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해준백기 온리전 (10월 10일)에 나오는 소설본 "같이의 가치" 샘플입니다.*

*수정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뭐 꼭 집이 하나씩 있어야 합니까?”



예? 

멍하게 되묻는 저를 슬쩍 인상 긋고 바라보는 해준의 표정에 묻어나는 질책의 의미를 읽은 백기는 무어라 항변의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아니 그럼 대리님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말씀을 하셔야죠! 라고. 물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에 백기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장백기는 강해준을 이기는 방법 따윈 몰랐으니까 여기선 저가 한번 지고 들어갈 타이밍이었다. 어색하게 입 꼬리를 당겨 웃으며 순진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슬쩍 한 번 더 되묻는다. 

무슨, 말씀이세요? 역시나 평소처럼 동요 없는 표정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어. 아니 거의 처음이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준은 백기의 되물음에 꽤나 표정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굳게 닫혀있는 입매며 덤덤한 듯 보이는 무표정은 여전했지만 평소와 시선의 방향이 달랐다. 항상 시선과 함께 마음까지 몽땅 잡아 삼킬 듯이 곧았던 시선이 살짝 백기의 얼굴 옆쪽으로 엇나가 있는 게 너무도 확연히 보였다. 덩달아 당혹스런 표정을 지은 백기가 몸을 해준쪽으로 가까이 숙이자 딱 그만큼 뒤로 멀어진다. 그리곤 툭.



“원래 그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예?”

“같이 살자고요.”

“예?”



예? 예? 예? 한 가지 말밖에 하지 못하는 인형처럼 딱 그렇게 세 번 정도 더 의미없는 소리로 되묻자 해준은 시끄럽다는 듯 한번 혀를 한 후 단박에 입술을 비벼 누르며 백기의 벌려진 입을 다물게끔 했었다.



참 멋도 없으시지, 우리 대리님. 큭큭 다시 떠올리니 또 목구멍 저 아래부터 슬쩍슬쩍 간지러움과 함께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물론 해준은 꾸며내는 말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고, 드라마 대사처럼 멋진 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란 걸 알고는 있었음에도. 고백의 말이 될 수도 있는 쇼킹한 동거 제안을 어쩜 그리 멋없게 할 수 있는 건지 감탄, 또 감탄만 일 뿐이다. 목장갑을 끼고 스탠드를 한손에 든 채 어깨를 약간씩 떨며 웃고 있는 백기를 바라보는 해준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느껴지는 시선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백기가 해준을 보며 히죽 웃어보여도, 여전히 눈썹만 꿈틀할 뿐 의문스럽단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대리님! 이 스탠드는 서재 책상에 두면 됩니까?”

“예. …장백기씨 괜찮습니까? 오늘 영 이상하네요.”

“하하, 멀쩡하죠. 옙.”



이상해 보이는데. 설마 못 들었을까봐 친절하게 한 번 더 중얼거린 해준이 욕실용품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는 걸 보는 백기의 입 꼬리가 한 번 더 씰룩였다. 사실 어젯밤엔 기대돼서 잠도 설쳤는데. 물론 말했다간 제대로 된 수면이 우리 몸에 얼마나 필요한가로 시작하는 걱정 가득한 해준의 잔소리를 들을게 뻔해서 그저 합, 입을 다물고 서재 책상에 스탠드를 올려두곤 살짝 쌓인 먼지를 손바닥으로 훑을 뿐이었다. 


물론 그런 멋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건 백기 저였으니 해준을 뭐라 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냥 얌전히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안타깝게 그마저도 아니었다. 


자꾸만 예? 예? 되묻는 백기에게 짧게 키스하고 해준이 입술을 뗐을 때는 눈물 콧물 뚝뚝 흘려대며 이상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백기가 있었다. 저를 보며 해맑게 웃어주는 백기를 기대하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해준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었다. 그 울음을 거절의 의미로 생각했는지 짧은 순간동안 마구 떨리던 해준의 동공에서 상당한 번뇌와 우울함이 스쳐갔다. 그런 게 아니라 말하려 해도 입에선 끅, 흑. 따위에 물기 가득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고, 원하는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울기밖에 못하는 제 모습이 서러워서, 해준의 말을 듣고 흘리던 기쁨의 눈물은 금방 바보 같은 제 모습에 대한 속상함의 눈물로 바뀌어 있었다. 바보 장백기. 바로 예! 라고 얘기해도 시원찮을 텐데 지금 뭐하는 거야. 답답함에 스스로 가슴부근을 퍽퍽 내려치자 해준이 기겁하며 제지했다. 헐떡이며 우는 장백기와, 그런 장백기를 보고 별 생각을 다 하며 입술만 깨물고 있던 강해준. 다행히도 울음을 삼킨 백기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간신히 튀어나온 덕에 강해준의 고난에 가까운 고민은 금방 끝마쳐질 수 있었지만 그 짧은 순간동안 정말 놀란 건지 잔뜩 배어나와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이 백기의 목덜미와 등에 닿아왔고, 그대로 한숨과 함께 크게 끌어안는 해준이 있었다.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사 후 일주일간은 야근이나 외근이다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에 사실상 ‘새 집’에서 생활 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짧았다. 기껏해야 퇴근 후에서 기상 전 까지 시간 정도. 음식을 해먹기는커녕 집에 있어도 사용하게 되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자주 사용했던 건 욕실이나 침실 정도였기에 그다지 불편함이나 부족함을 모르고 생활했었지만. 이사 후 처음 맞는 주말 아침 해준과 백기는 집 주변에 있는 큰 마트로 부랴부랴 향할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일찍 퇴근했던 어젯밤. 월요일에 출근해서 처리해야할 서류와, 자재창고에 부품 등에 대해서 제법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소소하게 야식이나 해 먹을까 하는 마음에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직 제대로 된 식기세트조차 구비해 놓지 않았던 주방의 상태와 처음으로 마주했다.


각자의 집에서 쓰던 접시며 컵, 숟가락은 새로운 기분으로 새 집을 맞이하자! 하는 마인드와 함께 대부분 정리하고 들어왔기에 부엌 찬장에는 고작 커피 타먹을 때 썼던 머그컵 두 개와 작은 접시 두어 개뿐이었다. 휑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한 찬장 문을 급하게 닫고 그제야 두 사람은 집안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부엌과 별다를 게 없는 게 당연했다. 그나마 많이 사용했던 주방이 그 정도였으니까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있던 가구나, 각자가 가지고 온 짐들은 정리가 되어있기 보다는 그저 아무데나 ‘배치’ 되어 있을 뿐이었고, 실제로 생활하기에 꼭 필요한 생필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실제로 집에서는 커피 몇 번이나 마트에서 포장된 채로 사온 과일 정도밖에 먹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하자 야식이고 뭐고 당장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사야할 목록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호기롭게 목록이 적힌 쪽지를 들고 마트로 향한 것은 좋았으나 생각보다 큰 규모와 많은 사람들로 인해 이미 상당히 주눅 들어 있던 두 사람이 한참을 헤매다 애써 찾아낸 카트를 끌며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우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생활용품 코너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가자 필요한 것들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큼직한 공간이 보였다. 


어디부터 가야할지 눈이 핑핑 도는 느낌에 우선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쪽에 있는 곳부터 카트를 끌고 다가갔다.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식기세트와 두 사람이 쓰는데 필요한 용도의 접시를 카트에 조심스럽게 담아냈다. 집안일에서는 해준보다 훨씬 야무진 백기는 꼼꼼하게 메모에 적힌 목록을 살피다가 주방세제와 수세미까지 꼼꼼하게 챙겨 카트위에 올렸다. 접시가 불안하게 흔들거리고 있는 걸 걱정하며 살살 카트를 밀던 해준이 다음엔 뭘 사야하나 살피고 있는 백기의 손에 들린 쪽지를 어깨 너머로 빤히 쳐다봤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가며 적어온 결과였지만, 꼭 사야하는 목록을 적은 쪽지보다는 직접 마트에 와서 이것저것 살펴가며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들이 훨씬 많았다는 것에 둘은 머쓱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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