠는 성준, 그리고 조금 놀란 표정은 여전했지만 별다른 반응이나 변명 없이 그저 멀뚱히 성준만 바라보는 해준. 참으로 정신없는 풍경이었음에도, 아까 잠시 동요했을 뿐 어느새 코트를 완벽히 차려입고 스마트폰을 심드렁하게 매만지고 있던 준식이 자꾸만 들썩이는 술상에 신경질을 부리며 야채바구니에서 배춧잎 두어 장을 성준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탈탈 털리지 않은 배춧잎이 머금은 물기 덕에 배는 기분 나빠진 성준이 준식을 죽일 기세로 노려봄에도 준식은 빙글 그저 얄미운 미소만 입에 걸 뿐이었다.

 

“그래서, 왜 이혼한 건데?”
“...음, 이혼하자던데?”
“허, 그게 다야?”
“응.”

 

성준의 패악질 따윈 익숙하다는 듯 가볍게 넘긴 준식은 곧바로 해준을 바라보며 덤덤히 질문을 던졌다. 그에 조금은 멍하게 뱉은 해준의 대답이 답답한지 성준은 아프도록 제 가슴을 퍽퍽 쳐댔고, 동식은 그런 성준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안 물어봤어?

 

“새 애인이 생겼대.”
“....뭐?”

 

기어이 못 참고 몸을 불쑥 일으킨 성준이 뭐라 욕설을 뱉기보다 동식의 반응이 이번엔 빨랐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해준의 어깨를 부여잡고 해준아, 그걸 가만히 뒀어? 라며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채 성질을 내는 동식의 반응에 슬쩍 웃은 해준이 동식의 허리를 대충 두드려주며 말라오는 목을 다시금 축였다. 저에게만 집중된 눈 세 쌍이 부담스러워 눈을 슬쩍 내리 깔은 해준이 손을 휘저어 여직 서있던 성준을 앉혔다.

 

“뭐, 이미 서로한테 관심 없던지 오래야. 뭐 별거라고.”
“야, 그래도 너 이혼남 타이틀이 꽤나 크다?”
“애인 생겼다는 걸 가만둬? 아주 콩밥을!”
“아 하성준 오버는 진짜. 떠난다는데 붙잡겠냐? 강해준이?”

 

준식의 타박에 슬쩍 주먹을 쥐었다 편 성준이 계속 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해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무덤덤한 모습.

 

“아무튼 그래서 오늘 도장 찍고 끝.”
“참 쉽게 말한다. 진짜.”
“아이 문제 때문에 좀 끌었던 거지 마무리는 쉽던데.”
“.....아이?”

 

벌써 두 번째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 건 동식마저 충격인지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술을 꾹 깨물다가 통통한 뒷목을 손가락으로 주물거리다가를 반복했다. 간신히 뱉은 목소리는 불쌍하게도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적할 성준과 준식 조차 할 말을 잃은 상태여서 동식의 떨리는 목소리는 꾸역꾸역 목을 타고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자, 자세히 좀 말해볼래 해준아?...

 

*

 

동기들끼리 술만 마시면 간간히 나오는 해준의 이혼이야기는 그들에겐 아직도 나름 핫 이슈였다. 이성에게 관심도 없어 보이는 철벽남 강해준에게 사실은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썰렁한 부부사이에서 난 아이가 어느새 5살이 되었다.
술자리마다 술안주처럼 잘근잘근 씹히듯 반복되는 저의 이야기가 영 불만인지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술만 마시곤 했던 해준 이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불쑥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만큼은 술잔을 내려놓곤 스마트폰을 켜 사진첩에 아예 따로 폴더로 만들어져있는 빼곡한 아이의 사진을 슬쩍 내밀어 보여주곤 했었다.
여전한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묘하게 밝은 얼굴로 자꾸만 입 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해준의 표정변화가 웃기고 신기해서 자꾸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란 것을 해준이 눈치챌 날은 언제일지.

 

“이름이 뭐랬더라? 강..다,”
“강다연.”
“다연이가 올해 5살인거야?”
“응, 예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양쪽으로 묶은 게 제일 귀여운 거 같지 않아?”
“....어, 뭐. 예쁘네.”
“노리지마.”

 

동조하듯 맞장구 친 것뿐인 성준의 말에도 지긋이 노려보며 견제하듯 말하는 해준이 웃겨 다들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행여나 대놓고 웃었다가 강해준이 다시 철벽남으로 돌아가 겨우 풀렸던 차디찬 표정까지 숨길까봐. 이런 모습을 보면 또 나이가 두 살 어린 게 맞는 것 같다가도 액정을 소매로 깨끗이 눌러 닦으며 아이의 사진을 향해 덤덤히 웃어 보이는 모습은 또 애 아빠답게 든든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엔 언제 만난다고?”
“음, 저번 주에 만났으니까 3주 뒤쯤.”
“꼭 한 달에 한 번씩만 만나야해?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잖아.”
“애초에 약속한건 한 달에 한 번씩이야.”

 

그렇게 사진을 애틋하게 바라 볼 거면 아예 만나는 날을 늘리면 될 텐데 또 그건 제 신념에 반하는 일인지 고집을 피워대는 꼴이 영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혼할 당시에도 아내와 헤어진다는 것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해준은 유독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약한 모습을 보였다. 다연의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며 꿀꺽 꿀꺽 술을 삼켜대던 해준이 결국 몸을 무너뜨리고 뱉어내는 숨에 약간의 울음기가 묻어났던 건, 서로 암묵적으로 묻어둔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

 

속이 쓰릴 정도로 먹은 적은 별로 없었는데, 어제는 저도 모르게 동기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 같아 해준은 숙취로 쑤셔오는 속보다는 창피함에 머리를 짚었다. 은근히 저를 동생 대하듯 하는 동기들은 의식적으로 어제 이야기를 피했지만 안타깝게도 해준은 지금껏 아무리 머리꼭지까지 술에 저는 한이 있어도 필름이 끊긴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어제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을 대변해주듯 눈가도 화끈하게 달아올라 욱신거리는 것도 한몫했고.

 

저가 유독 아이에게만은 물렁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는 건 해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사진만 봐도 슬슬 풀리는 얼굴 근육을 붙잡을 틈도 없었고, 일주일에 두어 번쯤 하는 짧은 저녁통화에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연이의 맑은 목소리와 ‘아빠’라는 두 글자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어서 해준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시나 술은 사람의 약한 모습을 너무도 쉽게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물질이었다. 어젠 왜 그리도 다연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던지.

 

후, 깊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털썩 앉자 옆에서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한번 울렸다.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시야 끝에 닿아오는 건 제 부사수. 제 밑에 들어온 지 어느새 한 달 가까이가 되었지만 백기와 해준의 관계는 마치 어제 처음 만난 사람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둘 사이의 대화는 사무적인 것 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무리 철강 팀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부서라 해도 여직 한 번도 해준은 저의 부사수와 따로 식사자리든 술자리든 가진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라고하면 변명이겠지. 솔직히 해준은 제 부사수와 둘만 시간을 가지며 사수-부사수간의 돈독한 정을 쌓을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부서에 배치 받고 인사말을 끝내자마자 이 발칙한 부사수는 곧바로 사업아이템 보고서를 해준의 앞에 들이밀었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표지와 문서양식, 색색 깔로 구분된 표와 차트. 야, 우리인턴 대학교 때 별명이 PT마스터였다더라. 자랑하듯 몇 달 전에 해준의 파티션에 기대서 주절거리던 성준의 말이 다시금 해준의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다.
구성력, 기승전결하며 문장의 첨삭하며.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는. 아니 오히려 별명이 허투루 만들어 진 건 아닌지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된 보고서였다. 그것을 해준은 굳이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중요한건 기본 문제지만.
불쾌해지는 마음을 정리할 틈도 없이 해준은 몇 번 펄럭거려본 서류뭉치를 백기에게 도로 내밀었었다.
대리님? 의아한 듯 동그란 눈이 안경알 밑에서 반짝였지만 해준은 그런 백기의 모습조차 고깝기 그지없었다. 

 

“가져가세요. 읽을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어, 어디가 이상합니까? 철강 팀 사업보고서를 보면서 제 다름대로 아이템을 구축,”
“지금 이건 어디가 이상하고 안 이상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장백기씨. 장백기씨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제가 이야기해줄 것은 없는 것 같네요.”

 

어린아이도 아니고, 26살이라는 청년이 짓기엔 너무도 어린 티가 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겠는지 얼굴이 서서히 붉어져가는 백기의 얼굴을 보면서도 해준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감흥이랄 것도 없이 어쩜 이리도 철이 없을까. 한탄만 했을 뿐.

 

다른 부서에서 해준의 백기를 향한 태도를 소위 ‘배추 절이기’ 라 칭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놓고 성준이 다가와서 배추 좀 그만 절이라 타박하곤 했으니까. 뭐 그것이 해준이 의도했든 안했든 백기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한몫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백기씨, 코트라 자료 프린트 했습니까?”
“아, 네. 여기 있습니다. 대리님.”

 

사소한 복사나 단순한 문서처리를 시키면 눈을 세모꼴로 뜨고 반항기어린 반응을 보였던 제 어린 부사수는 이제 꽤나 차분하고 담담하게 저의 현실을 받아드리는 듯싶었다. 차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자료를 내미는 백기를 보며 해준은 의도치 않은 저의 무시가 이뤄지는 동안 백기가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아직 기본기가 다져졌다고 말하기엔 –해준의 기준으로는- 퍽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백기는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

 

지잉.

 

해외 바이어와의 기나긴 설전 끝에 꽤나 만족스러운 확답을 받아낸 해준은 그제야 긴장감에 잔뜩 세웠던 허리에 힘을 풀었다. 귓가에서 뜨끈해진 블루투스를 빼 서류철 위로 대충 던져놓은 해준이 뻣뻣해진 뒷목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주무르던 중에 핸드폰이 한번 울렸다.
간결하게 울린 진동에 깜빡이는 액정을 가볍게 문지른 해준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시간을 보니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하원해 집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이제 막 글자를 배운다던 다연이 제 엄마의 핸드폰으로 띄엄띄엄 보냈을 몇 자의 글자가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몇 번이고 액정을 달뜬 눈으로 바라보던 해준이 문자를 보관함으로 옮겼다. 몇 번이나 화면도 캡처했다. 그것도 모자란 지 눈을 떼지 않고 하염없이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해준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기의 시선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해준은 마냥 딸아이의 문자에 푹 빠져있었다.

 

[아ㅃㅏ 사랑헤ㅛ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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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준도 5살짜리 딸아이를 가진 아빠였습니다!(반전도 아님)

 

 

 


2. 강해준과 장백기

 


가기 싫어.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잠도 이미 한참 전에 깨 졸리지도 않으면서 이불에서 괜히 꾸물거리던 백기는 허리에 올라타서 박수와 함께 저를 재촉하는 백서의 똘똘하지만 조금은 과격한 모닝콜 덕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몸은 일어났어도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서 밍기적 거리는 백기의 몸을 단번에 침대에서 꺼낸 건 백서의 웃는 얼굴과 아빠랑 같이 씻고 싶은데. 하는 귀여운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그 말에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같이 벌떡 일어난 백기가 백서를 품에 안고 몇 번이나 그 뽀얀 분내와 사랑스러운 아이의 체온을 즐기다 함께 욕실로 향했다. 신이 난 듯 백기의 손을 잡고 꿈속에서 용을 봤다느니, 그 용이 등에 태워줘서 하늘을 날았다느니 하는 웅장한 꿈속 이야기를 설명하던 백서는 욕실로 발을 딛기 전에 등을 구부리곤 슬리퍼를 백기의 앞에 가지런히 짝을 맞춰 놓고는 저는 맨발로 화장실 타일을 밟았다. 그 자연스러운 제 아들의 배려에 백기는 괜히 찡해오는 눈가를 누르며 맨발로 다급히 들어가 백서를 뒤에서 끌어안고 정수리에 뽀뽀를 퍼부었다. 이뻐, 장백서. 쪽, 누굴 닮아서어. 쪽쪽

 

“아빠, 슬리퍼 안 신으면 발 차가워요!”
“아빤 괜찮으니까 백서가 신어. 그리고 우리 이따가 백서 꺼도 사러가자.”
“아빠랑 똑같은 걸로?”
“응, 똑같은 걸로.”

 

그에 좋다며 볼을 발그레 붉힌 백서가 히죽 웃어왔다. 백서와 같이 산지 고작 이틀밖에 안됐는데 벌써부터 이리 행복하면 어쩌자는 건지. 아까 일어나기 싫어 잔뜩 뾰족했던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느끼며 백기가 아이에게 뽀로로 칫솔을 내밀었다. 그리고 폴리 치약도 그 위에 쭈욱 동그랗게.  아빠, 나 혼자 닦아요. 보세요! 자랑하듯 조금은 서툴지만 열심히 칫솔질을 하는 제 아들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세상일이 그리 쉬워, 백기씨?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없다구우.
 커피를 내밀며 쯧쯧,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온 석율이 백기가 컵을 받아들자 곧바로 어깨에 손을 둘러온다. 평소였으면 재빨리 밀쳐냈을 것도 힘도 의욕도 아무것도 생기지 않아 그저 커피로 입만 축인 백기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온다. 맞은편에서 서류 파쇄를 하다 말고 몸을 돌려 안쓰럽게 저를 쳐다보는 영이의 시선도 느껴졌지만 백기는 그저 묵묵히 땅만 바라봤다.

 

“백기씨 절여지는 소리가 글쎄 16층까지 울리는 거 있지?”
“아니, 그걸 절여진다고...!”
“절여지는 거지. 응? 유명하잖아 백기씨. 원인터 철강 팀의 김장마스터 강대리는 오늘도 열심히 입사 한달차 장백기를 굵은 소금으로 푹 절이고 있습니다.”
“...말을 맙시다.”

 

마치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라도 하듯 진지하게 말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손가락 끝을 펴 백기의 가슴을 콕 찔러오는 얄미운 행동에 기어이 백기가 석율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그 탓에 종이컵에서 출렁인 커피가 셔츠 소매며 구두에 조금 튀자 백기는 안 그래도 우울했던 기분이 더더욱 깊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걸 느꼈다. 후우우.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오듯 뱉은 어두운 한숨에 그제야 석율도 장난을 멈추고 백기의 어깨를 도닥였다.

 

“힘들지? 이럴 때는 동기밖에 없지말입니다! 우리 오늘 밤에 한잔 쭉 할까? 동기들끼리?”
“저 오늘 일찍 가봐야 합니다.”
“뭐? 왜! 야근 때문도 아니고~! 백기씨 위로해주려는 우리의 성의를 무시하려고 하는 거야?”
“무시가 아니라 집에...., 하여튼 앞으로 술자리 잘 못 갑니다.”
“왜? 집에 뭐라도 숨겨뒀어? 응? ”
“아닙니다.”

 

아쉽다는 듯 영이마저 제안했지만 백기는 일찍 어린이집에 가 백서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했기에 한 번 더 공손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옆에서 자꾸만 찡찡거리는 석율에게 성의 없이 휘적거려 타준 믹스커피를 내밀어 입을 막아버렸다. 백기는 꿍얼거리면서도 커피를 홀짝이는 석율을 보다 이곳에 그래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의 차분한 표정에는 뭔가 거절하기 애매한 무언가가 있고, 백기가 그걸 쳐낼 수 있을지가 정말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탕비실에 걸린 시계를 보자 점심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기에 그를 핑계 대며 백기는 서둘러 탕비실을 나왔다. 복도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보이는 유리문에 숨이 턱하니 막혀오는 착각이 들었다. 고작, 투명한 유리문일 뿐이었는데 저 곳을 넘어가면 또 다시. 백기는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다 슬쩍 구두코를 내밀었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 예민하게 반응해 열리는 유리문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역시나 먼저 와서 앉아있는 강대리의 굳건한 옆모습에 백기는 답답해져오는 넥타이를 한번 정리하곤 제 자리로 가 조용히 앉았다. 분명 끽, 하면서 의자가 가볍게 밀리는 소리가 났음에도 저를 쳐다볼 생각조차 않고 일에만 집중한 강대리를 힐끗 티나지 않게 조심하며 바라본 백기가 또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팔꿈치를 기댄 제 책상을 바라보자 밝은 빛을 내며 켜져 있는 노트북 외에는 무척이나 깨끗했다.

집에서 챙겨온 머그잔, 볼펜꽂이, 몇 권의 책은 이미 아침부터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며 위치를 옮기길 반복했다. 파티션에 메모패드도 벌써 두어 번은 뗐다 붙였다 했고. 백기는 서랍을 열어 물티슈를 한 장 빼 노트북 모니터를 슥 닦았다. 역시나 묻어나는 게 없이 깨끗했다. 그럴 수밖에. 이 행동도 벌써 네 번째니까. 먼지가 쌓일 틈조차 주지 않고 물티슈로 꼼꼼히 이곳저곳을 닦아대는 행동에 차과장 조차 출장을 나가는 길에 백기의 등에 대고 “장백기씨, 혹시 정리 벽이야?” 라고 할 정도였으니.

허나 안타깝게도 백기는 오히려 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축에 속했다. 청소를 자진해서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거니와 늘 어머니께 등짝을 맞아가며 억지로 청소를 하게 된다 해도 차라리 처음상태가 나을 정도로 이게 정리인지 어지럽히는 건지 모를, 그런 청소엔 적합하지 않은 마이너스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실력을 가진 백기가 자진해서 자꾸만 제 책상을 닦고 쓸고, 물건들의 배치를 재정비 하는 건 전적으로 저의 사수 탓이라 백기는 생각했다.

‘일은 지 혼자 다하지.’


불만을 형상화 한 듯 잔뜩 부푼 입술을 다시 입 안으로 말아 넣어 꼭꼭 앞니로 몇 번 씹던 백기가 한 번 더 볼펜꽂이에 든 볼펜들을 전부 꺼내더니 차곡차곡 색깔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좌르륵, 하는 거슬리는 소리까지 내가며 사무실에서 딴 짓을 하는 백기를 분명 알고 있음에도 해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키보드만 무심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차라리 일을 몰아서 주거나, 아니면 자원팀의 하대리님 처럼 버럭버럭 성질이나 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자 백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배추 절이기가 아닙니다. 한석율씨. 이건, 그냥. 투명인간 취급이라고요.

*

 

흔한 사수의 부사수를 가르치려는 의욕도 없다. 무언가를 알려주고, 저에게 다시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사수의 태도 또한 없다. 해준은 그저 백기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석율이나 제 동기들은 배추 절이기라 명명한 해준의 백기 교육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고 백기는 생각했다- 교육이란 건 어쨌든 1:1이든 1:다수든 무언가의 접촉이나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차라리 배추 절이기가 낫지. 절이려면 어쨌든 그 절이는 물체에 관심을 줘야하잖아? 잘 절여지고 있나. 촉촉한 소금물에 배추가 흐물흐물 거리고 있나. 간이 짭짤하게 배었나. 까지 생각하던 백기는 제 꼴이 이미 절여져 흐물거리는 배추나 별다를 게 없구나 하는 결론까지 떠올리곤 씁쓸하게 웃었다. 맞네, 배추 절이기. 누군가의 관심 없이 혼자 절여지고 있는 불쌍한 배추.

 

강해준은 처음부터 장백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첫날부터 지금껏 백기에게 제대로 된 일을 주지 않을 리가 없지. 철강 팀이 한가하게 일이 없는 팀도 아니고, 홍대리나 강대리 책상 위에 가득 쌓여있는 색색깔의 서류철만 해도 상당하고, 심지어 사무직인 다인씨마저도 계약서 작성이며 대리들을 서포트하느라 상당히 분주하게 돌아다니는데 그 바쁜 사무실에서 백기는 홀로 멀뚱히 앉아있기 일쑤였다. 지금처럼. 늘.

 

“장백기씨.”
“...네?!”

 

오늘은 아침에 인사할 때 빼고는 처음 들어본 듯한 해준의 목소리에 백기의 어깨가 펄쩍 튀었다. 너무 놀라 다급하게 대답하느라 삐끗한 목소리가 민망해 뒤늦게 뒷목을 주물 거리던 백기가 슬쩍 고개를 돌려 해준을 바라봤다. 그러자 곧바로 마주쳐오는 곧은 시선에 어쩐지 지금껏 하고 있던 생각이 행여나 들킬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자 해준은 그런 백기의 행동에도 별다른 말없이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제 코트라 건 때문에 자재창고에 샘플들이 구분 없이 되어있을 겁니다. 가서 종류별로 잘 분류하세요.”
“아,..샘플 정리 말씀이십니까?”
“네, 아, 정리하면서 재고도 확인하구요.”
“...네. 강대리님.”

 

비척비척 일어난 백기가 뒤로 밀린 의자를 다시 깊숙이 밀어 넣고는 자재창고로 향했다. 묘하게 쳐져있는 어깨며 가라앉은 뒤통수가 마음에 걸릴 만도 하건만 해준은 무심하게 쳐다보다 금방 눈길을 돌렸다.

 

*

 

콜록, 옷가지며 머리카락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털었다고 생각 했는데도 여전히 남아있는지 이제 막 어린이집 현관에 들어서려던 백기가 작게 기침을 했다. 코끝도 찡하고 목구멍 속도 간지러운 게 얼른 집으로 가서 몸을 씻어내고, 옷도 털어서 바깥에 널어놔야겠다. 등을 생각하던 백기가 갑자기 다리에 와 닿는 무게에 깜짝 놀라 쳐다보자 백서가 어느새 어린이집 가방까지 매고 백기의 다리에 매달려있었다.

 

“아빠아. 왔어요?”
“어, 응. 백서 오늘 잘 놀았, 콜록. 어?”
“아빠, 감기 걸렸어요?”
“응, 아니? 먼지 때문에.”
“먼지. 나 먼지 아는 데에. 그거 지저분한 거라고 했는데.”
“응, 맞아 지저분한 거. 아까 아빠 청소했거든. 얼른 백서랑 집에 가서 목욕하면 깨끗해질 거예요. 걱정 마.”
“백서랑 같이 목욕해요?”
“응.”

 

그에 아빠를 걱정하느라 조금 찡그렸던 얼굴을 펴고 이가 보일정도로 환하게 웃던 백서가 백기의 손을 잡고 다급히 어린이집 문 밖으로 끌었다.
어, 어어. 백서.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백서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짐짓 엄한 소리를 내자 후다닥 백기의 앞에 선 아이가 배꼽위에 양 손을 올리곤 공손하게 허리를 접어 제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인사를 한 백서가 다시 백기의 손을 야무지게 잡고 이끌자 백기가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백서를 따랐다. 목이고 어깨위고 무겁게 쌓여있던 먼지인지 깊은 우울인지 모를 것들이 폴폴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걸 느끼며 백기는 제일먼저 집에 가서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아, 가는길에 백서 슬리퍼도.

 

*

백기보단 백서가 더 철든것 같다..(

 

   

1. 장백기와 장백서

w. 박두부 

     

묵직한 상자를 간신히 들어 올리는 손이 힘없이 떨렸다. 울퉁불퉁한 미끄럼 방지 재질의 목장갑을 꼈음에도 상자의 무게 탓인지 몇 번이고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한 걸 무릎까지 동원해서 추켜올린 백기가 끙 하고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간신히 거실 한편에 놓인 책상 위로 상자를 올려놓은 백기가 계속 굽히느라 아려오는 허리를 툭툭 성의 없이 두드렸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 몸인데 아들 혼자 두고 어딜 가신거야. 툴툴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리는 백기의 투정을 듣는 이는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다 못해 싸늘할 정도인 집은 아직 가구가 완전히 들어오지 못해 곳곳에 비어있는 공간 덕인지 몰라도 더 휑해보였다. 괜스레 목장갑만 더 단단히 끌어올린 백기가 상자를 봉한 투명테이프를 잡아당겨 깔끔하게 뜯어냈다. 테이프를 돌돌 말아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백기가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겹겹이 쌓인 물건 가장 위에 올려진 사진. 웃고 있는 제 아이, 백서의 사진이 보이자 뿌듯하게 차오르는 마음을 감출길이 없었다.

 

어린이집 입소식 때 인지 품에 맞지 않아 헐렁거리는 큼지막한 남색 원복을 걸친 아이는 제가 입은 옷이 퍽이나 어색한지 입 꼬리만 살짝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이 알림장과 함께 줬다며 어머니가 백기의 손에 들려주었던 사진 몇 장을 급하게 이삿짐을 싸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상자 안에 흩뿌려 집어넣은 게 영 마음에 걸려 뒤늦게라도 사진을 갈무리 해 어디 구겨진 곳 없나 살핀 백기가 책상 밑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비닐봉투를 들어올렸다. 그리곤 어제 퇴근길에 구매한 액자를 꺼내 들었다. 다행히도 사진은 액자의 프레임에 사이즈가 딱 맞았다. 백서의 예쁜 모습을 액자틀에 넣은 백기가 컴퓨터 모니터만 달랑 놓인 책상 위에 액자를 줄맞춰 세웠다. 입소식 때의 백서, 간식시간에 나온 딸기를 두 손으로 욕심껏 들고 입 주변에 마구 묻혀가며 맛있게도 먹고 있는 백서, 어린이집에서 간 자연놀이 활동 때 만난 커다란 뱀을 쓰다듬으며 울음을 잔뜩 눌러 참고 있는 백서, 제가 잘 챙기지 못했음에도 마냥 밝게 큰 아이가 기특해 백기의 눈가가 슬슬 아릿해온다. 조금만 더 감성에 젖었다면 눈물이라도 흘렸을 만큼 찡하게 울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백기의 감성을 와장창 깨트린 건 거칠게 열린 쇠문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아이의 맑은 음성이었다.

 

“아빠아!”

“어, 백서야!”

 

곧장 저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 양 팔을 벌린 백기의 품으로 쏙, 들어온 아이가 뛰어오느라 헐떡이는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백기의 니트 자락을 부여잡고 얼굴을 파묻는다. 그리곤 얌전히 그 자세대로 그대로 멈춰라. 어, 짐 옮기느라 먼지가 가득 묻어 있을 텐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떼어낼까도 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만 묻고 가만히 있는 게, 백서가 요즈음 빠져있는 어떠한 놀이인가 싶어서 방해하지 말고 두자 싶은 백기가 아이의 등허리부근을 천천히 토닥여주자 갑자기 고개를 들어 백기와 눈을 맞추곤 히, 웃어 보인다. 뽀얀 분내가 금방이라도 폴폴 날릴 것만 같은 하얀 웃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백기가 무릎을 접어 백서와 시선의 높이를 맞춰주곤 눈을 접어 웃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웅, 집에 갔어!”

“어? 집에 가셨어? 언제?”

“지금!”

 

그리곤 할머니 할아버지가 밖에서 신기한 구름을 사줬다며 손을 빙글빙글 돌려 큰 원을 만들어내는 백서의 모습에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건 솜사탕이라는 거야.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빠를 따라 웃던 백서가 다시 한번 백기의 품에 들어가 꼭 안고는 갑작스레 몸을 떼 화장실로 타박타박 걸어간다. 화장실로 걸어가는 그 짧은 거리동안 흥얼거리는 노래의 가사를 대충 들어보자니 어린이집에서 부르는 활동 후에 손을 씻자는 내용 인거 같은데. 그걸 집에서도 충실하게 지키는구나 싶어 백기는 또 한 번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백서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배경음 삼아 열어둔 채로 방치 돼 있던 상자 속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필기도구, 컴퓨터 액정에 붙일 투명한 메모패드, 연필꽂이에 핸드크림, 머그컵.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늘 책상위에 상비 돼 있던 백기의 동반자와 같은 물건들을 꺼내서 죽 나열하던 백기가 책상 밑에서 네모난 모양의 서류가방을 꺼낸다. 취업 기념으로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던지듯 건넸던 가방에는 별다른 물건이 없어서 덜렁덜렁 흔들리며 참으로 가벼운 무게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열해뒀던 물건들을 서류가방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백기는 머릿속으로 제 사무실 책상을 떠올렸다. 파티션에 포스트잇을 붙일만한 코르크 칠판이 있으면 좋을 것 같고, 아직 데스크톱을 지원받지 못해서 노트북을 놓으므로 남들보다 책상의 공간이 훨씬 남는다는 걸 떠올리며 마치 퍼즐을 맞추듯 머릿속으로 물건의 위치를 하나씩 정해나간다. 머그컵은 노트북 왼편쯤에 놓고, 핸드크림은 자주 쓰니까 첫 번째 서랍에 넣고, 아 그러고 보니 서랍에 열쇠구멍이 영 말썽이던데 내일 가서 직원 분께 말씀드려야겠다. 따위를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던 백기의 시야가, 정확히 말하면 사무실을 떠올리던 백기의 상상 속 시야가 오른쪽으로 확 틀어지고, 눈에 들어차는 건 딱딱한 말투만큼이나 곧고 단단한 자세로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제 사수. 강해준 대리의 모습.

 분명 상상일터인데도 굳게 닫힌 입이 금방이라도 저를 부정하고 밀어낼 것만 같아서 백기는 입술을 앞니로 잘근 씹다가 머리를 휘휘 빠르게 흔들었다. 눈앞이 핑핑 돌며 어지럽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덕분에 해준의 모습이 사라진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손을 둥글게 말아 주먹을 가볍게 쥔 뒤 저릿해오는 미간과 관자놀이를 지압하듯 누르는 백기를 보고 막 화장실에서 나와 큼직한 실내용 털 슬리퍼를 신으려 낑낑거리던 백서가 발에 걸쳐져있던 슬리퍼도 멀리 던지듯 벗고는 후다닥 백기에게로 달려온다.

걱정스런 눈으로 제 다리에 매달려오는 백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한번 웃은 백기가 착잡한 눈으로 네모반듯한 서류가방을 쳐다봤다. 각이 져 있어 어디에 걸쳐있지 않아도 번듯하게 서있는 서류가방을 보니 떠오르는 해준에 울컥 화가 치밀어온 백기가 가방을 손가락으로 툭 밀어 넘어뜨렸다. 큰 사무용 의자의 등받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가방에 조금은 속이 시원해진 기분이 들었다가 얼굴을 붉힌다.

 

무슨 유치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장백기!

 

*

 

“아빠, 이게 뭐야?”

“이거? 짜장면이라고 해. 백서 처음 먹어봤나?”

“응, 색깔이 이상해.”

 

맛있으니까 먹어봐. 아빠가 덜어줄게. 역시 이삿날은 배달음식이지. 애써 합리화를 하며 시킨 동네에서 나름 입소문이 나있다는 중국집을 경비아저씨께 여쭈어 시킨 짜장면에 백서가 눈을 떼지 못한다. 면은 어린이집에서 간식으로 나오는 담백한 종류나, 가끔 어머니 집에 갔을 때 백서와 함께 먹었던 라면 정도밖에 없었던 백서로써는 우선 색깔도 독특하고, 윤기가 흐르는 짜장면이 참으로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골고루 비빈 뒤 작은 그릇에 덜어 포크와 함께 건네자 백서가 조금 망설여지는지 제 아빠를 한번 바라본다. 낯설어서 그런가 싶어 젓가락으로 면을 돌돌 만 백기가 입에 넣고 맛있게 씹어 삼켰다. 아빠를 보고 용기를 얻었는지 포크에 면을 빙글빙글 마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야무지게 입에 묻히지 않고 짜장을 입에 넣은 백서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맛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입에 들어있는 게 영 걸리는지 고개만 마구 끄덕이며 눈을 빛내는 백서가 귀여워 백기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통통한 볼을 양손바닥으로 잡고 이곳저곳에 뽀뽀를 퍼붓고 싶었지만 먹느라 정신없는 아이에게 할 짓은 아니겠지 싶어 간신히 참아냈다. 정신없이 포크에 면을 찍어 입에 밀어 넣는 백서를 보며 백기는 처음으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단 말을 온몸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

해백 육아물입니다. 연재는 처음이어서 두근거리네요 ㅠㅠ! 

장백기 26세/ 원인터네셔널 입사 한달차.

장백서 4세/ 백기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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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그래] 가끔은

단문2015. 2. 28. 19:37

[석율그래] 가끔은

 

 

더 얘기하면 나 화낼 거야. 장그래.”

 

순식간에 낮아진 목소리에는 간신히 눌러 담은 듯한 분노가 있었다.말이 나오는 대로 뱉어대던 그래가 조금 주춤했지만, 오히려 석율의 적반하장적인 문장을 듣고는 다시 꿈틀 미간을 좁혔다.

 

화요? 화는 지금 제가 내야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화가 나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는 거야.”

 

그만 하라는 듯 눈을 의식적으로 피한 석율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자 그래는 목덜미부터 뜨끈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먼저 잘못한 게 누군데. 지금 사과해야할 사람이 누군데 왜 저한테 뭐라고쏘아붙이는지. 그래는 치미는 분노를 견디기 힘들어 떨리는 손으로 아파오는 눈두덩을 꾹 눌렀다.

 

 

사귄지 1년여가 넘는 시간동안 두 사람이 다툰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벼운 웃음을 짓는 석율의 애교 섞인 치댐과 그를 적당히 밀어내는 그래. 남들이 보기엔 그저 조금 친한 직장동료.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가끔 보면 닭살이지만 대부분은 꽁트같은 커플. 딱 그 정도 선을 지키는 건 석율과 그래의 보이지 않는 룰 같은 거였다. 이정도 선을 지킵시다. 라고 딱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사귀다보니 서로 자연스럽게 두 사람만의 룰이 만들어진 경우였다.

 밝고 타인과 관계를 쌓는 게 익숙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상처도 많고, 그런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러한 모든 상황이 과부하에 걸릴 경우 한없이 우울해지기 일쑤인 한석율과, 석율을 밀어내고 귀찮다는 듯 털어대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석율 에게 다가가고, 관심을 가져달라 부르짖기도 하는 장그래. 두 사람은 적정한 온도차를 조절해가며 지금껏 잘 사귀어오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지킨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커플이었다.

 허나 여느 커플이나 그렇듯 다툼은 항상 사소한 데서 일어났다. 그저 단순한, 한쪽의 야근 때문에 약속이 깨진. 평소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그런 사소한 일. 석율이 우는 소리와 함께 약속을 파하는 사과 전화를 했고, 그래도 별다른 반응 없이 웃으며 넘길 수 있던. 허나 그래는 저번 주 주말에도 석율이 집에 내려가 봐야 한다며 갑작스레 깼던 약속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 당시는 아무생각도 없던 그 일이 오늘의 상황과 겹쳐지자 순식간에 서운함이 몰려와서 그래는 뚱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었다.

 

그럼 앞으로도 만나지 마시던가요. 자꾸 이렇게 약속 깰거면.”

 

그래가 뚱한 목소리로 뱉긴 했지만 평소였으면 아이 왜 그래~미안하다니까!’ 라며 애교 섞인 말투로 달래줬을 석율 또한 그래의 말에 날카로운 반응을 뱉었다.

 

“-? 무슨 말을 그리해?”

그렇잖습니까. 자꾸만 깰 건데 약속 잡는 의미가 있나요?”

“...장그래.”

 

얘기 좀 해. 내가 탕비실로 내려갈게. 차갑게 뚝뚝 끊어지는 말과 함께 끊어진 전화가 뱉어내는 차가운 기계음에 그래가 울컥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전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이제 막 퇴근준비를 하려 재킷을 입던 김대리가 화들짝 놀라 왜 그러냐 물어왔지만 차마 웃지도 못한 채 꿀꺽, 분노를 삼켜내고 아니라 짧게 답한 뒤 탕비실로 급하게 향했다. 분노로 점철된 그래의 발걸음이 복도를 쾅쾅 울려 강대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백기마저 힐끗 바라 볼 정도였다.

 

 

탕비실에 먼저 도착해 복사기에 몸을 살짝 기대고 있던 석율의 눈이 그래를 보자 번뜩 빛났다. 왔냐는 인사도 없이 쏘아붙이듯 뱉어내는 석율의 말에 그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아까 그거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자꾸만 약속 깰 거면 차라리 만나지 말자고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문장인거 알지? 말 똑바로 해.”

글쎄요, 오해일지 아닐지는 한석율씨가 판단하시면 되겠네요.”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듯 넘나드는 말에 잔뜩 솟은 가시가 두 사람을 난도질하듯 찔러온다. 저도, 상대방도 상처받는 건 알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 두 사람은 이를 악물었다.

 

 

*

 

 

말을 마치고 몇 번이고 더 뒷머리를 긁적이던 석율이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열을 식히려는 건지 손가락을 곧게 펴 파닥파닥 흔들어대기도 하고 퍽이나 부산스럽지만 그래는 반면에 얌전했다.

단지 이빨로 통통한 제 입술을 못살게 굴 뿐이었다. 분노에 차 그래에게 모진소리를 뱉긴 했지만, 그 하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입술만 깨물고 있는 그래를 보는 석율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허나 그래가 뱉었던 말이 마치 저와의 만남 자체를 끊어내려 하는 것으로 들려 도무지 화가 안날수가 없었다. 물론 저번 주말도, 오늘도 얼마나 둘이 기대를 했던가. 먼저 만나서 어디를 가고, 그 다음에는 이걸 보러가고 계획을 짜느라 신났던 건 오히려 석율쪽이 더 했던지라 약속을 깬 입장인 저가 할 말은 없었다. 허나 평소였으면 유하게, 아니면 시크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을 그래의 반응에 당황스럽기도 했던지라 오히려 더욱 버럭 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두 사람의 다툼이 잦지 않았던 건 두 사람 모두 참는 성향이 있다는 게 큰 이유였다. 괜한 다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 다투며 감정 소모할 시간에 그저 둘이서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놀고 싶다. 라는 게 그래의 의견이었고 석율도 그에 동의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지금껏 웬만한 서운한 일은 가슴에 묻고 원만하게 지냈던 거였는데. 석율은 힐끗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꽤나 찌르르했던 설전 끝에 찾아온 침묵이 이어진지 벌써 십 여분. 그래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푹 숙인 채 입술만 꽉꽉 물고 있고, 석율은 한숨만 푹 쉬고 있었다.

 

쉽게 달아오른 뜨거운 머리와 입이 뱉은 말들이 창피할 만큼 석율은 어느새 화가 많이 가라앉아있었다. 마음에 담아둔 말을 쏟아낸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무엇보다 저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래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는 게 화가 가라앉은 결정적 이유였다. 석율이 좋아하는 그래의 모습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물끄러미 앞만, 정면만 바라보는 꿋꿋한 아이였으니까.

 

어쩔 수 없으니 저가 지고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석율이 꿀꺽 목울대를 한번 울리고는 그래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장그래.”

 

역시나 대답은 없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씁쓸함에 위가 쓰렸다. 장그래. 그래야. 한층 다정해진 석율의 목소리가 그래의 어깨를 흠칫 울렸다.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게 안심돼서 한번 메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훑던 석율이 용기내 그래의 양 팔뚝을 그러쥐었다.

평소보다 뜨끈한 체온에 많이 화났나 싶어 난감했던 석율이 고개를 조금 숙여 여전히 땅만 보고 있는 그래의 얼굴을 살핀 순간 놀라 저도 모르게 헉, 헛숨을 뱉어냈다.

 

, 장그래. 그래야. 울어?”

 

언제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건지 동그란 눈매 가득 그렁그렁 들어차있는 맑은 액체가 똑똑 떨어지다 못해 양 볼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술만 깨물 뿐 그 흔한 물기어린 소리하나 내지 않은 그래의 모습에 석율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같이 꾹꾹 눌러 참고 있었을 그래가 안쓰러워 석율은 서둘러 그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의 반항도 없이 끌려 들어온 여린 몸이 그제야 가볍게 떨린다. 허나 석율이 그래의 등허리를 감아와도 그래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석율의 허리에 손을 감아오지도 않았다. 많이 서러웠구나. 우리 그래. 석율은 제 자신을 자책하며 그래의 몸을 더욱 꼭 안았다.

 

미안해. 장그래. 정말 미안. 내가 약속 깨서 서운했을 텐데 나쁜 말이나 하고.”

“.....니다.”

?”

“...아닙니다. 한석율씨 잘, 못 흑, 아닙니다.”

그래야..”

 

석율이 고개를 틀어 뜨끈한 그래의 볼에 가벼운 입술을 내리자 그래가 기어이 서러운 울음소리를 터뜨린다. , . 아이처럼 헐떡이는 숨을 막지도 못한 채 그래는 덜덜 떨리는 몸을 하고선 그제야 석율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볼을 석율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기대왔다. 헐떡이며 우는 와중에도 계속 제,. , 잘못, 훌쩍, . 띄엄띄엄 말을 해오는 그래의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쉿, 석율이 다정하게 말렸다.

 

, 괜찮으니까 그래야. 그만 말하고, 뚝하자.”

“..., ,석율씨.”

, 그래야.”

나 헤어지자고, , 말한, 거 아닙,,.”

 

새삼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아까보다 더 몸을 들썩이는 그래를 다독이며 석율은 몇 번이고 귓가에 다정한 말을 쏟아냈다.

"그럼, 알지 우리 그래가 그럴 리가.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우리 다음 주에는 꼭 놀러가자. ?"

 

그제야 안심되는 지 작게 끄덕이는 조그마한 머리가 어깨에서 느껴지자 석율이 목으로 웃고는 그래의 드러난 흰 목덜미에 쪽쪽 입맞춤을 퍼부었다.

 

다음주에는 12일로~?”

“....좋습니다.”

 

분위기 파악 하시죠. 라며 발을 세게 밟아 올까봐 언제든 뒤로 뺄 준비를 하고 있던 석율의 구둣발이 흠칫 흔들렸다. 석율의 말에 몸을 더욱 기대오며 수줍게 뱉어낸 그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율은 귀부터 얼굴,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아까와는 다른 열이 차올라 급히 제 얼굴을 부채질 하는 석율과, 그런 석율의 움직임에 작게 웃는 장그래가 있었다.

 

 

*

 

와 석율그래 제대로는 처음써본다(벙찜)

얼마전 트친분과 이야기나눴던 석율그래의 성격? 느낌? 을 바탕으로 두사람의 다툼

적정한 온도차를 유지하며 무난히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두사람이 좋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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