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우리 아빠 둘 2
2. 강해준과 장백기
가기 싫어.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잠도 이미 한참 전에 깨 졸리지도 않으면서 이불에서 괜히 꾸물거리던 백기는 허리에 올라타서 박수와 함께 저를 재촉하는 백서의 똘똘하지만 조금은 과격한 모닝콜 덕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몸은 일어났어도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서 밍기적 거리는 백기의 몸을 단번에 침대에서 꺼낸 건 백서의 웃는 얼굴과 아빠랑 같이 씻고 싶은데. 하는 귀여운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그 말에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같이 벌떡 일어난 백기가 백서를 품에 안고 몇 번이나 그 뽀얀 분내와 사랑스러운 아이의 체온을 즐기다 함께 욕실로 향했다. 신이 난 듯 백기의 손을 잡고 꿈속에서 용을 봤다느니, 그 용이 등에 태워줘서 하늘을 날았다느니 하는 웅장한 꿈속 이야기를 설명하던 백서는 욕실로 발을 딛기 전에 등을 구부리곤 슬리퍼를 백기의 앞에 가지런히 짝을 맞춰 놓고는 저는 맨발로 화장실 타일을 밟았다. 그 자연스러운 제 아들의 배려에 백기는 괜히 찡해오는 눈가를 누르며 맨발로 다급히 들어가 백서를 뒤에서 끌어안고 정수리에 뽀뽀를 퍼부었다. 이뻐, 장백서. 쪽, 누굴 닮아서어. 쪽쪽
“아빠, 슬리퍼 안 신으면 발 차가워요!”
“아빤 괜찮으니까 백서가 신어. 그리고 우리 이따가 백서 꺼도 사러가자.”
“아빠랑 똑같은 걸로?”
“응, 똑같은 걸로.”
그에 좋다며 볼을 발그레 붉힌 백서가 히죽 웃어왔다. 백서와 같이 산지 고작 이틀밖에 안됐는데 벌써부터 이리 행복하면 어쩌자는 건지. 아까 일어나기 싫어 잔뜩 뾰족했던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느끼며 백기가 아이에게 뽀로로 칫솔을 내밀었다. 그리고 폴리 치약도 그 위에 쭈욱 동그랗게. 아빠, 나 혼자 닦아요. 보세요! 자랑하듯 조금은 서툴지만 열심히 칫솔질을 하는 제 아들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세상일이 그리 쉬워, 백기씨?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없다구우.
커피를 내밀며 쯧쯧,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온 석율이 백기가 컵을 받아들자 곧바로 어깨에 손을 둘러온다. 평소였으면 재빨리 밀쳐냈을 것도 힘도 의욕도 아무것도 생기지 않아 그저 커피로 입만 축인 백기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온다. 맞은편에서 서류 파쇄를 하다 말고 몸을 돌려 안쓰럽게 저를 쳐다보는 영이의 시선도 느껴졌지만 백기는 그저 묵묵히 땅만 바라봤다.
“백기씨 절여지는 소리가 글쎄 16층까지 울리는 거 있지?”
“아니, 그걸 절여진다고...!”
“절여지는 거지. 응? 유명하잖아 백기씨. 원인터 철강 팀의 김장마스터 강대리는 오늘도 열심히 입사 한달차 장백기를 굵은 소금으로 푹 절이고 있습니다.”
“...말을 맙시다.”
마치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라도 하듯 진지하게 말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손가락 끝을 펴 백기의 가슴을 콕 찔러오는 얄미운 행동에 기어이 백기가 석율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그 탓에 종이컵에서 출렁인 커피가 셔츠 소매며 구두에 조금 튀자 백기는 안 그래도 우울했던 기분이 더더욱 깊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걸 느꼈다. 후우우.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오듯 뱉은 어두운 한숨에 그제야 석율도 장난을 멈추고 백기의 어깨를 도닥였다.
“힘들지? 이럴 때는 동기밖에 없지말입니다! 우리 오늘 밤에 한잔 쭉 할까? 동기들끼리?”
“저 오늘 일찍 가봐야 합니다.”
“뭐? 왜! 야근 때문도 아니고~! 백기씨 위로해주려는 우리의 성의를 무시하려고 하는 거야?”
“무시가 아니라 집에...., 하여튼 앞으로 술자리 잘 못 갑니다.”
“왜? 집에 뭐라도 숨겨뒀어? 응? ”
“아닙니다.”
아쉽다는 듯 영이마저 제안했지만 백기는 일찍 어린이집에 가 백서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했기에 한 번 더 공손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옆에서 자꾸만 찡찡거리는 석율에게 성의 없이 휘적거려 타준 믹스커피를 내밀어 입을 막아버렸다. 백기는 꿍얼거리면서도 커피를 홀짝이는 석율을 보다 이곳에 그래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의 차분한 표정에는 뭔가 거절하기 애매한 무언가가 있고, 백기가 그걸 쳐낼 수 있을지가 정말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탕비실에 걸린 시계를 보자 점심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기에 그를 핑계 대며 백기는 서둘러 탕비실을 나왔다. 복도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보이는 유리문에 숨이 턱하니 막혀오는 착각이 들었다. 고작, 투명한 유리문일 뿐이었는데 저 곳을 넘어가면 또 다시. 백기는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다 슬쩍 구두코를 내밀었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 예민하게 반응해 열리는 유리문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역시나 먼저 와서 앉아있는 강대리의 굳건한 옆모습에 백기는 답답해져오는 넥타이를 한번 정리하곤 제 자리로 가 조용히 앉았다. 분명 끽, 하면서 의자가 가볍게 밀리는 소리가 났음에도 저를 쳐다볼 생각조차 않고 일에만 집중한 강대리를 힐끗 티나지 않게 조심하며 바라본 백기가 또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팔꿈치를 기댄 제 책상을 바라보자 밝은 빛을 내며 켜져 있는 노트북 외에는 무척이나 깨끗했다.
집에서 챙겨온 머그잔, 볼펜꽂이, 몇 권의 책은 이미 아침부터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며 위치를 옮기길 반복했다. 파티션에 메모패드도 벌써 두어 번은 뗐다 붙였다 했고. 백기는 서랍을 열어 물티슈를 한 장 빼 노트북 모니터를 슥 닦았다. 역시나 묻어나는 게 없이 깨끗했다. 그럴 수밖에. 이 행동도 벌써 네 번째니까. 먼지가 쌓일 틈조차 주지 않고 물티슈로 꼼꼼히 이곳저곳을 닦아대는 행동에 차과장 조차 출장을 나가는 길에 백기의 등에 대고 “장백기씨, 혹시 정리 벽이야?” 라고 할 정도였으니.
허나 안타깝게도 백기는 오히려 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축에 속했다. 청소를 자진해서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거니와 늘 어머니께 등짝을 맞아가며 억지로 청소를 하게 된다 해도 차라리 처음상태가 나을 정도로 이게 정리인지 어지럽히는 건지 모를, 그런 청소엔 적합하지 않은 마이너스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실력을 가진 백기가 자진해서 자꾸만 제 책상을 닦고 쓸고, 물건들의 배치를 재정비 하는 건 전적으로 저의 사수 탓이라 백기는 생각했다.
‘일은 지 혼자 다하지.’
불만을 형상화 한 듯 잔뜩 부푼 입술을 다시 입 안으로 말아 넣어 꼭꼭 앞니로 몇 번 씹던 백기가 한 번 더 볼펜꽂이에 든 볼펜들을 전부 꺼내더니 차곡차곡 색깔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좌르륵, 하는 거슬리는 소리까지 내가며 사무실에서 딴 짓을 하는 백기를 분명 알고 있음에도 해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키보드만 무심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차라리 일을 몰아서 주거나, 아니면 자원팀의 하대리님 처럼 버럭버럭 성질이나 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자 백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배추 절이기가 아닙니다. 한석율씨. 이건, 그냥. 투명인간 취급이라고요.
*
흔한 사수의 부사수를 가르치려는 의욕도 없다. 무언가를 알려주고, 저에게 다시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사수의 태도 또한 없다. 해준은 그저 백기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석율이나 제 동기들은 배추 절이기라 명명한 해준의 백기 교육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고 백기는 생각했다- 교육이란 건 어쨌든 1:1이든 1:다수든 무언가의 접촉이나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차라리 배추 절이기가 낫지. 절이려면 어쨌든 그 절이는 물체에 관심을 줘야하잖아? 잘 절여지고 있나. 촉촉한 소금물에 배추가 흐물흐물 거리고 있나. 간이 짭짤하게 배었나. 까지 생각하던 백기는 제 꼴이 이미 절여져 흐물거리는 배추나 별다를 게 없구나 하는 결론까지 떠올리곤 씁쓸하게 웃었다. 맞네, 배추 절이기. 누군가의 관심 없이 혼자 절여지고 있는 불쌍한 배추.
강해준은 처음부터 장백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첫날부터 지금껏 백기에게 제대로 된 일을 주지 않을 리가 없지. 철강 팀이 한가하게 일이 없는 팀도 아니고, 홍대리나 강대리 책상 위에 가득 쌓여있는 색색깔의 서류철만 해도 상당하고, 심지어 사무직인 다인씨마저도 계약서 작성이며 대리들을 서포트하느라 상당히 분주하게 돌아다니는데 그 바쁜 사무실에서 백기는 홀로 멀뚱히 앉아있기 일쑤였다. 지금처럼. 늘.
“장백기씨.”
“...네?!”
오늘은 아침에 인사할 때 빼고는 처음 들어본 듯한 해준의 목소리에 백기의 어깨가 펄쩍 튀었다. 너무 놀라 다급하게 대답하느라 삐끗한 목소리가 민망해 뒤늦게 뒷목을 주물 거리던 백기가 슬쩍 고개를 돌려 해준을 바라봤다. 그러자 곧바로 마주쳐오는 곧은 시선에 어쩐지 지금껏 하고 있던 생각이 행여나 들킬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자 해준은 그런 백기의 행동에도 별다른 말없이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제 코트라 건 때문에 자재창고에 샘플들이 구분 없이 되어있을 겁니다. 가서 종류별로 잘 분류하세요.”
“아,..샘플 정리 말씀이십니까?”
“네, 아, 정리하면서 재고도 확인하구요.”
“...네. 강대리님.”
비척비척 일어난 백기가 뒤로 밀린 의자를 다시 깊숙이 밀어 넣고는 자재창고로 향했다. 묘하게 쳐져있는 어깨며 가라앉은 뒤통수가 마음에 걸릴 만도 하건만 해준은 무심하게 쳐다보다 금방 눈길을 돌렸다.
*
콜록, 옷가지며 머리카락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털었다고 생각 했는데도 여전히 남아있는지 이제 막 어린이집 현관에 들어서려던 백기가 작게 기침을 했다. 코끝도 찡하고 목구멍 속도 간지러운 게 얼른 집으로 가서 몸을 씻어내고, 옷도 털어서 바깥에 널어놔야겠다. 등을 생각하던 백기가 갑자기 다리에 와 닿는 무게에 깜짝 놀라 쳐다보자 백서가 어느새 어린이집 가방까지 매고 백기의 다리에 매달려있었다.
“아빠아. 왔어요?”
“어, 응. 백서 오늘 잘 놀았, 콜록. 어?”
“아빠, 감기 걸렸어요?”
“응, 아니? 먼지 때문에.”
“먼지. 나 먼지 아는 데에. 그거 지저분한 거라고 했는데.”
“응, 맞아 지저분한 거. 아까 아빠 청소했거든. 얼른 백서랑 집에 가서 목욕하면 깨끗해질 거예요. 걱정 마.”
“백서랑 같이 목욕해요?”
“응.”
그에 아빠를 걱정하느라 조금 찡그렸던 얼굴을 펴고 이가 보일정도로 환하게 웃던 백서가 백기의 손을 잡고 다급히 어린이집 문 밖으로 끌었다.
어, 어어. 백서.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백서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짐짓 엄한 소리를 내자 후다닥 백기의 앞에 선 아이가 배꼽위에 양 손을 올리곤 공손하게 허리를 접어 제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인사를 한 백서가 다시 백기의 손을 야무지게 잡고 이끌자 백기가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백서를 따랐다. 목이고 어깨위고 무겁게 쌓여있던 먼지인지 깊은 우울인지 모를 것들이 폴폴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걸 느끼며 백기는 제일먼저 집에 가서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아, 가는길에 백서 슬리퍼도.
*
백기보단 백서가 더 철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