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기준성준] 생일

단문2015. 6. 9. 00:43


“불, 만지지마. 뜨거우니까.”



몇 번이나 반복되는 경고임에도 식탁 의자에서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자꾸만 들썩거리는 통에 벌써 10분이 넘도록 성냥 끝은 촛불과 맞닿지 못하고 있었다. 성냥을 긁어 불꽃을 내자마자 눈을 빛내며 입으로 후, 후우. 불어대는 지라 지금 기준의 손가락에 쥐여진 성냥이 딱 6번째 새 성냥이었다. 



“후, 불지도 마.”

“네, 네에, 성, 성주니 안붑, 붑니다아. 후우, 안합니다.”

“한번만 더 불면, 생일축하 노래 안한다.”



진심을 담아 기준이 엄하게 뱉은 말에 그제야 성준이 입을 꾹 다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 손바닥으로 꾸욱 코 밑부터 턱까지 눌러 막는 모습에 기준이 안심하곤 성냥갑에 성냥을 긁었다. 칙, 마찰음과 함께 붉은 불이 일렁이고 성준의 엉덩이가 다시 한 번 들썩였지만 이번엔 기특하게도 참아내고 있었다. 물론 바닥을 다다다 구르는 발은 여전했지만. 


저리 안절부절 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묘한 심술이 고개를 들어 기준은 일부러 천천히 촛불에 불을 붙였다. 고작 스무 개 남짓 되는 촛불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생일축하 노래와 촛불 끄는 걸 꼭 하고 싶었는지 간신히 참아낸 성준이 동의를 구하듯 기준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성준이, 불 끄고 와.”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였던 손을 내리고 후다닥 달려가서 부엌 불을 끄고 다시 뛰어온 성준의 입에 함박웃음이 물려있다.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맞붙이고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눈이 꼼꼼하게 촛불을 살피는 중이었다. 기준이 먼저 운을 띄자 성준이 신나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약간은 더듬지만 제법 완벽하게 부르는 게 신기해 기준이 노래를 마친 성준을 향해 박수를 두어 번 쳐주었다.



“...혀, 형아아. 성, 성준이 이제, 후, 후우 합니다.”

“너무 강하게 말고 입술 모으고. 응, 그렇게.”

“후우, 해도 되, 요오?”

“응.”



기준의 허락을 끝까지 기다리던 성준이 케이크 앞으로 고개를 붙여 바람을 후후 불었다. 행여나 앞머리가 탈까 기준이 성준의 이마를 슬쩍 손바닥으로 밀어내도 고개는 여전히 뻣뻣했다.


촛불이 다 꺼지고 희뿌연 연기가 공기 중에 퍼지자 성준이 킁킁 냄새를 맡다가 코를 다급히 막으며 우는소리를 냈다. 그런 성준을 슬쩍 보며 입 꼬리를 올린 기준이 촛불을 빼내자 성준의 고개가 다시금 바짝 다가왔다. 



“....서, 성, 성준, 성준이. 딸기, 딸기 먹습니다.”

“딸기랑 또 뭐 먹을래.”

“초, 초코도 성준이, 먹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부분을 콕 집으며 손가락으로 몰래 생크림을 찍어 입에 가져가는 성준을 눈감아주며 기준이 접시에 예쁘게 케이크를 담아 성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먼저 손이 나가려는걸 기준이 손등을 찰싹, 쳐 저지한 뒤 포크를 내밀었다. 서툴게 손에 포크를 말아 쥐곤 딸기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느라 입 주변이 생크림 범벅인 성준을 보며 기준이 한숨과 함께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훑어 닦았다.


한참 무아지경에 빠져 케이크를 먹던 성준이 팔짱낀 자세로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기준을 보고 고개를 갸웃 저었다. 




“형, 형아... 안 먹습니다.”

“응, 단거 싫어.”

“성..성주니, 혼, 혼자...먹습니다.”

“성준이 많이 먹으면 되잖아.”

“....혼, 혼자아....싫습,니다아...”




눈은 케이크 조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면서도 무슨 고집인지 포크까지 식탁위에 올려놓는 성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하, 고집불통. 기준이 졌다는 듯 제 앞에 있던 포크를 들어 케이크 윗부분 생크림을 긁어 옆으로 치우고는 스펀지와 딸기만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우윽, 달아.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보란 듯이 바라보자 그제야 얼굴이 좀 풀리곤 포크를 다시 쥔 성준이 기준이 포크로 밀어 치운 생크림을 포크에 담아 제 입으로 쏙 가져갔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성준의 발그레한 볼을 바라보며 기준이 입안에 남은 단맛을 커피로 애써 밀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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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백기] 투정은 불안에서부터




“대, 대리님. 제가 안겠습니다.”

“아뇨. 장백기씨 요즘 허리 아프다면서요. 산후조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라니까.”

“아이 낳은 지 벌써 2년이 다됐는데 무슨 산후조리입니까…….대리님. 사람들이 보잖아요.”

“장백기씨, 제가 창피합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오히려 대리님이…….”

“왜요. 내 아이 아빠가 안겠다는데.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지 해준의 옆에서 안절부절 몸을 가만히 못 놔두고 입술을 깨물던 백기가 해준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분홍색의 천 가방 손잡이를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이거라도 제가 들게 해주세요. 간절한 백기의 말에도 고개를 단호하게 저은 해준이 갑작스레 백기의 입술에 쪽, 입 맞춘 뒤 떨어졌다. ...대리님!!



“아이한테 필요한 게 들어있는 가방인데, 필요할 때마다 바로 꺼낼 수 있게 내가 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정말…….”



불만 가득한 백기의 말에도 해준은 꼿꼿했다. 볼이 잔뜩 부푼 채로 땅바닥만 보며 걷는 게 단단히 삐진 듯싶었다. 아기띠 안에서 잠든 아이의 고개가 뒤로 휙 넘어가자 손으로 단단히 목을 받쳐 아이의 볼을 제 가슴팍에 기대게 한 뒤 반대편 손으로 백기의 손을 슬쩍 잡았다. 놀라 움츠러들던 백기가 결국 꼼지락 거리며 손가락을 얽어오자 해준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손, 잡아주셨다고 풀린 거 아니에요.”

“압니다.”

“엄마가 화나있으면 아기한테도 영향간대서 억지로 화 푼 거에요.”

“풋, ...압니다.”

“...웃지 마세요.”

“응, 안 웃을게요.”

“...웃고 있는 거 다 보입니다.”



고개를 돌리고 자꾸만 잘게 어깨를 떨어대는 게 맞잡은 손으로도 느껴져 백기가 꾸욱 슬쩍 손톱을 세워 해준의 손등을 꼬집어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얄미워 진짜. 참다 참다 안 되겠는지 막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해준은 타이밍 좋게 백기의 입술에 쫙 핀 제 검지를 가져다댔다. 쉿,



“애기 깹니다. 간신히 재웠는데.”



너무나 당연한 말씀. 당연한 말씀을 하는 해준의 얼굴이 여전한 웃음기를 머금지만 않았어도 저도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입술이 꾹 닫힘과 동시에 잡고 있던 해준의 손을 제법 거칠게 놓은 백기의 눈이 흐릿하게 젖어들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닫힌 입술이 백기의 톡 튀어나온 앞니에 의해 짓씹히고, 고개를 푹 숙여 해준의 당황한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해버린다. 그제야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해준을 덮쳤다. 아차, 안 그래도 요즘의 백기는 참으로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아침에 기분 좋게 깨서 웃음 짓다가, 아침 준비하던 중 빵을 태웠다는 이유 하나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해준이 야근에 회식까지 겹쳐 늦은 밤 들어오는 날이면 소파에 퀭한 눈으로 앉아 있다가 힘없이 들어가 홀랑 혼자 잠들어 버린다거나. 물론 백기가 보통 남자들보다 예민하고 이곳저곳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이건 예민을 넘어서 과민 수준이었다. 방금도 연애시절과 신혼 때 빈번했던 그저 애교 섞인 장난정도의 수위였다. 한두 번이 아닌. 그저 백기가 얄밉다는 듯 손가락이나 목덜미께를 잘근 씹곤 웃어 보이면 다 풀렸던 그런 사소한 일. 남들의 이목을 중요시여기는 백기로써는 만약에 화가 났더라도 길거리에선 절대로 그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데. 


역시나 묘하게 이상하다. 불안감에 해준이 한 발짝 백기에게 걸어가자 딱 그만큼 멀어지고, 또 다가가자 한 발짝 멀어짐과 동시에 주저앉아버리는 백기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난감함에 한숨 쉰 해준이 우선 백기의 손목을 잡아 몸을 일으켜 근처 공원으로 들어간다. 한손에 들고 있던 분홍색 천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깔고 백기를 조심스럽게 앉히자 코를 한번 훌쩍이면서도 순순히 앉는 모습이 또 마냥 귀여워 해준의 광대가 슬쩍 올라가려한 순간 백기의 고개가 갑자기 들렸다. 황급히 입술을 내려 괜히 걱정스럽단 표정을 지어보인 해준을 보며 붉어진 코를 매만진 백기가 다시 한 번 훌쩍, 우는소리를 낸다. 



“...백기씨, 괜찮아요?”

“.....아니요.”

“왜 울었는지 물어봐도 되요?”

“...대, 대리님이,”



백기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막 나오려는 순간 해준이 매고 있던 아기 띠가 출렁이며 아이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우앵, 우애앵. 뭐가 그리 서러운지 가느다란 목소리가 제법 커지며 해준의 목덜미며 옷자락을 작은 손으로 꼬물하고 쥔 아이를 달래려 해준이 제법 능숙하게 아이의 뒷목을 따듯한 손으로 쓸고 반대쪽으론 등허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가, 울지 마. 응? 중간 중간 다정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아빠의 목소리며 따뜻한 달램 덕인지 슬쩍 슬쩍 울음소리가 작아지고 숨을 고르느라 헐떡이는 아이의 말랑한 볼에 해준이 입술을 몇 번 찍고 웃는 순간 또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에게서가 아니라 조금 아래쪽에서. ...아래쪽? 해준의 고개가 황급히 돌아가자 뭐가 그리 서러운지 제 양손에 고개를 파묻고 훌쩍이는 백기의 손가락 틈새로 맑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점점이 떨어져 벤치 아래 모래바닥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던 눈물방울이 멈출 틈을 안보이자 놀라 굳어있던 해준이 조심스레 백기의 어깨를 쓸었다. 넓은 손바닥이 우느라 뭉쳐있는 어깨를 살짝 쓸어내리다가 손가락으로 꾹 누르기도 하고, 조금씩 올라가 경직된 목덜미도 어루만지자 백기의 입에서 떨리는 한숨이 터졌다. 흐, 우읍…….



“...백기야, ...진짜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 이거, 이상, 흡, 한 질문인건...아는, 데…….”

“응, 뭔데 말해봐.”

“흐...으.., 대리님, 나, 나보다 아기가 더 좋,아요?”



...뭐? 해준의 얼빠진 대답을 또 멋대로 해석했는지 맞죠, 그쵸. 하며 몸을 더 웅크려 이젠 아예 이마를 무릎에 댈 기세인 백기의 어깨를 쥐어 잡는 손이 다급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황스러움에 다시금 존댓말이 튀어나오는 건 대수도 아니었다.



“나, 둘째, 가졌어요.”

“.......네?”

“근데, 낳기 싫어요. 왜, 왠줄 알아요? 대리님 지금도 아가한테만 신경 쓰는데, 둘째까지 낳으면 나 정말로 신경 안 쓸까봐요.”

“...장백기씨, 아니, 백기야.”



해준의 목소리가 순간 낮게 가라앉았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해준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사수와 부사수 시절 해준의 목소리 변화, 숨소리 변화까지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저였으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주는 막연한 공포감이 싫어 백기가 해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다. 



“사실이야?”

“...뭐, 뭐요…….”

“둘째. 사실이냐고. 아니 언제부터 안거야.”

“며, 며칠 안됐어요. 그냥 속이 안 좋아서 병원 갔는데…….”

“며칠이나 됐는데 왜 나한테 얘기는 안한 거고.”

“…….”



대답 없이 숨만 고르고 있는 백기의 앞으로 해준의 얼굴이 들어찼다. 울며 찡얼거리던 아이가 다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고 있는 모습이 언뜻 스쳤지만 백기의 앞에서 씩 미소 짓고 있는 해준의 얼굴의 임팩트가 훨씬 커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화, 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잔뜩 움츠러든 어깨며 목의 경직이 풀림과 동시에 눈물샘은 또 철없이 풀려 맑은 물방울을 똑똑 떨궈내기 시작했다. 그에 으그, 어르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으로 우느라 따끈하게 달아오른 백기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 해준이 슬쩍, 백기의 아랫입술을 물다 떨어졌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벙찐 백기가 입을 벌리자 다시 한 번 히죽, 웃은 해준이 한손으로 제 입을 슬쩍 가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아 큰일이네.”

“뭐가요..?”“입 꼬리가 주체가 안 돼.”

“네?”

“좋아 죽겠다고요. 장백기씨.”


볼을 가볍게 꼬집은 해준의 손이 천천히 백기의 배위로 내려앉았다. 아직은 평평하기만 한 배의 모양을 덧그리던 해준이 시선을 떼지 못하며 황홀한 듯 뱉어낸 목소리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통, 통 가볍게 백기의 머릿속을 쳐온다. 슬쩍 눈만 들어 조금은 충격에 빠진 듯 한 백기의 얼굴을 살핀 해준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낸다.



“정말, 둘째까지 나오면 난 애를 셋을 부양해야 하는 건가.”

“셋이요?”

“제일 눈물 많은 큰 애 여기 있네.”



삐죽, 해준의 말을 이해한 백기의 입술이 쑥 나왔다 제자리를 찾는다. 아까처럼 놀리듯 가벼운 목소리가 이번엔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 며칠간 불안감에 쌓여있던 백기의 가시 돋친 감정을 녹여 내리는 듯 아주 부드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 스르륵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백기 저가 무엇을 그리 불안해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져 눈물이 쏙 들어가고 그 자리를 홍조가 채웠다. 백기의 배를 쓰다듬던 큰 손바닥이 떨어지고 몸을 일으킨 해준이 백기의 손을 쥐곤 일으켰다. 민망함에 도무지 맞잡지 못한 손가락이 뻣뻣하게 서있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해준은 백기의 몫까지 더욱 단단하게 손을 쥐어왔다. 



“요 며칠 우울했던 건 그럼 산전 우울증?”

“…….”

“나한테 끝까지 숨기려고 했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아이 챙기느라 널 신경 안 쓸 거라는 발상을 하는 건지.”

“...대리님이, 아가만 챙기는 건 맞죠 뭐.”

“너랑 내 아기니까 예뻐서 챙기는 거라곤 생각 안하지.”

“아 저도 유치했던 거 아니까 그만하세요!”



예전에 진지하고 차가웠던 모습은 다 어디 간 건지 아주 저 놀리기에 재미라도 들였나보다. 민망함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에 아침 일찍 산책 간다고 정성들여 만진 머리를 문질러 비비는 백기를 제지하며 해준이 또 웃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어이없는 생각 하지 마.”



알겠어요. 슬쩍 눈치를 보며 웅얼거린 백기가 애교 부리듯  손등을 손끝으로 슬슬 문질러오는 걸 즐기며 해준은, 한시름 덜어 후련한지 조금은 편해진 낯빛을 하고 있는 백기의 옆모습을 훔쳐보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면 백기가 민망함에 화를 내고 먼저 돌아갈까 봐 간신히. 간질간질 발가락 끝부터 올라오는 즐거움을 찍어 누르며 해준이 잠든 아이의 등을 괜히 한번 도닥였다. 




*


어린이날에 써뒀던 토막을 이제야 완성해서 올려봅니다 8▽8하핫...




[영도효신] 한 발짝

단문2015. 5. 29. 00:54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

 -김현승 [고독]




짝사랑이란 게 이렇게 거지같은 거였단 걸 미리 알았더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몇 년째 반복하고 있는 생각이지만, 후회하기엔 많이 늦었다는 걸 잘 안다. 벗어날 수 있었다면 진즉 벗어났겠지. 잔뜩 날을 세운 그에게 낮 동안 할퀴어져 뚝뚝 피를 흘리는 제 불쌍한 심장을, 고독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마다 덕지덕지 밴드를 붙여 임시방편일 뿐인 치료를 한다. 그러나 본래 질기지 못한 살굿빛의 천은 영도의 심장에 난 많은 상처를 덮기도 전에 붉은 피에 절어 접착력을 잃곤 했다. 황망하게 주저앉아 아픈 부근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고만 있던 영도가 울컥 치미는 감정에 주먹으로 바닥을 쿵, 내려쳤다. 카펫이 깔린 호텔방은 제 아비가 당당하게 뽐냈듯 소음 따윈 가볍게 집어삼킬 뿐이어서 풀 데 없는 분노가 영도를 잠식해 나갔다. 


벗어날 수 없으면 끊어내는 게 맞을 터였다. 저를 위해서도, 효신을 위해서도. 하긴 여기서 효신을 위해서라는 것 자체가 꽤나 웃긴 자기변명이었다. 저 혼자만 앓던 사랑을, 누군가에겐 몇 년 동안이나 닿지 않은 애절한 혼자만의 외침, 그저 저 혼자만 아프면 됐으니까. 효신이 돕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냥 혼자만. 아무도 모르던 사랑을 정리하면 됐으니까.



-



붉게 충혈 된 눈이 뻐근함에 달아오르자 효신은 막 교문을 지나치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누르다 가볍게 비볐다. 어젯밤 감금되듯 갇힌 제 방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오랜만에 치정이 끈적하게 얽힌 내용으로 유명한 불륜 소설을 밤새 읽었더니 눈은 뒤늦게 항의하듯 잔뜩 비명을 질러댔다. 메말라 뻑뻑했던 눈동자가 손가락에 비벼진 탓에 억지로나마 물기를 머금어냈고, 그제야 아픔이 가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효신이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 끝에 길쭉한 것이 걸렸다. 오늘도 교칙은 어디다가 갔다 버리고 셔츠 없이 달랑 카키 빛의 니트나 걸친 건지. 교칙에 잔뜩 어긋난 니트나 맨투맨을 입는 주제에 꼬박꼬박 남색의 교복 마이를 걸치는 건 또 이상한 고집이라 효신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한소리 해야겠다 싶어 성큼 한걸음을 뗀 순간 영도가 효신을 향해 흐리게 웃고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갔다. 어,




“...저거 가방도 없이 등교하기는.”



분명 저를 봤음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뒤돌아선 영도가 당황스럽긴 했지만 거기에 대고 딱히 뱉을 말이 없어 눈만 데룩 굴리던 효신은 마음과는 다른 실없는 소리나 툭 흘렸다. 생각해보면 날카롭게 비죽이는 얼굴, 굳은 표정, 당황한 표정, 갑자기 혼자 잔뜩 붉어진 얼굴로 다급히 손부채질을 하던 모습까지. 오히려 다른 이들이 보기 힘든 의외의 모습들을 효신에게 잔뜩 보여줬던 최영도지만 효신은 영도의 뒷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침과 동시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다시 눈을 덮쳐왔다. 아무래도 양호실에서 인공눈물이라도 받아야겠다 여긴 효신이 멈췄던 걸음을 떼 학교 건물로 향해갔다. 잠시 멈춰있었을 뿐인데 벌써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영도를 저도 모르게 찾던 효신이 치미는 짜증에 고개를 붕, 휘저었다. 선배를 보고 인사도 않고, 진짜 건방이 점점 하늘을 찌르는구나. 닿지 않는 분노를 눈을 비비는 것으로 대신한 효신의 손이 꾸욱, 제법 세게 눈두덩을 눌러왔다.



-



손에 든 일회용 인공눈물 튜브를 뚫어져라 바라본 효신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얼굴에서 10센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똑, 똑 투명한 액체가 떨어져 효신의 눈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서늘한 온도에 놀란 것도 잠시 금방 효신의 체온을 닮아진 인공눈물은 효과가 제법 빠르게 나타났다. 뻑뻑하게 마르다 못해 붉은 핏줄까지 도독 나타났던 효신의 눈가가 유리구슬처럼 반짝였으니까. 허나 마치 사막의 모래바닥처럼 한참동안이나 메말랐던 눈가는 금방 그 수분을 좀먹었고 빡빡함을 다시 호소하기 시작했다. 어우, 두 셋방울이면 된다더니 이거 제약회사에서 용법을 잘못 설명한 거야 뭐야. 투덜거린 효신이 다시 뒷목을 젖히고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제문이 벽에 냅다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기운 의자에 걸터앉아있던 효신은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한 아찔한 상황을 야기한 깜찍한 놈이 누구인가 뻑뻑한 눈을 들어 도끼눈을 떴다. 범인은 늘 현장에 있는 법. 역시나 입구에서 껄렁거리는 자세를 하고 있는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쑤셔오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느라 바로 누군지 알아채진 못했지만 효신은 저런 짓을 할 놈은 한 놈밖에 없다 여겨 눈을 뜨지도 않고 손으로 비비적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낮게 이름을 뱉어냈다.



“...최영도, 기물파손은 엄연한 범죄거든? 형법 제366조.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기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근데 넌 타인의 재물뿐만이 아니라 공공기관인 학교의 재물인 방송실 문을 파손했어. 이제야 좀 심각성이 보이냐?”

“이효신, 여기 최영도 없어?”

“...탄이? 너였어?”

“아, 어디 간 거야 이 새끼는.”




투덜거리는 조금은 맑은 소년의 목소리는 탄이 맞았다. 그제야 초점을 바르게 맞추고 문가를 바라보자 남색 후드 집업을 입고 뒤통수를 성의 없이 긁어대는 탄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최영도 일줄 알았는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점심시간이 15분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원래는 점심시간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귀신같이 나타나서 밥을 거르고 늘어지게 잠이나 자려는 저를 식당으로 끌고가던 녀석이 웬일로 늦게 오나 했는데. 평소에도 흔한 일이니 반성문 따위나 쓰고 있겠네 했었다. 




“-최영도를 왜 여기서 찾아?”

“아, 맨날 이효신 너랑 최영도랑 밥 먹는 거 다 알고 왔거든?”

“나 형, ...뭐 됐고, 나도 오늘 아침에밖에 못 봤는데?”




어? 놀란 듯 동그래진 눈이 효신을 살펴왔다. 내가 거짓말해서 어디에 쓰겠니. 하는 마음을 담아 어깨를 으쓱 얄밉게 들어 올리자 탄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최영도를, 왜.”

“아니 뭐, 은상이랑 걔랑 나랑 어이없게도 같은 조거든.”

“흐음, 안타깝게도 나도 오늘 한번밖에 못 봤다.”

“걔가 형 아니면 찾아갈 사람도 없는데.”

“오버하긴.”




어이없어 피식 웃는 효신을 보며 되레 더 어이없단 표정을 지은 탄이 성큼성큼 걸어와 효신이 팔을 기대고 있는 책상을 쿵쿵 두드렸다. 

철제 책상이 울려와 짜증스럽게 시선을 올리자 탄의 표정이 제법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진심은 아니지?”

“진심인데. 걔 친구 있잖아. 몰려다니는 애들.”

“그게 친구냐? 필요에 의한 관계지. 그리고 최영도가 정말 형을 친구라

여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형 눈치 빠른 거 알아.”

“-별로.”

“받아주지 않는 건 자유지만, 가지고 노는 건 안 되지.”




가지고 논다니. 불쾌한 문장에 절로 인상을 쓰자 탄이 피식 웃곤 효신의 구깃한 미간을 거칠게 문질러온다. 그리고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불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자 탄은 조금 곤란하게 웃었다.




“걔, 불쌍한 새끼야.”

“…….”

“그렇다고.”



어정쩡한 끝맺음과 함께 탄은 미련 없이 방송실을 떠났다. ...야, 문! 느릿하게 튀어나온 효신의 음성에는 잔뜩 힘이 빠져있어 천천히 느릿하게 공기 중으로 가라앉았다. 와서 잔뜩 이상한 말이나 하고 가는 탄에 괜한 싱숭생숭함이 들어 효신은 손가락에 쥐고 있던 인공눈물을 괜스레 책상에 집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를 수가 있나. 남들을 대할 때와 저를 대할 때의 최영도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는데, 그걸 모른다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핑계지.


효신은 며칠 전 점심시간에 역시나 찾아온 영도에게 처음으로 권했다. 학교 앞에 국수 잘하는데 있던데 오늘은 거기 갈래? -국수요? 내내 생글 거리던 얼굴이 짐짓 굳었다 싶더니 입 꼬리를 올려 웃는 최영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방울져 떨어질 것만 같은 슬픔에 가득 차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굳힌 효신을 보더니 금세 웃으며 어깨에 팔을 걸치며 조잘 거리는 최영도의 모습을 보며 금방 착각임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착각도 아니었나 싶어 효신은 답답해오는 가슴을 퍽, 두드렸다. 가지고 놀다니 누가.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인데.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만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이리 고생하지 않겠지. 기다린 건 최영도 뿐만은 아니란 거다. 효신이 덜컹, 의자가 밀리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다급하게 일으켰다. 




-



예비 종에 이어 울리는 수업 종에 영도의 주변에서 떠들어댄 놈들이 교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웬일로 네가 우리랑 밥을 먹냐? 토마토를 씹어 삼키며 한 놈이 말하자 시끌벅적 목소리가 잔뜩 겹쳐 울렸다. 묻지 말라는 듯 포크로 접시를 소리 나게 찍자 몸을 가볍게 움츠리더니 저들끼리 눈치한번 보고 실없는 소리로 화재를 돌려대는 놈들을 보며 영도는 멍하니 효신을 떠올렸었다.


이젠 습관처럼 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효신. 달그락 거리며 정리하는 주방의 소음을 배경삼아 영도가 느릿하게 허리를 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입맛이 없어 대부분이 그대로인 식판을 보기도 싫다는 듯 툭 친 영도가 또 떠오른 효신의 모습에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의 암전. 그리고 곧바로 컴컴한 눈꺼풀 안 세상은 폭죽이 퍼지듯 노란 불꽃이 툭툭 터졌다. 몽글 몽글 솟아나오기도 하고, 둥실둥실 떠다니기도 하는 노란 불꽃에 집중하니 최영도.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 돼.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에 노란 불꽃이 몽글몽글 모여 어떠한 실루엣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다부지긴 하지만 저보다 작은 키와 덩치,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바쁘게 교정을 걸어가는 이효신, 밥 먹자며 헤실 웃어 보이는 저에게 인상을 찌푸리는 이효신. 옷 똑바로 입으랬지 하며 제 복부에 주먹을 내지르던 그 – 아, 이건 좀 사랑스럽다. -. 제기랄, 실패다. 눈을 감으니 더욱 떠오르는 그의 모습이 싫어 입술을 잘근거리던 영도가 눈을 뜨자 밝은 빛이 차들었다. 



“하아.”

“한숨은. 어린놈이.”

“....?!”



덜컹, 환청인줄 알았더니 정말 이 사람이 저를 부른 거였나? 어느새 맞은편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저를 바라보는 이는 분명 이제껏 계속 생각하고 있던 그가 맞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헉헉거리지. 의아함에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영도는 식판 옆에 놓여있는 물 컵을 효신에게 내밀었다. 마시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효신에 어쩐지 민망해져 입 안댔어요. 하자 그거 때문 아니야. 슬쩍 타박해온다. 어젯밤에 강하게 결심하고 하루 종일 피해 다닌 것이 효신의 얼굴을 보자 단숨에 흐물거리며 녹아버리는 저가 웃겨 영도가 슬쩍 웃었다. 그 웃음은 물 컵에 손을 뻗던 효신이 방향을 틀어 영도의 손목을 쥐어오지 않았다면 분명 꽤나 오래 유지될 거였다.  



“...?!”

“내가 네 손을 이렇게 잡으면.”

“무, 뭘, 이렇게 갑작스럽게 스킨십 하고, 그, 그래요?”

“-떨려?”  “.....떨리게.”



푸하, 제 말과 묘하게 이어지는 영도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웃겨 효신이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종국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식탁에 이마까지 대고 끅끅 거리는 효신에게 웃지 말라며 화를 내려던 영도는 그 와중에도 제 손목을 놓지 않고 더욱 강하게 틀어쥐어오는 효신의 손바닥과 손가락 감촉에 말을 잊고 그저 달뜬 눈으로 둘의 접합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 좀, 웃,죠? 불퉁하게 터진 영도에 한 번 더 키킥, 어깨를 떤 효신이 갑자기 식탁과 맞붙어있던 이마를 뗐다. 


“-선배, 오늘 이상하네요? 내 앞에서 웃질 않나.”

“너 앞에서 웃는 게 이상한거야?”

“맨날 찌푸린 얼굴만 했으면서.”

“그래? 그럼 앞으로는 자주 웃어줄게.”

“...그게.”



-무슨 의미에요? 철없이도 떨려버린 말끝에 민망함이 차오르긴 했지만 영도는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


영도의 손목을 가만히 쥐고만 있던 효신이 입 꼬리를 슬슬 올리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영도가 이어지는 효신의 움직임에 기함해 몸을 들썩였다. 평소 가느다랗고 예쁘다고 생각해온 손가락이 제 투박한 손가락에 얽힌다는 건, 상상 그 이상의 감촉과, 기쁨을 넘어선 충격이라 영도가 입을 꾹 다문 순간 효신이 어깨를 으쓱, 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의미.”



참으로 인간은 단순하기 그지없지. 맞닿은 온기를 놓칠 새라 마치 엄마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영도가 다급히 반대쪽 손까지 들어 효신의 손을 다잡았다. 그리고 힘주어 쥐어오는 영도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한걸 느끼고 효신이 다시 한 번 웃자 그제야 영도도 한숨 섞인 미소를 흘릴 수 있었다. 





*



꽤 오래전에 영도효신 합작 참가했던 건데 이제야 올리다니 흡 제 건망증...

존잘님들 연성은 http://dearydhs.dothome.co.kr/  이쪽에서 보실수 있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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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치료입니다.

w. 박두부





사랑니, 아래위턱의 영구치열 치아 중 가장 안쪽에 나오는 세 번째 큰 어금니. 백기는 푸른 컴퓨터 화면에서 보여주는 사랑니의 정의를 읽다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눌러 그 창을 꺼버렸다. 위치는 지금 그딴 설명 없이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그딴 거 말고 제발 이 통증이 없어지는 방법 좀!


욱씬, 또다시 아릿한 통증이 백기의 어금니를 찔러왔다. 치통 따윈 생전 느낄 일 없을 꺼라 자부해왔던 건치의 상징 장백기였는데, -사실 건치인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미친 듯이 쑤셔오는 사랑니의 고통에 매일 밤 눈물 콧물 쏙 빼느라 백기는 요 며칠간 밤에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쓰으읍, 아파. 눈꼬리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않은 채 마우스 휠을 굴려 내려 네ㅇ버 건강백과로 들어갔다. 그래, 건강백과라면 내 아픔을 해소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은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백기는 어질어질한 눈을 한번 비볐다. 


‘...큰 어금니 중 세 번째 위치인 제3대구치를 말하는데 구강 내에 제일 늦게 나오는 치아이다. 보통 사춘기 이후 17~25세 무렵에 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는 이성(異性)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때며 특히, 새로 어금니가 날 때 마치 첫 사랑을 앓듯이 아프다고 하여 “사랑니”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또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시기에 나온다고 하여…….’



욱신! 아, 방금 이건. 진, 짜 아팠다. 바늘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뜨개질바늘같이 끝이 뭉뚝한 걸로 백기의 어금니를 사정없이 찔러오는 둔한 격통에 백기가 황급히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볼살이 밀려 입술이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눌렀음에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심해지는 치통에 기어이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맞닿은 어금니를 여러 번 꽉꽉 물어도 기존의 끔찍한 치통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딴 게 첫 사랑의 통증이라면 백기 저는 평생 첫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컴퓨터 전원을 끌힘조차 없어 대충 모니터 전원만 오프한 백기가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몸을 눕혔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이젠 한기까지 도는 몸을 다급히 두터운 이불로 감싸며 백기는 절로 나오는 앓는 소리를 참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비척거리며 들린 약국에서 무조건 잘 드는, 효과좋은 진통제를 달라며 울먹인 백기가 용법도, 용량조차 보지 않은 채 손에 잡히는 데로 씹어 삼켜낸 약은 이빨의 통증을 가라앉혀주기는커녕 빈 속을 자극해 구토감만 유발할 뿐이었다. 깨 있어봐야 고통에 괴로워 할 뿐이었다. 제발, 제발 잠들어 버리자. 억지로 눈을 꾹 눌러감았다. 속눈썹이 눈꺼풀에 눌려 잔뜩 구겨지는 것 같았지만 알 바가 아니고. 이불속에 잔뜩 웅크린 몸을 숨기며 백기가 이를 악물었다.



*



“백기씨, 얼굴이 완전 반쪽이네. 어이고, 볼도 팅팅 붓고.”


석율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과 말투가 탕비실에 울리자 영업 3팀의 커피를 젓던 그래마저 고개를 돌려 백기의 낯을 살폈다. 이제 막 탕비실에 한걸음 들어왔음에도 그 짧은 순간에 백기의 상태를 어찌나 빠르게 눈치 챈건지.

대답하려 입을 열기엔 찌르듯 이어지는 통증이 괴로워 백기는 볼이 패이도록 꽉 이만 악물며 대답을 피했다. 그래의 옆으로 다가와 커피믹스 한 봉지를 들자 옆에서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래가 손을 들어 백기의 믹스를 쥔 손을 막았다.

의아함에 눈만 돌려 바라보는 백기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긴 그래가 백기의 빈 종이컵을 가져가 찬물과 뜨거운 물을 섞어 적당한 온도의 미지근한 물을 만들더니 백기에게 내밀었다. 백기백기 괜찮아? 하며 어깨에 매달리려하던 석율조차 헬쓱한 얼굴로 그래에게 어떠한 말도 없이 물컵을 받아드는 백기의 처진 어깨가 영 신경쓰이는지 미간을 좁히다가 맞은편에 반듯하게 마주선다.


의아함에 물을 마시려던 손을 멈추고 석율을 바라보자 석율이 진지함을 담뿍 담은 눈을 하고선 양 손바닥으로 백기의 볼을 쥐어온다.


“아.”

“...에?”

“아, 해봐 백기씨.”

“지금 뭐하..”



백기가 인상을 쓰며 밀어내려하자 꾹, 볼을 눌러오는 석율의 손아귀 힘에 절로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을 고개를 숙여 꼼꼼히 살피는게 제법 진지해 백기는 성질 내려는 타이밍도 놓치고 어정쩡하게 석율에게 볼을 맡긴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마치 치과에서 어벙벙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


모종의 이유로 멈춘 해백 조각글입니당.

치과의사 강해준*환자 장백기

*5월 케이크 스퀘어에서 무료배포 했던 해준백기 배포본 웹공개입니다!

*가져가 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u///u*



*


서툰 아빠 둘 <장백기> 




“....나, 무서워서 못하겠어.”

“뭐어?”


미간을 찌푸린 서연이 고개를 잔뜩 숙여 폭신한 이불에 누워있는 제 아이만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다 한심한 말이나 뱉어내는 백기의 등짝을 힘 있게 내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욱신거리는 등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백기가 짜증 섞인 투정을 부렸다.


“아, 누나아! 애기 앞에서 때리지 좀 마!”

“너야말로 애기 앞에서 철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뭐.”

“애기 아빠가 돼서 무섭다고 애기를 못 안겠다는 게 말이나 되니?”


하지만, 내가 들었는데 아가가 싫다고 버둥거려서 떨어지면? 저렇게 작은 아기가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어! 누나 너무한 거 아니야? 그냥 안전하게 아가 눕혀놓거나 누나가 들거나 하면 되, 아얏! 아파아!! 


“기어이 한 대 더 맞아야지?”


짐짓 목소리를 깔고 무섭게 말을 꺼낸 서연의 모습에 입을 삐죽인 백기가 무릎을 내 꿇고 있느라 저려오는 허벅지를 툭툭 치며 다리를 펴 무릎을 가슴팍에 모으고 쭈그려 앉았다. 시선만은 아이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손을 어찌할 줄 모르던 백기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겨우 아이의 통통한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리곤 불에 덴 듯 후닥 떼어낸 백기가 서연을 달뜬 눈으로 바라보며 하는 소리라는 게 웃겨 서연은 헛웃음을 삼켜냈다. 정말 저게 아가지.


“...말, 말랑거려.”

“...그럼 딱딱하겠니?”


그러지 말고, 안아 보라니까? 백서 봐봐. 자기 아빠라구 손으로 자꾸 잡으려고 하잖아. 서연의 말에 아이를 내려다보자 그 말이 정말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이, 백서는 고 조그만 손을 오물오물 접었다 펴며 백기의 발가락 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여전히 망설이며 몸만 들썩거리던 백기를 보며 결국 서연이 아이를 들어올렸다. 아직 몸도 완전히 추스르기 전이라 얼굴도 몸도 붓기가 통통 올라있었지만 아이를 안아 올리는 모습이 너무나 경건해 백기는 가슴에 묘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내, 아내와. 내 아이. 아이의 뒷목을 감싸며 안정적으로 들어 올린 서연이 조금 칭얼거리며 손가락을 쪽 빨아대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랜 뒤 천천히 백기에게 아이를 건넸다. 뭐에 홀린 듯 천천히 접었던 무릎을 펴 서연과 마주보고 선 백기가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아이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어정쩡한 손놀림에 백서가 이잉, 투정을 부리며 몸을 뒤채자 화들짝 놀란 백기가 다시금 손을 떼려하자 서연이 단호하게, 하지만 천천히 방법을 일렀다.


“아직 백서는 목을 가누지 못하니까 약간 비스듬히 눕힌 것처럼 안아줘야 해. 응, 그렇게. 그리고 왼팔로 엉덩이를 살짝 받치고 오른팔로는 애기 등을 받치고, 응. 그리고 오른손 있지? 응, 거기로 아기 목을 감싸줘야 해.”

“....이, 이렇, 게?”

“응, 잘했네. 우리 남편.”


품에 안겨 여전히 손가락을 쭙쭙 빨고 있던 백서가 평소 안기던 품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백기를 바라봤다. 약간 눕힌 자세기에 아이의 시선과 백기가 맞닿았고, 잠시 동안 가만히 아빠를 바라보던 백서가 입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빼 백기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어? 아이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막 초보 육아백서를 통해 배워가던 백기가 예상치 못한 행동에 의지하든 서연을 바라봤다. 그러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나. 백서가 왜 그러지? 손을 왜 쭉 뻗었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서연에게서 조차 확실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주룩 흘러내릴 뻔한 아이의 몸을 다시 한 번 받쳐 안은 백기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의 손에 코를 가져가 비볐다. 그러자 헤죽, 웃음을 무는 아이의 얼굴에 가슴이 마구 뛰어 백기가 이번엔 입술을 올려 통통한 손바닥에 쪽, 쪽 몇 번이나 쪼듯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백서. 감격어린 표정으로 서연 쪽을 휙 바라보는 백기의 표정에 언뜻 자신감도 비치는 게 웃겨 서연이 웃음을 터뜨리곤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바닥 붓기도 여전해 조금 뒤뚱거리는 모양새였지만 작은 몸으로 백서를 건강하게 낳아준 서연이 사랑스러워 백기가 성큼 뒤따라가 서연의 볼에 입 맞췄다. 그에 웃음이 더 커진 서연이 분유 타올테니 백서 잘 안고 있으라 당부한 뒤 부엌으로 향했다. 단 둘이 있는 건 조금 걱정되는데. 긴장감에 아이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지만 손바닥만은 넓게 펴 아이의 뒷목과 머리를 단단히 받히고 있었다. 다리가 긴장감에 욱신거렸지만 차마 앉을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앉았다가 혹여나 아이가 불편해하면? 그리고 앉는 도중에 팔이 풀려서 아이가 뒤로 꽝 넘어간다면? 아찔한 상상에 괜히 떨려오는 몸을 털며 입술을 움직거리는 제 아이의 모습을 빤히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동그란 눈은 엄마 닮은 거 같고, 저 오물거리는 입술은 두꺼운 게 아빠인 저를 닮은 거 같고. 코는 좀 낮은걸 보니 엄마? 그렇게 아내와 제 모습을 골고루 빼닮은 아이의 얼굴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내내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던 백기를 보며 젖병을 든 서연이 다가왔다. 잘 섞였는지 젖병 바닥까지 꼼꼼히 확인하던 서연이 손을 뻗기에 아이를 넘겨주려하자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왜? 멍하니 묻자 서연이 반대쪽에서 아이를 단단히 받히고 백기를 이불 깔린 바닥에 앉혔다. 졸지에 주저앉게 된 백기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에 고개만 갸웃거리자 서연이 웃으며 젖병을 백기의 손에 건네주었다. 설마, 설, 마 아니지? 간절함을 담아 바라보는 백기의 기대를 와장창 깨트리듯 서연이 그대로 싱긋 웃어보였다.



“....누나, 아니 자기야. 나 진짜 이건 못하겠,”

“백서야~ 아빠가 먹여주는 맘마 먹고 싶지요~?”


아이가 뭘 알아듣겠냐구. 서연의 치사함에 혀를 내두르며 백기가 젖병을 받아들었다. 미지근하게 맞춰진 분유를 바라보다 입가에 가져가자 아이가 신나게 입에 물고 쪽쪽 맛있게도 빨아먹는다. 짧은 손을 움직거려 젖병을 감싸는 아이를 놀리듯 젖병을 뒤로 빼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입술을 삐죽이며 눈이 그렁그렁하기에 백기가 웃으며 다시 젖병을 물렸다. 쪽쪽, 잠시간 아이가 힘차게 우유를 빨아들이는 소리만 들리던 방에서 서연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깔린 이불에 천천히 몸을 뉘였다. 어느새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안쓰럽기만 하다.


“...괜찮아?”

“응, 괜찮아. 아기한테 미안하지. 엄마 젖도 못 먹으니까.”

“우리 아들은 씩씩해서 이해 할 거야.”


백기의 위로에 살포시 웃은 서연이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을 만하면 몰려오는 온 몸의 통증에 서연은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앓았다. 원인 모를 통증이라며 그저 진통제밖에 투여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서연은 그 처방을 거절했었다.“약을 먹으면 아이한테, 젖도 못 물리지 않나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문장이 있듯이 서연은 결국 속상한 얼굴을 하면서도 투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감내하며 버티기엔 뼈마디가 다 죄여오는 고통을 참기엔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서연한테는 퍽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 덕에 아이에게 모유를 먹일 수 없게 된 서연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백기도 마주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절망감이 많이 씻겨 내려간 것 같지만 여전히 아이가 우유를 먹을 때마다 바라보는 서연의 눈이 처연한 게 백기는 마음이 쓰였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고른 숨을 내쉬는 서연을 바라보던 백기가 갑자기 젖병이 밀리는 느낌에 아이를 바라봤다. 쭉쭉 힘차게도 빨더니 어느새 다 먹은 젖병을 혀를 이용해서 밀어내는 백서의 행동이 웃겨 웃음이 터졌다. 아이는 활력소란 말이 딱 맞는구나. 중얼거린 백기가 몸을 뒤척이며 움직이는 백서의 고개를 어깨에 얌전히 뉘이고 등을 토닥토닥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금방 그윽. 작은 트림을 한 아이가 쭈웁,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백기의 잠옷을 입에 넣어 질겅질겅 물고 빨았다. 황급히 아이의 허리를 잡고 떼어 낸 백기가 입가가 침으로 범벅된 상태로 입술을 오물거리는 백서를 바라보다 못 참겠다는 듯 쪽, 쪽! 맑은 소리를 내며 아이의 입술이며 볼, 콧잔등 눈두덩을 가리지 않고 마구 뽀뽀를 날렸다. 아이가 불편한지 칭얼거리며 손바닥으로 아빠의 얼굴을 밀어냈지만 백기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 한 구석이 안 예쁜 곳이 없고, 만지는 모든 곳마다 포근한 향이 나고, 따끈한 몸은 안고 있으면 어느새 잠이 솔솔 와버리는 아이. 내 아이.

그리고 늘 백기의 곁에 있어주는 아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게 이리도 만족감을 주는 거였는지 백기는 결혼을 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서연의 옆자리에 아이를 조심스레 눕히고, 엄마 쪽으로 돌아누워 손을 버둥거리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백기도 아이의 옆에 누웠다. 포근한 햇빛을 받아 공기가 반짝이고, 백기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서툰 아빠 둘 <강해준>



해준의 아내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어디 유명한 곳에서 모델 일을 했다는 듯도 싶었지만 사실 해준은 그쪽은 문외한이었기에 그저 가끔씩 모이는 가족모임에서 아내의 친구들이 신나게 나서서 하는 이야기를 듣곤 그렇구나. 하고 생각한 게 전부였다. 부모님이 내민 선 자리에 나가서 가장 대화가 통하는 여성과 몇 번의 만남 끝에 결혼. 프러포즈랄 것도 없이 그저 물 흐르듯 진행 된 상견례와 결혼식 준비 끝에 가정을 차리긴 했지만 해준은 역시나 무심한 사람이었다. 다행인건 해준의 부인도 그에게 어떠한 애정표현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반듯한 남자와 결혼하는 게 꿈이었던 그녀로서는 해준과의 결혼에서 이미 그 목적을 다 이룬 셈이었으니 그녀는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급격히 태도가 달라지는 해준의 모습이 낯설고, 짜증도 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강해준이 눈앞에서 핑크와 노란 방울이 달려있는 딸랑이를 진지하게 흔들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지 않았으니까. 


“-당신, 모습 좀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녀는 해준의 모습을 지적했지만 돌아오는 건 되레 뭐가 문제냐는 듯 흘끗 시선을 주다가 금방 다연에게 집중해 딸랑이를 흔드는 해준의 낯선 모습이었다. 옆에 누운 엄마는 보이지도 않는지 다연 또한 제 아빠가 흔드는 딸랑이를 눈으로 쫒으며 방실 방실 웃으니 아주 부녀만 다른 세계에 있는 양 핑크빛 분위기였다. 아니 어쩌면 채원 저만 별세계에 있는지도 몰랐다. 


임신 중에 몸이 무거워 끙끙거리며 돌아다닐 때도 그 흔한 부축한번 없는 남자였다. 밤중에 깨워서 나 신거 먹고 싶어. 같은 말 또한 바랄 수 없었고. 아이를 낳는 날 조차 야근을 마치고 11시가 가까운 시간에 병원에 찾은 이였으니 말 다했지.


처음 채원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저 채원을 보고 무뚝뚝하게 고생했습니다. 하곤 아이를 품에 안아보지도 않던 이 길래 서운함이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런 남자임을 알고 있었으니 참았다. 그래 참았었는데. 그 다음날부터 시작된 해준의 이상행동을 떠올리며 채원은 몸을 떨었다. 


회사에 있을 시간이 분명했다. 오후 2시였으니까 점심식사 후 한참 일에 빠져 있어야할 해준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채원은 부은 몸에 피곤한 눈을 비비며 누워 있다가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으니까. 채원의 놀란 얼굴을 본 해준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로 반차 냈습니다. 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분명 갑작스런 해준의 방문에 놀란 것도 있지만 채원의 눈을 의심했던 건 해준의 한손에 안겨있는 아이의 모습 때문이었다. 흰 이불에 감싸여서 얼굴만 빼꼼 드러난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제 아빠의 품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어제 채원이 서툴게 안자 잠에서 깨 울음을 터뜨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평온한 모습이었다. 사실 해준의 안는 자세가 참으로 능숙한 것도 원인이었다. 


“....어제는, 별다른 반응도 없었으면서.”

“하지만 회사에서 담배연기도 분명 배어왔을 지저분한 옷으로 어떻게 아이를 안습니까.”


그 단호한 반응과 함께 시작된 해준의 통칭 딸 바보짓은 정말 예상을 뛰어넘었다. 야근을 만들어서 하고 오는 것 같았던 해준의 늦은 퇴근시간은 확 줄어들어 정말 칼같이 6시에 회사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 도착할 수 없을 시간에 늘 집 도어락을 열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늘 손에 달랑거리며 가져오는 아이 물품들은 이제 한편에 쌓이다 못해 해준이 직접 가구시장에 가서 새로 구매한 다연의 옷장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딸랑이는 별로인가 보네요.”


채원을 상념 속에서 끌어들인 건 해준의 묘하게 쳐진 목소리였다. 딸랑이를 흔들면 눈으로 따르고,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던 다연이 벌써 흥미가 떨어졌는지 제 손만 꼬물꼬물 입에 물어 빨고 있으니 꽤나 실망한 모양이었다. 위로의 말을 던져야 하나 고민하던 채원이 입을 떼기도 전에 해준은 벌떡 일어나 제 서류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슬라이드 클립으로 단정하게 정리되어있는 서류뭉치들부터 볼펜 등을 분주하게 꺼내며 무언가를 찾아낸 해준의 손에 들린 건 모빌이었다. 보송보송한 코튼 소재로 만들어진 스토리 모빌. 오리모양, 아이스크림에 곰돌이 모양까지 아기자기한 작은 인형과 함께 영롱한 소리를 내는 방울까지 달린 모빌.


“또 샀어요?”

“모빌은 없지 않았습니까. 집중력도 길러주고 관찰력도 좋아 진다네요.”

“아직 깨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더 많은 아이잖아요.”

“그래도 달아놓으면 다연이가 좋아할 겁니다.”


고집도 이런 고집이 없다. 아이 침대로 다가가 천장에 능숙하게 매단 해준이 높이를 안정적으로 조절한 뒤 토끼인형을 흔들며 다연의 눈길을 끌었다. 


“다연아~ 이거 봐요. 토끼네?”


그에 확실히 아이가 마음이 동하긴 하는지 손을 하늘 위로 뻗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아부, 작게 옹알거린 아이의 목소리에 갑자기 고개를 채원 쪽으로 돌린 해준의 표정에 뿌듯함이 가득 차있었다. 드물게 반짝이는 눈을 하곤 뱉는 말이란 게.


“지금 아빠라고 한 거들었습니까?”

“....해준씨, 다연이 아직 옹알이도 제대로 안 터졌을 시기에요…….”

“아닙니다. 분명히 아빠라고 했어요. 보통의 잣대가 모든 아이에게 적용되진 않지 않습니까. 분명 다연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빠릅니다.”


단호한 말을 마치고 해준은 이번에 방울을 손가락으로 쳐 맑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벌써부터 우리아이가 천재인가 봐. 하는 해준을 어찌해야할까 골이 아파오는 듯도 싶지만 결혼 후 몇 번 본적 없던 해준의 미소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게 퍽 좋아 채원은 그저 해맑게 웃는 부녀를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


엄마가 허리를 받쳐주는 손에 겨우 두발을 땅에 붙여 서있던 다연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주앉아 저를 향해 짝짝 박수를 치는 아빠를 바라봤다. 아이의 얼굴에도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있어 해준은 진지한 분위기와 다르게 치밀어 오를 뻔한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딸이 엄마를 닮아 앙칼진 부분이 있어 또 금방 눈치를 채고 아빠에게 투정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다시 한 번 해보자 다연아. 엄마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아이를 단단히 잡고 있던 손을 떼자 잠시 휘청하더니 이내 다리에 힘을 주어 제자리에 곧게 서는데 성공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아이를 안아서 칭찬의 말을 쏟아주고 싶었지만 아직 이다 싶어 채원도 해준도 입을 닫고 그저 아이를 격려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다연아. 아빠한테 와볼까?”

“우, 웅.”


망설이는가 싶던 아이는 제 앞에서 팔을 벌리고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아빠를 보며 통통한 다리를 한걸음 뗐다. 한걸음 떼자 반대편 걸음이. 그렇게 조금은 빠른 속도로 두어 발자국 걷던 다연의 몸이 휘청하는 순간 해준이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제 품에 깊이 안아 올렸다. 아이의 볼을 어깨에 편히 기대게 한 뒤 꽉 안자 아이가 꺄륵 웃으며 해준의 등을 작은 손으로 꼼지락 매만져왔다. 


포근한 온기에 말랑거리는 아이의 몸. 이제 막 첫 걸음을 뗀 아이. 결혼이고 아이고 모두 귀찮다고 밀어내던 예전의 제가 봤다면 지금 해준의 모습을 비웃었을 테지만 해준은 아무래도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저를 반겨주는 부인과 아이. 열심히 그 작은 몸으로 온전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이를 보며 해준은 처음으로 아이를 사랑스럽다 여겼다. 품에 얌전히 안겨 해준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치는 아이 덕에 해준은 넘실거리는 감정을 어찌 주체해야 할지 몰라 입 꼬리를 이상하게 일그러뜨렸다. 


그 묘한 입꼬리를 보며 채원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해준이 아이의 등을 천천히 일정하게 도닥였다.  




*

@etc_tofu 


연재중인 해준백기 소설 [우리 아빠 둘]의 외전격 내용입니다.



 

석율백기 (for.가비님)

                       w. 박두부






장백기씨, 곧 강대리도 따라잡겠는걸?”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뒤따른 칭찬은 백기의 귓가를 붉게 물들였다. , 아닙니다. 말로는 부정하면서도 입 꼬리가 씰룩거리는 백기를 모르지 않는 차과장이 어깨를 토닥이고 제 자리로 돌아가자 백기는 고개를 숙여 자꾸만 치솟으려는 웃음을 입술을 물어 참아냈다.

 


수고 많았어요, 백기씨.”

“....대리님, 덕분입니다.”

 


그러한 노력마저도 해준의 칭찬 앞에서는 모조리 헛수고였는지 백기가 뿌듯하게 차오르는 가슴의 만족감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눈을 맞추며 퍽 다정하게 말한 해준을 보며 결국 백기는 모조리 무장해제. 톡 튀어나온 앞니까지 보이며 밝게 웃음을 터뜨린 백기의 모습에 잠깐 해준의 몸이 멈칫한 찰나 백기의 어깨를 다부진 손이 감싸 안아 왔다. 놀라 등허리를 떤 백기를 토닥이던 손길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기실적 예상대비 150% 달성하신 우리 백기씨!”

석율...! 아니, 한석율씨!”


 

저도 모르게 둘만의 다정한 호칭을 뱉을 뻔 한 백기가 애써 삼켜내고, 평소처럼 무뚝뚝한 가면을 쓴다. 석율과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대리님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행동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닌지라 백기가 석율의 눈치를 보자 그를 다 이해한다는 듯 다정하게 눈을 맞춘 뒤 웃으며 팔뚝을 가볍게 쓸어내리곤 몸을 떼어 냈다. 온기가 멀어지는 게 아쉬워 백기의 표정에 아쉬움이 떠오르자 석율이 남몰래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다. 한석율 수제 커피 대접할게요. 갑시다! 들뜬 목소리로 쾌활하게 말한 석율이 동의를 구하듯 해준을 빤히 쳐다보자 별다른 반응 없이 모니터로 고개를 돌린다. 해준의 눈치를 보는 백기의 손목을 틀어잡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는 석율의 뒷머리를 바라보며 쫒아가다 삐쭉 튀어나온 옆머리에 백기의 웃음이 터진다. 탕비실에 들어와 백기 몫의 믹스를 뜯는 석율을 가만 바라보던 백기가 웃음을 채 갈무리 하지 못하고 손을 뻗어 석율의 삐죽 솟은 옆머리를 꾹꾹 눌러 가라앉혔다. 주변과 모양을 얼추 맞춘 옆머리에 만족감에 웃던 것도 잠시. 놀란 듯 눈이 서서히 커지긴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 없이 입 꼬리만 올린 석율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입술을 꾹 눌렀다 멀어진다.

 


“...석율씨! , 여기 회사,”

그렇게 이쁜 짓 하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백기씨, 그거 너무한 거다?”

누가 보면 어떡합니까…….”

그럼 그땐 공표하는 거지.”

 


백기씨가 내거란 걸. 느릿한 숨과 함께 섞여 나온 말에 흥분감이 솟구쳐 등골이 절로 오싹해진 백기가 황급히 손바닥에 손톱을 눌러 찍었다.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믹스 봉지로 휘휘 저은 석율이 백기에게 종이컵을 내밀자 입을 조금 내민 백기가 툴툴 거렸다.

 


공표하면요. 우린 회사 잘리구?”

설마 이 한석율이 우리 백기 하나 못 먹여 살리겠어?”

.”

 


코웃음 지으면서도 석율의 대답이 퍽 만족스러운지 괜스레 커피머신 버튼을 누른 뒤 손장난을 툭툭 하고 있던 석율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슬슬 긁곤 떨어진다. 이런 은근한 애교를 부릴 때면 석율은 백기가 닿았다 떨어진 손등뿐만 아니라 배 아래쪽까지 근질근질해지는 느낌이 들어 쭈삣 솟아오르는 등골에 꽤나 당황스러웠다. 저가 얼마나 대담한 짓을 한 건지 모르고 평온한 얼굴로 커피나 마시는 저 사랑스런 이를 어찌해야할까. 당장이라도 말랑한 볼을 감싸 안고 입을 맞춰버리고 싶었지만 석율은 참기로 했다. 이곳에서의 위태로운 여흥보다 차후의 깊고 진득한 접촉을 위해 조금은 참을 수 있었으니까.


아무 말 없이 서있는 저가 이상했는지 안경너머의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저를 살피는 백기의 허리에 느릿하게 손을 감았다.목을 잔뜩 움츠리더니 두리번 사람이 없나 살피느라 분주한 백기의 목덜미에 살짝 입술을 내린 석율이 뱉은 은근한 목소리에 귓가가 빨갛게 달아오른 백기가 괜히 손부채질만 부산하게 해댔다.

 

오늘밤은 우리 집으로 퇴근하는 거야. ?”

 


*


 

흰 피부가 제가 내리는 입맞춤과 손길로 예쁜 붉은 빛으로 물드는 건 석율에게 생각보다 더한 자극과 만족감을 가져왔다. 기어이 마지막엔 눈물을 터뜨린 백기가 여전히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단 채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자 석율은 젖은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백기의 붉은 얼굴을 쓸었다.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온 이마며 눈 옆,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을 느릿하게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던 석율이 갑자기 울리는 백기의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은 거칠 정도로 잡아챈 핸드폰 액정이 깜빡이자 자연스레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른 석율의 눈에 메시지 화면이 가득 찼다. 강해준 대리님. 여섯 자의 짧은 글자가 주는 불쾌함이 이리도 엄청날 줄이야. 절로 힘이 들어가는 손에 핸드폰 케이스가 삐걱 이는 소리를 내며 떨렸다. 망설임 없이 눌러 내용을 확인한 석율의 표정이 차게 식어갔다. 짓씹은 이가 아프다며 비명을 질러대는 듯 했지만 상관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백기의 핸드폰을 저 멀리 던져버렸을 테니까. 이 시간에 개인적으로 문자를 하는 걸로도 모자라 괜한 참견이나 지껄이다니.


석율은 한참이나 핸드폰액정을 노려보다 옆에 누워있는 백기의 말간 얼굴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롱도롱 숨소리를 내며 편안하게 자고 있는 백기의 모습에 불쑥 솟았던 화가 차츰 가라앉는 걸 보니 이것도 참 병이다 싶었다. 장백기만 연관되면 하루에도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회사에서 강대리를 향해 웃고 있던 백기의 모습에 뒷목까지 뻣뻣해졌던 오전을 생각하며 석율이 씁쓸하게 웃곤 몸을 일으켰다. 새벽녘의 공기가 서늘해 잠시 몸을 떨던 석율이 화장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가만히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보그륵, 소리를 내며 흰 거품과 함께 고이는 뜨거운 물에선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찰랑찰랑 세면대를 넘치기 직전 수도꼭지를 잠근 석율이 백기의 핸드폰을 망설임 없이 물에 집어넣었다. 몇 번이나 깜박거리던 액정에 불빛이 나가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지길 기다리며 석율이 마른 욕조에 걸터앉아 여유 있게 휘파람을 불었다. 내일 아침 석율을 향해 원망어린 소리를 할 백기를 어찌 달래야하나 머리를 굴리는 순간 깜빡이던 액정이 암전됐다. 푸핫, 그에 진심으로 즐거운 웃음이 석율에게서 터졌다




*


가비님 이벤트 보상글입니다! 백기에게만 다정한 사이코패스 석율이와 아무것도 모르는 백기 리퀘하셨는데

결과물..ㅎ..ㅎㅎ...ㅜㅜㅜ

*커플요소 적습니다.



[해준백기] 장난도 정도껏

            w. 박두부


 

어둠을 무서워하는 게 그리 흔치않은 것은 아니다.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갈 때면 건장한 성인 남자더라도 괜스레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라 몸을 떨고, 고개를 도리질 치며 걸음을 재촉하는 일은 그를 숨길 뿐이지 웬만한 사내들이 한번 이상, 아니 어쩌면 매일 밤 겪을 일일 터였다. 백기도 사내였다. 건장하지만 심약한.


백기쒸는, 겁도 많지~! 라며 자꾸만 비죽이던 퇴근길의 한석율의 반질한 얼굴이 생각나 또다시 주먹을 살포시 쥐어봤지만 이내 포기했다. 캄캄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원룸촌의 골목길에서 건장하고 반듯하게 생긴 청년이 씨익 식, 숨을 몰아쉬다가 미간을 좁혔다가 주먹까지 쥐고 걷는다면 누가 봐도 수상하다 여길게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좁은 골목사이로 골바람이 들어차 공기 중에 드러난 목덜미가 시렸다. 다행히 목깃을 세울 수 있는 모직코트기에 기쁜 마음으로 조물조물 깃을 세워 목을 감쌌다. 훨씬 나아진 온기에 기분조차 따끈하게 풀리려던 차에 바삭, 하고 무언가에 긁히는 소리가 백기의 귓전을 때렸다. 그대로 정지.


귓가에 상황과도 어울리지 않는 그대로 멈춰라~! 하는 깜찍한 동요가 들려오는 듯 했지만 파르르 떨려오는 백기의 등골이며 심장에는 그 깜찍함이 도무지 닿기는 그른 모양이었다. 깜빡,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백기는 그 짧은 찰나에도 뒤를 돌아봐서 별것이 아니란 걸 확인을 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란 걸 굳게 믿고 앞으로 돌진하듯 나아가야할까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도무지 굳은 고개며 다리는 움직일 생각을 않았기에 백기는 민감한 오감 중 백기 저가 가장 믿는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기로 홀로 타협했다. 귓가가 아주 미묘하게 움찔 떨리는 동안 찬바람이 한 번 더 백기를 스쳐갔지만 식은땀을 적셔주기에 딱 적당할 정도의 바람으로밖에는 인지되지 못하고 파스스 사라져갔다


잠시간 더 집중했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백기가 이내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 놀랐다 정말.

 


그리고 저를 평소보다 더 움츠러들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영이를 떠올리며 뿌득 이를 갈았다. 오늘은 동기모임을 좀 색다르게 해볼까요? 평소엔 초대하면 초대한대로 그곳이 어디든 조용히 참석하던 영이가 던진 뜻밖의 말에 백기와 석율, 그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거렸다.


해맑게 웃으며 그럼 갈까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할 때 의심했어야했는데. 졸래졸래 영이를 따라간 사내 세 명을 경직시킨 건 고작 손을 간신히 덮을 만큼 작은 영화표였다. 그래 영화 좋지. 문화생활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데,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안영이씨.


심지어 덤덤한 표정이 주특기인 그래 조차 입 꼬리를 씰룩거렸으니 뭐 말 다했다. 그 자리에서 새하얗게 질려버린 백기가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돌려 어느새 저에게 팔짱을 끼고 매달린 석율을 쳐다보자 석율은 이미 입술이 하도 깨물어서 엉망진창이었다.

 


“...안영이씨, 이건 아닌 거 같,”

“3관 영화 시작합니다. 입장해주세요!”

시작한다는데, 가죠.”

아니, 안영이, 영이야.”

안영이씨...!”


 

먼저 뚜벅뚜벅 단화굽 소리를 울리며 걸어간 뒤 3관 앞에서 세 명을 가만히 쳐다봐오는 영이의 눈빛이 너무도 단호해 세 명은 어느새 맞잡은 서로의 손을 동아줄 삼아 슬금슬금 영화관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암전. 영화를 보기 위해서 불이 꺼진 암전 상황 뒤에 찾아온 세 남자의 깜깜한 앞날.


눈을 감고 간신히 서로의 팔뚝이며 팔 받침대를 핏줄이 설 정도로 꾹 붙잡는 방법을 이용해 견디던 찰나 뚝, 소름끼치게 울려대던 소리가 멈췄다.

 


신이시여.

인간은 대체 왜 호기심이 있는 겁니까? 신께라도 묻고 싶었다. 빌어먹을 호기심이 찾아든 백기와 석율, 그래는 조용해진 귓가에 궁금증이 차올라 슬쩍 눈을 떴고, 그들 눈에 가득 차온건 붉은 색. 새빨간……. 끄아아악!!! 먼저 앙칼진 석율의 높은 비명이 영화관을 채우고, 연쇄작용처럼 그래의 입에서 펑, 백기의 입에서 펑! 높은 비명이 차올랐을 때 분명 저들을 돌아보는 영이의 표정은 지독하리만치 평온했다. 그래, 그것이 제일 공포였다고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석율이 백기와 그래에게 속삭였다. 그들도 동의했고.

 


자기가 제일 크게 놀라놓고는 나오자마자 자기방어를 펼치듯 백기의 겁 많은 모습을 향해 비죽이는 미소를 짓던 석율에 백기는 오랜만에 사람의 면전에 대고 욕설을 퍼부을 뻔 했었다.

 


 

우리 출출한데 선지해장국이나 먹으러 갈까요?”

아니오.”

아닙니다.”

배불러요.”


 

영이의 나긋한 목소리는 말끝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세 명의 사내에 의해 단칼에 끊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맑게 웃는 영이의 모습에 어깨를 움츠린 백기가 먼저 귀가신청을 했다. 말 그대로 귀가신청.


, 바쁜, 일이 있어서, 돌아가겠습니다. 항의하듯 백기의 옷소매를 잡아채려는 석율과 그래를 다급히 밀어낸 백기가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뒤에서 그럼 우리끼리라도 가죠. 하는 영이의 목소리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지 백기의 등 언저리가 따끔따끔 울려왔다. 사내는 뒤돌아보지 않아! 백기는 모 사나이 영화를 떠올리며 잰걸음을 마저 재촉했다.

 

 


*

 


-그냥, 저도. 같이 갈걸 그랬습니다. 내일 어차피 주말인데 텅 빈 집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먼저 귀가했는지. 백기는 다시 생각나는 영화와 영이의 모습에 어깨를 잔뜩 좁히곤 다시 걸음을 뗐다. 이제 저 골목 모퉁이에서 왼쪽으로만 걸으면 백기의 방이었다. 역시 다음에는 조금 무리하더라도 이런 골목길에 위치한 곳 말고 널찍한 도로가에 있는 오피스텔을 얻어야하나. 머릿속으로 제 통장 잔고를 새며 걸음을 걷던 백기가 갑자기 어깨에 툭, 오른 뜨거운 온기에 힉, 하는 작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꽝 찍힌 엉덩이의 아픔 따윈 중요치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와중에도 도망가려 자꾸만 어깨를 털고 다리를 움직이는 백기는 패닉이 왔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시만요, 장백기씨. 장백기씨!”

“....”

 


공포심에 먹먹했던 귓가에 단숨에 주위의 소리가 들어찼다. 그 덕에 욱신거려오는 귀를 매만지려 올리는 손길을 누가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장백기씨, 놀랐습니까?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 강대리님!”

그냥 내일은 휴일이니까 백기씨 집에서 술 한 잔 하려고 왔는데 앞에 백기씨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그냥 조금만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

많이 놀랐습니까...?”


 

, 엄청요. 이미 풀려버린 다리는 아무리 힘을 줘도 꼴사납게 흐느적거렸다. 백기가 민망함과 속상함, 짜증이 섞인 투정의 주먹을 해준의 가슴팍에 슬쩍 내렸지만 해준은 아이 어르듯 달래며 백기를 부축해 단번에 들어올렸다. 제 심장을 아주 떨어뜨려버릴 뻔 하셔놓고 미안하다며 평소엔 그리 부탁해도 해주지도 않던 미소까지 담뿍 서비스하신다. , 어이없음에 웃다가 그래도 집까지 무섭지 않게 가겠구나 싶어 제 어깨를 단단히 받쳐오는 해준의 허리에 손을 감고 고개를 푹 기댔다. 완전히 환자를 부축하는 모양새일게 뻔해 스스로도 웃겼지만 백기는 그저 더욱더 해준의 품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


 

그러니까아! 공포영화 때문이라고요, 공포영화!”

네네, 알죠.”

거기에 강대리님도 너무하셨습니다! 누구라도 놀랄걸요?”

그럼요. 이해합니다.”

아주,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제 겨우 올라오고 있습니다! ...웃지마세요!”

, 흠흠. 안 웃어요.”

거짓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자 백기가 선택한 것은 약간의 알콜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병 주고 약 주듯 백기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해준이 불쑥 내민 것은 맥주 캔이었다. ...이런 걸로 용서할 생각 없습니다. 하면서도 샐쭉 받아드는 백기에 해준은 내심 안심했다. 기껏 불타는 주말을 즐기고자 백기의 집에 찾아왔는데 분노에 찬 백기가 거절의 말을 쏟아낼까 내심 걱정했던 심장을 쓸어내리며 해준이 백기의 손에 들린 맥주 캔에 슬쩍 건배했다.

 



*

15.04.25 미생전력 제 17

주제: 아래의 사진


 

 

 


케스에 나오는 해준백기 꾸금소설 구두예약&통판신청 받고있습니다!


~5/5일(화) 까지 받고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현장판매로 구매하실 수 있고 (특전 엽서는 제외) 

재고가 남으면 7월에 열리는 백른전에 가져갈 생각이어서 행사 후에 2차 통판 계획은 없습니다~! 




*표지

사양: 40페이지/ 4500원/ 중철제본/ 휘라레지/ R19 성인본입니다.

현재 구두예약 * 통판 예약 받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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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 http://etctofu.tistory.com/12



*특전 엽서




구두예약과 통판 신청 해주신 분들께 제공되는 엽서입니다! 



[해준백기] 자재실은 (체리쨔마 달성표 보상)

                                           w. 박두부




규격에 안 맞는 자재들이 다 섞여 있잖아요. 내가 말했을 텐데. 이러면 급할 때 어떻게 찾아 쓸 수 있겠습니까?

 

찬바람만 가득 남기고 떠난 해준의 뒷모습에 몸을 떤 백기가 닫힌 문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역시나 저가 틀렸던 걸까.평소에도 종종 듣던 말이지만 그날따라 묘하게 가슴을 울렸던 해준의 내일 봅시다. 한마디에 백기는 헤드헌터에게 전화를 걸어 면접을 취소했다.

아니 물론, 그 내일 봅시다. 다섯 글자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그 문장이 백기의 가슴을 강하게 쳐 올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회사에 남기로 마음 먹은 지 아직 24시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금 스멀스멀 차오르는 퇴사 욕구를 발끝 언저리 즈음으로 간신히 밀어 눌렀다.

하아, 한숨을 쉬며 무릎을 굽혀 앉은 백기가 철강 샘플을 크기에 맞게 분류하려 손을 뻗었다. 그러다 손가락에 자재들이 서늘하게 달라붙어오는 느낌에 황급히 손을 빼냈다. 겨울의 서늘함에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건 비단 공기뿐만이 아니었나보다. 혹여나 철에 변형이 일어날까 평소에도 조금 서늘하게 유지되긴 하지만 겨울이란 걸 간과했던 백기의 손가락이 얼음장 같은 자재에 닿아 후끈 울렸다. 목장갑을 꼈어야 했는데. 그제야 노란색 바구니에 걸쳐있는 손바닥 부분이 오돌토돌한 장갑이 눈에 들어온다. 후우, 되는 게 없구나. 심란함에 고개를 한번 주억 한 백기가 뒤늦게나마 장갑을 끼려 손을 뻗은 순간 문이 열리고 해준이 들어섰다.

 


“-장백기씨, ...왜 그럽니까?”

, .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장갑만 끼...”

장갑 꼭 껴야합니다. 이 시기엔 차가워서 손이 붙으면 피부가 벗겨질 수..., 손 줘봐요.”

“....?”

손 줘보라니까.”


 

성큼 한걸음 만에 다가온 해준이 백기의 양 손을 쥐어 꼼꼼히 살핀다. 조금 좁았던 미간이 백기의 손가락 피부가 벗겨져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 깊은 주름을 만들어냈다. 그에 괜스레 난감해진 백기가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려 해도 더욱 단단히 죄여오는 해준의 손아귀 힘을 이기기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그렇다고 억지로 밀어낼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백기의 눈이 해준의 목덜미 언저리 즈음을 헤매다 바닥에, 그리고 다시 잡혀있는 손목 즈음에 박혔다. 살이 벗겨진 건 손가락인데 어찌 더 화끈거려오는 건 손목인지.

 


“..., 대리님. 별로 안 아픈데요.”

아픈 게 문제입니까? 살갗이 벗겨졌잖아요.”

, …….”

이렇게 미련하게 굴 겁니까?”

 


다친 건 백기 저인데 어찌 이리도 예민하게 굴어오는 건지. 뽀얀 이마에 불쑥 솟으려던 힘줄을 애써 가라앉힌 백기가 딱딱한 음성과 함께 해준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비틀어 꺼냈다.

 


“...대리님이 신경 쓰실 거, 아니지 않습니까.”

 


뱉어놓고 금방 후회하긴 했지만, 해준의 굳은 표정에 실언했다 인정하기도 애매한 분위기가 되었다. -으 서늘해. 아까까진 별달리 추위가 느껴지진 않았는데 해준의 눈빛 탓인지, 저의 실수에 삐죽 등허리 쪽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탓인지 백기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해준의 날선 눈빛이 조금 풀리고, 그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팽팽하게 조이던 긴장감이 풀린 게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자 해준이 백기를 가만히 쳐다봐온다.

 


“-알겠으니까, 치료라도 하고 와요. 정리는 그 후에 하고.”

“....”

 

얼떨떨하게 대답한 백기의 긍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별다른 말없이 돌아선 해준의 등이 묘하게 처진 듯 보여 백기의 가슴이 쿡쿡 찔려왔다.

 


*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차가운 금속 표면에 겉피부가 완전히 붙어 뜯어진 거라며 상처부위에 붕대까지 칭칭 감은 백기가 어색함에 목을 북북 긁었다. 의무실에서 15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마주친 상사며 동기들의 웬 붕대냐는 걱정스런 물음에 별거 아니라 손을 붕붕 저은 백기가, 방금까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끈질기게 어디 다친 거냐며 찡찡거리던 석율을 간신히 16층으로 올려 보내곤 난감함에 머리를 털었다. -그냥 밴드 붙이면 되는데. 낯간지러운 관심에 스멀스멀 기분이 좋기도 하다가 민망하기도 해 애꿎은 붕대부근만 손톱으로 북북 긁었다.

 

제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자켓을 건 백기가 힐긋 해준의 자리를 봤지만 단정하게 책상에 밀려들어가 있는 의자만 보일 뿐이었다. 어디 가셨지. 아까 전 저를 걱정해준 게 분명한 해준에게 날카로운 말을 뱉은 게 영 걸려서 얼른 치료 받고 왔다는 걸 보이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해준의 책상 쪽을 바라보며 기웃거리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장백기씨, 왜요.”

“! 아 강대리님.”

무슨 할 말 있습니까?”

, …….아닙,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우습긴 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붕대감긴 손가락을 내밀고, 강대리님 말씀대로 치료했어요. 잘했죠? 할 것도 아니었는데. 민망함에 손가락을 등 뒤로 숨긴 백기가 헤죽, 앞니가 톡 튀어나오는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해준의 몸이 움칫 떨린 것 같았지만 찰나의 순간이라 백기는 확신이 서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럼. 전 마저 자재실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성큼성큼 제법 씩씩하게 걸어가는 백기의 등이며 허리, 동그란 뒤통수를 쭉 훑어보던 해준이 하, 막힌 숨을 터뜨렸다.

 


*

 


이제는 착실하게 낀 목장갑을 손목까지 단단히 끌어올린 백기가 널려있는 노란 바구니들과 샘플들을 보곤 팡, 손바닥을 맞붙여 울렸다. 으쌰, 열심히 하면 한 시간이면 끝나겠지. 단단히 결심한 입매가 곧았다.


규격에 맞는 파이프끼리 차곡차곡 겹쳐 쌓고, 비닐이 뜯겨 한두 개가 빈 탓에 덜렁거리는 자재들은 포장 비닐을 버리고 바구니 바닥부터 줄을 세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 방은 잘 치우지 않는 백기는 묘한 편집증적인 성향이 있었다. 줄 맞추고, 똑바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거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달까. 여러 번 묵직한 자재들을 들고 높은 선반에 쌓느라 허리가 울려와도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가는 자재실에 뿌듯한 마음이 들어찼다.

 

이제 바닥엔 두어 개의 파이프 뭉치만 놓여있었다. 흐뭇하게 비닐을 뜯어 정리하는 백기의 귓가로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놀라 어깨가 팔짝 뛰자마자 철컥하며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가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보이는 해준의 모습에 백기가 벌떡 일어나 어정쩡하게 선 자세로 고개를 꾸벅였다.

 


“...강대리님?”

다 끝나갑니까?”

, . 금방 끝납니다.”

그래요.”


 

...? 그게 끝인가? 별다른 말없이 백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는 해준에 어찌해야할지 허리를 굽혔다 폈다 어색하게 몸을 움직인 백기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해준에 결국 쭈뼛거리며 허리를 굽혀 파이프를 쌓기 시작했다. 계속 문가에서 팔짱만 끼고 바라보는 해준에 자꾸 긴장돼 몇 번이고 파이프를 놓쳤다. 결국은 동그란 원통모양의 자재가 데굴 굴러가려는 걸 손을 뻗어 잡으려는 순간 훅, 등으로 묵직한 무게와 온기가 백기를 덮쳐왔다. 그리고 귓가에 내려앉는 후끈함.

 


“-도와줄까요?”

! ? , 아니 괜찮습,”

“-부사수를.”

 


느릿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현저히 낮아 백기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 말캉한 혀가 백기의 귓속을 파고들어왔다. ,

 


돕는 것도 사수의 역할이죠.”

“..., 대리님. 왜 이러십…….”

백기씨가 다쳤으니 도우려는 거 아닙니까.”

“...., !”

 


말과는 별개로 귀를 뭉근하게 핥아오는 혀에 백기의 목덜미가 움츠러든다. 서늘한 공기에 차게 식은 귓가가 뜨거운 혀에 눅진하게 풀리고 백기의 입에서 입김이 터졌다. 무릎이 풀려 주저 앉을뻔한 걸 간신히 손바닥을 짚어 지탱하자 팽팽히 당겨진 셔츠에 유려한 날개 뼈며 등에 패인 골이 예쁘게 드러난다. 해준이 귓불을 빨아올림과 동시에 양손으로 백기를 감싸 안듯 허리부터 쓰다듬어 온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오는 손길이 닿는 곳부터 화끈 열이 퍼져 올라오고, 바들바들 떨며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어 잘근거리던 백기가 제 가슴 끝을 찔러오는 양 손가락에 기어이 신음을 뱉었다. 그에 만족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목덜미에 입술을 댄 해준이 그대로 뱉은 음성이 너무도 낮고 뜨거워 등허리가 쭈뼛 세워졌다. 몸이 공포와는 별개로 묘한 기대감이 자꾸만 차올라 백기가 난감함에 몸을 바르작거린다. 별다른 힘을 주지 앉았음에도 묘한 압박감이 가득한 해준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백기가 눈을 질끈 감았다. 파르르 백기의 눈가가 떨렸다.



“...백기씨가 예쁘게 웃은 게 잘못입니다.”



*


(눈치) 

 

우리 아빠 둘 5


양 손바닥에 파묻힌 고개가 들리기보다 해준이 한 번 더 꺼낸 재촉의 말이 빨랐다.

 

장백기씨,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닙, 아닙니…….”

 

고개를 도리질 치던 백기가 조금 젖은 눈을 들었다. 눈썹은 한없이 쳐져있고 눈은 그렁그렁 하면서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입 꼬리를 억지로 올리려는 모습에 해준이 미간을 좁혔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말끝이 약간 뭉개진 목소리로 부정의 말을 뱉은 백기가 손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던 서류가방을 다시 책상 서랍 앞에 놓으며 반만 걸쳐져 있던 자켓도 벗어 의자에 걸려는 걸 해준이 저지했다.

 


장백기씨, 저 좀 봅시다.”

“....”

 


누가 봐도 무슨 일 있다 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입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백기를 불러낸 해준이 옥상으로 향했다. 뒤에서 느릿하게 따라오는 백기가 걸음을 따라잡기 힘들까 보폭을 조금씩 줄여가며 엘리베이터를 잡는 해준의 손끝이 초조함에 차가워진다.

 


*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깐 제가 잠시,”

말 하세요 장백기씨. 아까 전화 받고 그런 거죠? 무슨 전화 길래 그럽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장백기씨, 그런 기분상태로 일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고집부리다가 일 크게 터뜨리려 그래요?”

…….”


발끈한 듯 주먹을 꼭 쥐며 반항적인 눈빛이 날아든다. 그래도 이전처럼 곧바로 날카로운 말을 쏟아 내거나 뛰쳐나가지는 않는 걸 보니 시간이 흐른 동안 조금은 성장했나 싶기도 하고. 꼭 쥔 주먹을 몇 번 떨던 백기가 흘끗 제 손목의 시계를 보더니 눈이 크게 뜨인다. 아차하며 얼굴 가득 낭패감이 퍼지는 걸 본 해준은 선심 쓰듯 먼저 물꼬를 터주기로 했다.

 


아까 보니 어디 가려고 했죠?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는 건 용납 못합니다 장백기씨. 이유를 말하고 가세요.”

“.....하아.”

 


내뱉은 한숨 뒤로 망설이듯 눈을 굴려대던 백기가 꾸역꾸역 토해낸 내용은 꽤나 예상치 못했던 거였기에 감정기복이 크지 않은 해준 조차 너무 놀라 끼고 있던 팔짱이 삐끗 하며 슬쩍 풀렸다.

 


아이가, 아픕..니다.”

“....?”

 


타인이 저에게 하는 말을 놓쳐서 되물은 적은 없었다. 지금 것도 놓쳐서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도리어 너무 분명하게 귀에 파고든 말이 믿기지 않는 것이었음에 놀란 탄식이나 의문 섞인 감탄사에 가까웠다. 장백기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아니 없을 말이 튀어나오자 해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게 백기의 개인정보가 적혀있던 서류라니. 분명히 나이는 26이고, 결혼 유무는....당연히 살피지 않았다. 나이나 스펙조차 관심이 생기지 않아 흘깃 곁눈질만 하고 서랍에 넣어뒀는데. 결혼유무 따위는 당연히 살피지 않았겠지.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설마 26살이니 결혼 은 당연히 안했겠지 라고 생각한 저가 퍽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잠깐. 아이라고 했지 제 아들이라니, 딸이라느니 하는 주어가 분명치 않았다. 그 아이가 사촌일수도 있는 거고. 해준은 조금씩 말라오는 목을 큼, 소리 내어 가다듬곤 되물었다.

 


“...아이, 아이라니요?”

제 아들이 아프다고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맞네. 장백기 아들. 너무 놀라서 평소보다 느리게 회전되는 머리를 굴리던 해준이 깜짝 놀라 백기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아이가 아픈데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갑작스레 쏟아지는 해준의 높은 목소리에 백기가 해준에게 끌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와중에도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니, 대리님이 여기로 데리고 오신 겁니다만. 물론 전하지 못한 말끝이 목구멍에서 간질간질하게 울렸다.

 


,. 그렇지만 오늘까지 마무리 해야 하는 서류가..”

장백기씨, 아이가 아프다면서요. 서류가 중요합니까?”

하지만, 오늘 팀 전체가 야근인데 어떻게 제가,”

아이가 우선이지요.”

 


순식간에 1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해준은 백기에게 잠시 기다리라 이른 뒤 백기의 자리에서 옷과 가방을 챙겼다. 그 사이 문이 닫히지 않도록 열림 버튼만 꾹 누르며 안절부절 하고 있던 백기에게 짐을 건네고는 해준이 버튼을 눌렀다.

 


곁에 있을 수 있을 때를 놓치지 마세요. 장백기씨.”

 


과장님껜 제가 말씀드릴 테니 얼른 가십시오. 문이 닫히는 사이로 어느새 사라져 텅 비어있는 복도를 바라보는 백기가 눈을 깜빡였다.고마운 마음이 차오르다 못해 넘쳐 흘러내리듯 묘한 기분에 가만히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고맙다고 말씀도 못 드렸는데.

 


*

 


묘한 기분에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이내 1층에 도착한 백기는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로비를 가로질러 뛰었다. 구둣발이 바닥에 부딪혀 나는 거슬리는 소리도, 쭐떡 벗겨질 번한 가죽구두도 신경 쓰지 않고 막 유리문을 밀고 나간 백기는 다행히도 막 사람이 내린 빈 택시를 잡아 탈수 있었다. 어린이집 주소를 부른 뒤 팔뚝에 걸려있는 자켓을 잘 추슬러 안으며 막혀오는 숨을 몰아쉬었다. 설마 말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강해준에게.

 

의식적으로 백기는 제 결혼과 아이의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하는 것을 꺼려왔다. 왼손가락에 반지를 끼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눈치 채지 못할 것도 당연했지만 백기도 구태여 먼저 말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이의 존재나 부인의 존재를 부끄럽다는 이유로 숨기고 싶어 하는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사실을 밝히려면 필연적으로 해야 할 부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여전히 백기에겐 가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픔이자 상처였기에 그랬고, 참으로 안쓰럽고 불쌍한 그녀였기에 더 그랬다. 아직도 밤에 눈을 감으면 가느다란 팔목이 떠올랐고, 아픔에 까무룩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제 손가락을 잡아오던 흰 손이 안타까웠으며, 어색하게 깎은 짧은 머리를 하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망설이며 현관을 나서지 못했던 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환하게 웃어줬던 그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기에.


꼭 아내의 문제뿐만이 아니더라도 아이에겐 세상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큰 존재감인 엄마의 부재를 그 어린아이가 무얼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아무런 물음도 꺼내지 않는지. 여전히 백기의 눈엔 어린 아이임에도 한없이 커 보이기만 하는 의젓한 모습이며 곧은 눈을 한 백서를 보는 것 또한 백기에겐 크나큰 마음의 짐이었다. 그래서 백서를 키우기로 결심한 거였고.

 

어머니는 백기가 온전히 아이를 키울 수 있을 때까지 백서를 보살펴 주시겠다 했지만 백기는 고집을 부렸다. 단순히 키우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키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의 양육이 얼마나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니? 천천히 다정하게 설명을 하던 제 어미의 목소리가 굳건한 백기의 고집에 낮게 가라앉아질 때쯤, 제 아이잖아요. 조용히 말을 꺼낸 백기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 말없이 손을 잡아주던 그날의 주름진 손도 기억한다.

 

목적지에 다다른 택시아저씨의 도착을 알리는 조근거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백기는 분명 지금 제가 몸을 담은 곳이 어딘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소리 내어 엉엉 울어버렸겠지. 씁쓸하게 웃으며 돈을 지불한 백기가 어린이집으로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현관 앞에서 호출버튼을 누르고 조금 기다리자 백서의 담임선생님이 나와 백기를 반겼다.

 


아버님, 오셨어요?”

, 늦어서 죄송합니다.…….백서는 어떤가요?”

물수건으로 몸 닦아줘서 열이 조금 내리긴 했는데 자꾸만 울며 아빠를 찾아서요. 이러다간 또 금방 열이 오를 것 같아요.”

바로 데려가겠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원을 하고, 부모를 기다리는 몇몇 아이들만 얌전히 블록을 쌓으며 놀고 있는 교실이어서 백기는 담임선생님의 뒤를 따라 조용히 교실 안에 걸음 할 수 있었다. 놀이 공간 한쪽에 쌓인 매트위에 누워있는 백서의 얼굴이 붉은 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 백기는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오는 걸 느꼈다. 이마를 덮은 물수건에 눈이 거의 가려진 상태로 누워 숨만 몰아쉬던 백서가 푹신한 매트에 울리듯 나는 발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아빠를 발견한 백서의 눈에 금방 눈물이 잔뜩 차올랐다. 이불을 제 몸에서 치우고 멀리 밀어내려다 아픈 탓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이 짜증나는지 히잉, 하곤 누운 자세 그대로 두 팔을 앞으로 뻗어온다. 허리를 굽혀 백서의 팔을 제 목에 감게 하곤 등허리에 손을 단단히 감아 품에 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담임선생님이 이불로 백서의 몸을 꽁꽁 감싸 안아주는 걸 틈을 벌려 도운 백기가 꾸벅 인사를 하곤 천천히 밖으로 걸음 했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아하니 서둘러 가면 원 바로 맞은편에 있는 소아과에서 진료도 받을 수 있겠다 싶어 백기가 걸음을 재촉한다. 혹여나 강하게 흔들리면 열이 잔뜩 오른 아이가 어지러움에 힘들어 할까봐 중간정도의 보폭을 유지하던 백기는 자꾸만 더 세게 목을 감아오며 칭얼거리는 아이의 등허리부근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한 손에 들린 자켓과 서류가방 탓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백기는 가슴에 볼 부근을 대고 있는 아이의 후끈하게 열이 오른 정수리에 입술을 여러 번 내렸다.

 


*


 

다행히 독감은 아니고 단순 열 감기네요. 약 처방해 드릴 테니 시간마다 먹여주세요.”

, …….감사합니다.”

놀라셨죠? 아이가 아파서.”

 

...... 말끝을 흐리지만 의중을 알아챈 듯 안쓰럽게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의 눈빛을 애써 피하며 백기는 진찰대 위에 누워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백기를 닮아 햐앟던 얼굴이 열이 올라 곳곳에 붉은 열꽃이 피었고, 아픔을 참으려 깨물었는지 퉁퉁 부어 잔뜩 상처가 난 입술하며. 자꾸만 아이와 꼭 닮은 한 사람이 떠올라서 백기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 붉게 충혈 되어 있던 눈을 닫은 백기가 힘을 주어 몇 번이나 깜빡이다 눈을 떴을 때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흰 종이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눈의 뻑뻑함이 사라지지 않아 눈을 비비려던 손으로 종이를 잡자 타이핑 쳐진 몇 줄의 짧은 글자가 보였다.

 


아이가 열이 날 때 해주시면 좋은 것들이 적혀있는 안내문에요.”

, 감사합니다.”

아이가 아픈 게 처음인가요?”

“...?”

아버님이 너무 당황한 것 같으셔서요.”

“..., 음은 아닐 겁니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봐주셔서 잘 몰랐었는데, 제가 겪은 건 처음이라 조금 많이 당황한 것 같네요.”

아버님이 놀라신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이 앞에서라도 태연한 척 해주셔야해요.”

?”

아이는 귀신같이 제 부모의 기분을 알아차려요. 참 예민하죠. 어른들이 생각하기론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참 많은 걸 알고 있고, 눈치 채고 있거든요.”

…….”

아이도 분명 느꼈을 거예요. 아버님이 당황하신 거. 그럼 아이는 자꾸만 속으로 삭히게 되요. 아빠가 당황한 모습이 보기 싫으니까.”

 


의사의 말에 허가 찔린 백기가 꾹 오므린 손가락 사이로 종이가 보기 싫게 주름졌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백기의 표정을 보고 의사가 다 안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냥, 간단해요 아버님. 간단하지만 하기 힘드실 지도 몰라요. 익숙지 않은 일을 하는 건 힘들지만 시작하는 게 망설여질 뿐이니까 용기를 내주세요. 집에 가서 아이에게 계속 웃어주세요. 계속 안아주시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시고. 별거 아닌 일에 아이는 안심하고 또 안심하거든요.

 


이젠 제법 편안한 모습으로 잠든 백서를 멀건 눈으로 바라보던 백기의 눈에 오늘 하루 종일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아이의 소식을 듣고도 용기 내어 밖으로 나서지 못했던 백기가 눈물을 흘렸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의 눈물이 한 방울, 그 위로 덧대어 그려지듯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은 자신의 망설임에 대한 혐오감의 눈물. 저를 당황스럽게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이 보임에도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손끝으로 몇 줄 안 되는 글자들을 더듬거리느라 잔뜩 해진 종이는 잔뜩 닳아있었다. 서툰 솜씨로 야채를 잘게 잘라 뭉근하게 밥과 끓여낸 서툴기 그지없는 죽을 먹이고 시럽 약까지 먹이는 데 성공했지만 열이 떨어지지 않아 색색 숨만 몰아쉬는 안쓰러운 백서를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 백기가 의사선생님이 건네줬던 유의점이 적힌 종이를 꺼내들어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몇 가지 간단한 방법만 적혀있는데도 초보아빠에겐 그 모든 것이 어색할 뿐이었다.

 


, 옷을 다 벗기고…….춥지 않나? 그럼 감기가 더 심해질...아냐, 의사선생님 말 듣자. 그리고 미지근한 물을 수건에 묻혀서 몸을 닦...찬물이 아니고?”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뜬 백기가 문장을 한참이나 노려보다 이내 방법이 없단 걸 알고 막 수건에 물을 적시러 가려던 참에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오다니. 시계를 흘끗 보자 어느새 밤 열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귀찮음에 미간을 찌푸리려던 백기가 액정에 뜬 이름에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 강대리님!”

장백기씨, 아이는 좀 어떻습니까?”

, . 연락을 제가 드렸어야 했는데.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감기입니까? 요즘 같은 환절기엔 열감기가 유행인데요.”

아 네, 약을 먹이긴 했는데 열이 아직은 떨어지지 않네요.”

미지근한 물을 대야에 담아 와서 깨끗한 수건에 적셔 몸을 닦아주세요.”

“....?”

혹시 찬물로 하려던 건 아니죠?”

“..., 아닙,”

찬물로 하면 한기가 돌아서 열이 떨어지지 않고,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더 안 좋으니 미지근한 물을 적셔서 심장에서 먼 부분부터 꼼꼼히 닦아주세요. 발끝이나 손 끝 같은 곳부터요.”

 


고저 없는 해준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울리는 걸 귀 기울여 듣던 백기가 갑자기 쏟아지는 지식들에 놀라 허둥지둥 주위에 펜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해준의 말을 받아들이느라 머릿속을 바삐 굴리던 백기가 감탄 섞인 신음을 뱉어냈다. 우와.

 


, ! . 굉장히 잘 아시네요, 강대리님..?”

, . 그보다 장백기씨.”

!”

내일 바쁩니까?”

, 아니요. 내일 토요일이니 아이와 함께 집에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놀러가도 되죠?”

“....?”

그럼 내일, 오후 1시쯤에 가볼게요.”

, , 강대리님! 잠시,”

주소 바로 메시지로 보내주세요. 그럼 병간호 잘하십쇼. 장백기씨.”

 


강대리님!! 기어이 비명처럼 터진 백기의 외침에도 무심히 끊어진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백기가 액정이 검은 화면으로 바뀌자 당황스러움에 손을 떨었다. , 이 인간이 뭐라는...,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던 순간 백서의 희미한 부름에 황급히 화장실로 가 미지근한 물을 받았다. 촤악, 물이 대야에 부딪혀 하얀 거품을 내는 걸 바라보던 백기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밤에 잠을 자기는커녕 청소에 빨래에 쌓인 설거지들을 황급히 처리해야했다. 지친 몸이 아프다며 항의의 소리를 냈지만 백기는 애써 무시하며 마른 수건과 대야를 챙겼다. 히이, 아빠아. 헤죽 웃으며 백기를 반기는 백서의 모습에 따라 웃던 백기가 속으로 눈물을 잔뜩 삼켜냈다.

 




*


불도저 강해준씨...(부들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