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영도효신] 한 발짝

단문2015. 5. 29. 00:54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

 -김현승 [고독]




짝사랑이란 게 이렇게 거지같은 거였단 걸 미리 알았더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몇 년째 반복하고 있는 생각이지만, 후회하기엔 많이 늦었다는 걸 잘 안다. 벗어날 수 있었다면 진즉 벗어났겠지. 잔뜩 날을 세운 그에게 낮 동안 할퀴어져 뚝뚝 피를 흘리는 제 불쌍한 심장을, 고독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마다 덕지덕지 밴드를 붙여 임시방편일 뿐인 치료를 한다. 그러나 본래 질기지 못한 살굿빛의 천은 영도의 심장에 난 많은 상처를 덮기도 전에 붉은 피에 절어 접착력을 잃곤 했다. 황망하게 주저앉아 아픈 부근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고만 있던 영도가 울컥 치미는 감정에 주먹으로 바닥을 쿵, 내려쳤다. 카펫이 깔린 호텔방은 제 아비가 당당하게 뽐냈듯 소음 따윈 가볍게 집어삼킬 뿐이어서 풀 데 없는 분노가 영도를 잠식해 나갔다. 


벗어날 수 없으면 끊어내는 게 맞을 터였다. 저를 위해서도, 효신을 위해서도. 하긴 여기서 효신을 위해서라는 것 자체가 꽤나 웃긴 자기변명이었다. 저 혼자만 앓던 사랑을, 누군가에겐 몇 년 동안이나 닿지 않은 애절한 혼자만의 외침, 그저 저 혼자만 아프면 됐으니까. 효신이 돕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냥 혼자만. 아무도 모르던 사랑을 정리하면 됐으니까.



-



붉게 충혈 된 눈이 뻐근함에 달아오르자 효신은 막 교문을 지나치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누르다 가볍게 비볐다. 어젯밤 감금되듯 갇힌 제 방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오랜만에 치정이 끈적하게 얽힌 내용으로 유명한 불륜 소설을 밤새 읽었더니 눈은 뒤늦게 항의하듯 잔뜩 비명을 질러댔다. 메말라 뻑뻑했던 눈동자가 손가락에 비벼진 탓에 억지로나마 물기를 머금어냈고, 그제야 아픔이 가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효신이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 끝에 길쭉한 것이 걸렸다. 오늘도 교칙은 어디다가 갔다 버리고 셔츠 없이 달랑 카키 빛의 니트나 걸친 건지. 교칙에 잔뜩 어긋난 니트나 맨투맨을 입는 주제에 꼬박꼬박 남색의 교복 마이를 걸치는 건 또 이상한 고집이라 효신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한소리 해야겠다 싶어 성큼 한걸음을 뗀 순간 영도가 효신을 향해 흐리게 웃고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갔다. 어,




“...저거 가방도 없이 등교하기는.”



분명 저를 봤음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뒤돌아선 영도가 당황스럽긴 했지만 거기에 대고 딱히 뱉을 말이 없어 눈만 데룩 굴리던 효신은 마음과는 다른 실없는 소리나 툭 흘렸다. 생각해보면 날카롭게 비죽이는 얼굴, 굳은 표정, 당황한 표정, 갑자기 혼자 잔뜩 붉어진 얼굴로 다급히 손부채질을 하던 모습까지. 오히려 다른 이들이 보기 힘든 의외의 모습들을 효신에게 잔뜩 보여줬던 최영도지만 효신은 영도의 뒷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침과 동시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다시 눈을 덮쳐왔다. 아무래도 양호실에서 인공눈물이라도 받아야겠다 여긴 효신이 멈췄던 걸음을 떼 학교 건물로 향해갔다. 잠시 멈춰있었을 뿐인데 벌써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영도를 저도 모르게 찾던 효신이 치미는 짜증에 고개를 붕, 휘저었다. 선배를 보고 인사도 않고, 진짜 건방이 점점 하늘을 찌르는구나. 닿지 않는 분노를 눈을 비비는 것으로 대신한 효신의 손이 꾸욱, 제법 세게 눈두덩을 눌러왔다.



-



손에 든 일회용 인공눈물 튜브를 뚫어져라 바라본 효신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얼굴에서 10센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똑, 똑 투명한 액체가 떨어져 효신의 눈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서늘한 온도에 놀란 것도 잠시 금방 효신의 체온을 닮아진 인공눈물은 효과가 제법 빠르게 나타났다. 뻑뻑하게 마르다 못해 붉은 핏줄까지 도독 나타났던 효신의 눈가가 유리구슬처럼 반짝였으니까. 허나 마치 사막의 모래바닥처럼 한참동안이나 메말랐던 눈가는 금방 그 수분을 좀먹었고 빡빡함을 다시 호소하기 시작했다. 어우, 두 셋방울이면 된다더니 이거 제약회사에서 용법을 잘못 설명한 거야 뭐야. 투덜거린 효신이 다시 뒷목을 젖히고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제문이 벽에 냅다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기운 의자에 걸터앉아있던 효신은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한 아찔한 상황을 야기한 깜찍한 놈이 누구인가 뻑뻑한 눈을 들어 도끼눈을 떴다. 범인은 늘 현장에 있는 법. 역시나 입구에서 껄렁거리는 자세를 하고 있는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쑤셔오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느라 바로 누군지 알아채진 못했지만 효신은 저런 짓을 할 놈은 한 놈밖에 없다 여겨 눈을 뜨지도 않고 손으로 비비적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낮게 이름을 뱉어냈다.



“...최영도, 기물파손은 엄연한 범죄거든? 형법 제366조.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기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근데 넌 타인의 재물뿐만이 아니라 공공기관인 학교의 재물인 방송실 문을 파손했어. 이제야 좀 심각성이 보이냐?”

“이효신, 여기 최영도 없어?”

“...탄이? 너였어?”

“아, 어디 간 거야 이 새끼는.”




투덜거리는 조금은 맑은 소년의 목소리는 탄이 맞았다. 그제야 초점을 바르게 맞추고 문가를 바라보자 남색 후드 집업을 입고 뒤통수를 성의 없이 긁어대는 탄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최영도 일줄 알았는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점심시간이 15분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원래는 점심시간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귀신같이 나타나서 밥을 거르고 늘어지게 잠이나 자려는 저를 식당으로 끌고가던 녀석이 웬일로 늦게 오나 했는데. 평소에도 흔한 일이니 반성문 따위나 쓰고 있겠네 했었다. 




“-최영도를 왜 여기서 찾아?”

“아, 맨날 이효신 너랑 최영도랑 밥 먹는 거 다 알고 왔거든?”

“나 형, ...뭐 됐고, 나도 오늘 아침에밖에 못 봤는데?”




어? 놀란 듯 동그래진 눈이 효신을 살펴왔다. 내가 거짓말해서 어디에 쓰겠니. 하는 마음을 담아 어깨를 으쓱 얄밉게 들어 올리자 탄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최영도를, 왜.”

“아니 뭐, 은상이랑 걔랑 나랑 어이없게도 같은 조거든.”

“흐음, 안타깝게도 나도 오늘 한번밖에 못 봤다.”

“걔가 형 아니면 찾아갈 사람도 없는데.”

“오버하긴.”




어이없어 피식 웃는 효신을 보며 되레 더 어이없단 표정을 지은 탄이 성큼성큼 걸어와 효신이 팔을 기대고 있는 책상을 쿵쿵 두드렸다. 

철제 책상이 울려와 짜증스럽게 시선을 올리자 탄의 표정이 제법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진심은 아니지?”

“진심인데. 걔 친구 있잖아. 몰려다니는 애들.”

“그게 친구냐? 필요에 의한 관계지. 그리고 최영도가 정말 형을 친구라

여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형 눈치 빠른 거 알아.”

“-별로.”

“받아주지 않는 건 자유지만, 가지고 노는 건 안 되지.”




가지고 논다니. 불쾌한 문장에 절로 인상을 쓰자 탄이 피식 웃곤 효신의 구깃한 미간을 거칠게 문질러온다. 그리고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불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자 탄은 조금 곤란하게 웃었다.




“걔, 불쌍한 새끼야.”

“…….”

“그렇다고.”



어정쩡한 끝맺음과 함께 탄은 미련 없이 방송실을 떠났다. ...야, 문! 느릿하게 튀어나온 효신의 음성에는 잔뜩 힘이 빠져있어 천천히 느릿하게 공기 중으로 가라앉았다. 와서 잔뜩 이상한 말이나 하고 가는 탄에 괜한 싱숭생숭함이 들어 효신은 손가락에 쥐고 있던 인공눈물을 괜스레 책상에 집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를 수가 있나. 남들을 대할 때와 저를 대할 때의 최영도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는데, 그걸 모른다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핑계지.


효신은 며칠 전 점심시간에 역시나 찾아온 영도에게 처음으로 권했다. 학교 앞에 국수 잘하는데 있던데 오늘은 거기 갈래? -국수요? 내내 생글 거리던 얼굴이 짐짓 굳었다 싶더니 입 꼬리를 올려 웃는 최영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방울져 떨어질 것만 같은 슬픔에 가득 차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굳힌 효신을 보더니 금세 웃으며 어깨에 팔을 걸치며 조잘 거리는 최영도의 모습을 보며 금방 착각임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착각도 아니었나 싶어 효신은 답답해오는 가슴을 퍽, 두드렸다. 가지고 놀다니 누가.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인데.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만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이리 고생하지 않겠지. 기다린 건 최영도 뿐만은 아니란 거다. 효신이 덜컹, 의자가 밀리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다급하게 일으켰다. 




-



예비 종에 이어 울리는 수업 종에 영도의 주변에서 떠들어댄 놈들이 교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웬일로 네가 우리랑 밥을 먹냐? 토마토를 씹어 삼키며 한 놈이 말하자 시끌벅적 목소리가 잔뜩 겹쳐 울렸다. 묻지 말라는 듯 포크로 접시를 소리 나게 찍자 몸을 가볍게 움츠리더니 저들끼리 눈치한번 보고 실없는 소리로 화재를 돌려대는 놈들을 보며 영도는 멍하니 효신을 떠올렸었다.


이젠 습관처럼 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효신. 달그락 거리며 정리하는 주방의 소음을 배경삼아 영도가 느릿하게 허리를 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입맛이 없어 대부분이 그대로인 식판을 보기도 싫다는 듯 툭 친 영도가 또 떠오른 효신의 모습에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의 암전. 그리고 곧바로 컴컴한 눈꺼풀 안 세상은 폭죽이 퍼지듯 노란 불꽃이 툭툭 터졌다. 몽글 몽글 솟아나오기도 하고, 둥실둥실 떠다니기도 하는 노란 불꽃에 집중하니 최영도.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 돼.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에 노란 불꽃이 몽글몽글 모여 어떠한 실루엣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다부지긴 하지만 저보다 작은 키와 덩치,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바쁘게 교정을 걸어가는 이효신, 밥 먹자며 헤실 웃어 보이는 저에게 인상을 찌푸리는 이효신. 옷 똑바로 입으랬지 하며 제 복부에 주먹을 내지르던 그 – 아, 이건 좀 사랑스럽다. -. 제기랄, 실패다. 눈을 감으니 더욱 떠오르는 그의 모습이 싫어 입술을 잘근거리던 영도가 눈을 뜨자 밝은 빛이 차들었다. 



“하아.”

“한숨은. 어린놈이.”

“....?!”



덜컹, 환청인줄 알았더니 정말 이 사람이 저를 부른 거였나? 어느새 맞은편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저를 바라보는 이는 분명 이제껏 계속 생각하고 있던 그가 맞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헉헉거리지. 의아함에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영도는 식판 옆에 놓여있는 물 컵을 효신에게 내밀었다. 마시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효신에 어쩐지 민망해져 입 안댔어요. 하자 그거 때문 아니야. 슬쩍 타박해온다. 어젯밤에 강하게 결심하고 하루 종일 피해 다닌 것이 효신의 얼굴을 보자 단숨에 흐물거리며 녹아버리는 저가 웃겨 영도가 슬쩍 웃었다. 그 웃음은 물 컵에 손을 뻗던 효신이 방향을 틀어 영도의 손목을 쥐어오지 않았다면 분명 꽤나 오래 유지될 거였다.  



“...?!”

“내가 네 손을 이렇게 잡으면.”

“무, 뭘, 이렇게 갑작스럽게 스킨십 하고, 그, 그래요?”

“-떨려?”  “.....떨리게.”



푸하, 제 말과 묘하게 이어지는 영도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웃겨 효신이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종국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식탁에 이마까지 대고 끅끅 거리는 효신에게 웃지 말라며 화를 내려던 영도는 그 와중에도 제 손목을 놓지 않고 더욱 강하게 틀어쥐어오는 효신의 손바닥과 손가락 감촉에 말을 잊고 그저 달뜬 눈으로 둘의 접합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 좀, 웃,죠? 불퉁하게 터진 영도에 한 번 더 키킥, 어깨를 떤 효신이 갑자기 식탁과 맞붙어있던 이마를 뗐다. 


“-선배, 오늘 이상하네요? 내 앞에서 웃질 않나.”

“너 앞에서 웃는 게 이상한거야?”

“맨날 찌푸린 얼굴만 했으면서.”

“그래? 그럼 앞으로는 자주 웃어줄게.”

“...그게.”



-무슨 의미에요? 철없이도 떨려버린 말끝에 민망함이 차오르긴 했지만 영도는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


영도의 손목을 가만히 쥐고만 있던 효신이 입 꼬리를 슬슬 올리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영도가 이어지는 효신의 움직임에 기함해 몸을 들썩였다. 평소 가느다랗고 예쁘다고 생각해온 손가락이 제 투박한 손가락에 얽힌다는 건, 상상 그 이상의 감촉과, 기쁨을 넘어선 충격이라 영도가 입을 꾹 다문 순간 효신이 어깨를 으쓱, 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의미.”



참으로 인간은 단순하기 그지없지. 맞닿은 온기를 놓칠 새라 마치 엄마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영도가 다급히 반대쪽 손까지 들어 효신의 손을 다잡았다. 그리고 힘주어 쥐어오는 영도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한걸 느끼고 효신이 다시 한 번 웃자 그제야 영도도 한숨 섞인 미소를 흘릴 수 있었다. 





*



꽤 오래전에 영도효신 합작 참가했던 건데 이제야 올리다니 흡 제 건망증...

존잘님들 연성은 http://dearydhs.dothome.co.kr/  이쪽에서 보실수 있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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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치료입니다.

w. 박두부





사랑니, 아래위턱의 영구치열 치아 중 가장 안쪽에 나오는 세 번째 큰 어금니. 백기는 푸른 컴퓨터 화면에서 보여주는 사랑니의 정의를 읽다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눌러 그 창을 꺼버렸다. 위치는 지금 그딴 설명 없이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그딴 거 말고 제발 이 통증이 없어지는 방법 좀!


욱씬, 또다시 아릿한 통증이 백기의 어금니를 찔러왔다. 치통 따윈 생전 느낄 일 없을 꺼라 자부해왔던 건치의 상징 장백기였는데, -사실 건치인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미친 듯이 쑤셔오는 사랑니의 고통에 매일 밤 눈물 콧물 쏙 빼느라 백기는 요 며칠간 밤에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쓰으읍, 아파. 눈꼬리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않은 채 마우스 휠을 굴려 내려 네ㅇ버 건강백과로 들어갔다. 그래, 건강백과라면 내 아픔을 해소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은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백기는 어질어질한 눈을 한번 비볐다. 


‘...큰 어금니 중 세 번째 위치인 제3대구치를 말하는데 구강 내에 제일 늦게 나오는 치아이다. 보통 사춘기 이후 17~25세 무렵에 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는 이성(異性)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때며 특히, 새로 어금니가 날 때 마치 첫 사랑을 앓듯이 아프다고 하여 “사랑니”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또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시기에 나온다고 하여…….’



욱신! 아, 방금 이건. 진, 짜 아팠다. 바늘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뜨개질바늘같이 끝이 뭉뚝한 걸로 백기의 어금니를 사정없이 찔러오는 둔한 격통에 백기가 황급히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볼살이 밀려 입술이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눌렀음에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심해지는 치통에 기어이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맞닿은 어금니를 여러 번 꽉꽉 물어도 기존의 끔찍한 치통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딴 게 첫 사랑의 통증이라면 백기 저는 평생 첫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컴퓨터 전원을 끌힘조차 없어 대충 모니터 전원만 오프한 백기가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몸을 눕혔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이젠 한기까지 도는 몸을 다급히 두터운 이불로 감싸며 백기는 절로 나오는 앓는 소리를 참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비척거리며 들린 약국에서 무조건 잘 드는, 효과좋은 진통제를 달라며 울먹인 백기가 용법도, 용량조차 보지 않은 채 손에 잡히는 데로 씹어 삼켜낸 약은 이빨의 통증을 가라앉혀주기는커녕 빈 속을 자극해 구토감만 유발할 뿐이었다. 깨 있어봐야 고통에 괴로워 할 뿐이었다. 제발, 제발 잠들어 버리자. 억지로 눈을 꾹 눌러감았다. 속눈썹이 눈꺼풀에 눌려 잔뜩 구겨지는 것 같았지만 알 바가 아니고. 이불속에 잔뜩 웅크린 몸을 숨기며 백기가 이를 악물었다.



*



“백기씨, 얼굴이 완전 반쪽이네. 어이고, 볼도 팅팅 붓고.”


석율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과 말투가 탕비실에 울리자 영업 3팀의 커피를 젓던 그래마저 고개를 돌려 백기의 낯을 살폈다. 이제 막 탕비실에 한걸음 들어왔음에도 그 짧은 순간에 백기의 상태를 어찌나 빠르게 눈치 챈건지.

대답하려 입을 열기엔 찌르듯 이어지는 통증이 괴로워 백기는 볼이 패이도록 꽉 이만 악물며 대답을 피했다. 그래의 옆으로 다가와 커피믹스 한 봉지를 들자 옆에서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래가 손을 들어 백기의 믹스를 쥔 손을 막았다.

의아함에 눈만 돌려 바라보는 백기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긴 그래가 백기의 빈 종이컵을 가져가 찬물과 뜨거운 물을 섞어 적당한 온도의 미지근한 물을 만들더니 백기에게 내밀었다. 백기백기 괜찮아? 하며 어깨에 매달리려하던 석율조차 헬쓱한 얼굴로 그래에게 어떠한 말도 없이 물컵을 받아드는 백기의 처진 어깨가 영 신경쓰이는지 미간을 좁히다가 맞은편에 반듯하게 마주선다.


의아함에 물을 마시려던 손을 멈추고 석율을 바라보자 석율이 진지함을 담뿍 담은 눈을 하고선 양 손바닥으로 백기의 볼을 쥐어온다.


“아.”

“...에?”

“아, 해봐 백기씨.”

“지금 뭐하..”



백기가 인상을 쓰며 밀어내려하자 꾹, 볼을 눌러오는 석율의 손아귀 힘에 절로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을 고개를 숙여 꼼꼼히 살피는게 제법 진지해 백기는 성질 내려는 타이밍도 놓치고 어정쩡하게 석율에게 볼을 맡긴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마치 치과에서 어벙벙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


모종의 이유로 멈춘 해백 조각글입니당.

치과의사 강해준*환자 장백기

*5월 케이크 스퀘어에서 무료배포 했던 해준백기 배포본 웹공개입니다!

*가져가 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u///u*



*


서툰 아빠 둘 <장백기> 




“....나, 무서워서 못하겠어.”

“뭐어?”


미간을 찌푸린 서연이 고개를 잔뜩 숙여 폭신한 이불에 누워있는 제 아이만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다 한심한 말이나 뱉어내는 백기의 등짝을 힘 있게 내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욱신거리는 등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백기가 짜증 섞인 투정을 부렸다.


“아, 누나아! 애기 앞에서 때리지 좀 마!”

“너야말로 애기 앞에서 철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뭐.”

“애기 아빠가 돼서 무섭다고 애기를 못 안겠다는 게 말이나 되니?”


하지만, 내가 들었는데 아가가 싫다고 버둥거려서 떨어지면? 저렇게 작은 아기가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어! 누나 너무한 거 아니야? 그냥 안전하게 아가 눕혀놓거나 누나가 들거나 하면 되, 아얏! 아파아!! 


“기어이 한 대 더 맞아야지?”


짐짓 목소리를 깔고 무섭게 말을 꺼낸 서연의 모습에 입을 삐죽인 백기가 무릎을 내 꿇고 있느라 저려오는 허벅지를 툭툭 치며 다리를 펴 무릎을 가슴팍에 모으고 쭈그려 앉았다. 시선만은 아이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손을 어찌할 줄 모르던 백기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겨우 아이의 통통한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리곤 불에 덴 듯 후닥 떼어낸 백기가 서연을 달뜬 눈으로 바라보며 하는 소리라는 게 웃겨 서연은 헛웃음을 삼켜냈다. 정말 저게 아가지.


“...말, 말랑거려.”

“...그럼 딱딱하겠니?”


그러지 말고, 안아 보라니까? 백서 봐봐. 자기 아빠라구 손으로 자꾸 잡으려고 하잖아. 서연의 말에 아이를 내려다보자 그 말이 정말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이, 백서는 고 조그만 손을 오물오물 접었다 펴며 백기의 발가락 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여전히 망설이며 몸만 들썩거리던 백기를 보며 결국 서연이 아이를 들어올렸다. 아직 몸도 완전히 추스르기 전이라 얼굴도 몸도 붓기가 통통 올라있었지만 아이를 안아 올리는 모습이 너무나 경건해 백기는 가슴에 묘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내, 아내와. 내 아이. 아이의 뒷목을 감싸며 안정적으로 들어 올린 서연이 조금 칭얼거리며 손가락을 쪽 빨아대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랜 뒤 천천히 백기에게 아이를 건넸다. 뭐에 홀린 듯 천천히 접었던 무릎을 펴 서연과 마주보고 선 백기가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아이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어정쩡한 손놀림에 백서가 이잉, 투정을 부리며 몸을 뒤채자 화들짝 놀란 백기가 다시금 손을 떼려하자 서연이 단호하게, 하지만 천천히 방법을 일렀다.


“아직 백서는 목을 가누지 못하니까 약간 비스듬히 눕힌 것처럼 안아줘야 해. 응, 그렇게. 그리고 왼팔로 엉덩이를 살짝 받치고 오른팔로는 애기 등을 받치고, 응. 그리고 오른손 있지? 응, 거기로 아기 목을 감싸줘야 해.”

“....이, 이렇, 게?”

“응, 잘했네. 우리 남편.”


품에 안겨 여전히 손가락을 쭙쭙 빨고 있던 백서가 평소 안기던 품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백기를 바라봤다. 약간 눕힌 자세기에 아이의 시선과 백기가 맞닿았고, 잠시 동안 가만히 아빠를 바라보던 백서가 입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빼 백기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어? 아이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막 초보 육아백서를 통해 배워가던 백기가 예상치 못한 행동에 의지하든 서연을 바라봤다. 그러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나. 백서가 왜 그러지? 손을 왜 쭉 뻗었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서연에게서 조차 확실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주룩 흘러내릴 뻔한 아이의 몸을 다시 한 번 받쳐 안은 백기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의 손에 코를 가져가 비볐다. 그러자 헤죽, 웃음을 무는 아이의 얼굴에 가슴이 마구 뛰어 백기가 이번엔 입술을 올려 통통한 손바닥에 쪽, 쪽 몇 번이나 쪼듯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백서. 감격어린 표정으로 서연 쪽을 휙 바라보는 백기의 표정에 언뜻 자신감도 비치는 게 웃겨 서연이 웃음을 터뜨리곤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바닥 붓기도 여전해 조금 뒤뚱거리는 모양새였지만 작은 몸으로 백서를 건강하게 낳아준 서연이 사랑스러워 백기가 성큼 뒤따라가 서연의 볼에 입 맞췄다. 그에 웃음이 더 커진 서연이 분유 타올테니 백서 잘 안고 있으라 당부한 뒤 부엌으로 향했다. 단 둘이 있는 건 조금 걱정되는데. 긴장감에 아이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지만 손바닥만은 넓게 펴 아이의 뒷목과 머리를 단단히 받히고 있었다. 다리가 긴장감에 욱신거렸지만 차마 앉을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앉았다가 혹여나 아이가 불편해하면? 그리고 앉는 도중에 팔이 풀려서 아이가 뒤로 꽝 넘어간다면? 아찔한 상상에 괜히 떨려오는 몸을 털며 입술을 움직거리는 제 아이의 모습을 빤히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동그란 눈은 엄마 닮은 거 같고, 저 오물거리는 입술은 두꺼운 게 아빠인 저를 닮은 거 같고. 코는 좀 낮은걸 보니 엄마? 그렇게 아내와 제 모습을 골고루 빼닮은 아이의 얼굴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내내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던 백기를 보며 젖병을 든 서연이 다가왔다. 잘 섞였는지 젖병 바닥까지 꼼꼼히 확인하던 서연이 손을 뻗기에 아이를 넘겨주려하자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왜? 멍하니 묻자 서연이 반대쪽에서 아이를 단단히 받히고 백기를 이불 깔린 바닥에 앉혔다. 졸지에 주저앉게 된 백기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에 고개만 갸웃거리자 서연이 웃으며 젖병을 백기의 손에 건네주었다. 설마, 설, 마 아니지? 간절함을 담아 바라보는 백기의 기대를 와장창 깨트리듯 서연이 그대로 싱긋 웃어보였다.



“....누나, 아니 자기야. 나 진짜 이건 못하겠,”

“백서야~ 아빠가 먹여주는 맘마 먹고 싶지요~?”


아이가 뭘 알아듣겠냐구. 서연의 치사함에 혀를 내두르며 백기가 젖병을 받아들었다. 미지근하게 맞춰진 분유를 바라보다 입가에 가져가자 아이가 신나게 입에 물고 쪽쪽 맛있게도 빨아먹는다. 짧은 손을 움직거려 젖병을 감싸는 아이를 놀리듯 젖병을 뒤로 빼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입술을 삐죽이며 눈이 그렁그렁하기에 백기가 웃으며 다시 젖병을 물렸다. 쪽쪽, 잠시간 아이가 힘차게 우유를 빨아들이는 소리만 들리던 방에서 서연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깔린 이불에 천천히 몸을 뉘였다. 어느새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안쓰럽기만 하다.


“...괜찮아?”

“응, 괜찮아. 아기한테 미안하지. 엄마 젖도 못 먹으니까.”

“우리 아들은 씩씩해서 이해 할 거야.”


백기의 위로에 살포시 웃은 서연이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을 만하면 몰려오는 온 몸의 통증에 서연은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앓았다. 원인 모를 통증이라며 그저 진통제밖에 투여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서연은 그 처방을 거절했었다.“약을 먹으면 아이한테, 젖도 못 물리지 않나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문장이 있듯이 서연은 결국 속상한 얼굴을 하면서도 투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감내하며 버티기엔 뼈마디가 다 죄여오는 고통을 참기엔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서연한테는 퍽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 덕에 아이에게 모유를 먹일 수 없게 된 서연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백기도 마주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절망감이 많이 씻겨 내려간 것 같지만 여전히 아이가 우유를 먹을 때마다 바라보는 서연의 눈이 처연한 게 백기는 마음이 쓰였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고른 숨을 내쉬는 서연을 바라보던 백기가 갑자기 젖병이 밀리는 느낌에 아이를 바라봤다. 쭉쭉 힘차게도 빨더니 어느새 다 먹은 젖병을 혀를 이용해서 밀어내는 백서의 행동이 웃겨 웃음이 터졌다. 아이는 활력소란 말이 딱 맞는구나. 중얼거린 백기가 몸을 뒤척이며 움직이는 백서의 고개를 어깨에 얌전히 뉘이고 등을 토닥토닥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금방 그윽. 작은 트림을 한 아이가 쭈웁,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백기의 잠옷을 입에 넣어 질겅질겅 물고 빨았다. 황급히 아이의 허리를 잡고 떼어 낸 백기가 입가가 침으로 범벅된 상태로 입술을 오물거리는 백서를 바라보다 못 참겠다는 듯 쪽, 쪽! 맑은 소리를 내며 아이의 입술이며 볼, 콧잔등 눈두덩을 가리지 않고 마구 뽀뽀를 날렸다. 아이가 불편한지 칭얼거리며 손바닥으로 아빠의 얼굴을 밀어냈지만 백기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 한 구석이 안 예쁜 곳이 없고, 만지는 모든 곳마다 포근한 향이 나고, 따끈한 몸은 안고 있으면 어느새 잠이 솔솔 와버리는 아이. 내 아이.

그리고 늘 백기의 곁에 있어주는 아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게 이리도 만족감을 주는 거였는지 백기는 결혼을 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서연의 옆자리에 아이를 조심스레 눕히고, 엄마 쪽으로 돌아누워 손을 버둥거리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백기도 아이의 옆에 누웠다. 포근한 햇빛을 받아 공기가 반짝이고, 백기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서툰 아빠 둘 <강해준>



해준의 아내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어디 유명한 곳에서 모델 일을 했다는 듯도 싶었지만 사실 해준은 그쪽은 문외한이었기에 그저 가끔씩 모이는 가족모임에서 아내의 친구들이 신나게 나서서 하는 이야기를 듣곤 그렇구나. 하고 생각한 게 전부였다. 부모님이 내민 선 자리에 나가서 가장 대화가 통하는 여성과 몇 번의 만남 끝에 결혼. 프러포즈랄 것도 없이 그저 물 흐르듯 진행 된 상견례와 결혼식 준비 끝에 가정을 차리긴 했지만 해준은 역시나 무심한 사람이었다. 다행인건 해준의 부인도 그에게 어떠한 애정표현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반듯한 남자와 결혼하는 게 꿈이었던 그녀로서는 해준과의 결혼에서 이미 그 목적을 다 이룬 셈이었으니 그녀는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급격히 태도가 달라지는 해준의 모습이 낯설고, 짜증도 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강해준이 눈앞에서 핑크와 노란 방울이 달려있는 딸랑이를 진지하게 흔들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지 않았으니까. 


“-당신, 모습 좀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녀는 해준의 모습을 지적했지만 돌아오는 건 되레 뭐가 문제냐는 듯 흘끗 시선을 주다가 금방 다연에게 집중해 딸랑이를 흔드는 해준의 낯선 모습이었다. 옆에 누운 엄마는 보이지도 않는지 다연 또한 제 아빠가 흔드는 딸랑이를 눈으로 쫒으며 방실 방실 웃으니 아주 부녀만 다른 세계에 있는 양 핑크빛 분위기였다. 아니 어쩌면 채원 저만 별세계에 있는지도 몰랐다. 


임신 중에 몸이 무거워 끙끙거리며 돌아다닐 때도 그 흔한 부축한번 없는 남자였다. 밤중에 깨워서 나 신거 먹고 싶어. 같은 말 또한 바랄 수 없었고. 아이를 낳는 날 조차 야근을 마치고 11시가 가까운 시간에 병원에 찾은 이였으니 말 다했지.


처음 채원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저 채원을 보고 무뚝뚝하게 고생했습니다. 하곤 아이를 품에 안아보지도 않던 이 길래 서운함이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런 남자임을 알고 있었으니 참았다. 그래 참았었는데. 그 다음날부터 시작된 해준의 이상행동을 떠올리며 채원은 몸을 떨었다. 


회사에 있을 시간이 분명했다. 오후 2시였으니까 점심식사 후 한참 일에 빠져 있어야할 해준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채원은 부은 몸에 피곤한 눈을 비비며 누워 있다가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으니까. 채원의 놀란 얼굴을 본 해준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로 반차 냈습니다. 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분명 갑작스런 해준의 방문에 놀란 것도 있지만 채원의 눈을 의심했던 건 해준의 한손에 안겨있는 아이의 모습 때문이었다. 흰 이불에 감싸여서 얼굴만 빼꼼 드러난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제 아빠의 품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어제 채원이 서툴게 안자 잠에서 깨 울음을 터뜨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평온한 모습이었다. 사실 해준의 안는 자세가 참으로 능숙한 것도 원인이었다. 


“....어제는, 별다른 반응도 없었으면서.”

“하지만 회사에서 담배연기도 분명 배어왔을 지저분한 옷으로 어떻게 아이를 안습니까.”


그 단호한 반응과 함께 시작된 해준의 통칭 딸 바보짓은 정말 예상을 뛰어넘었다. 야근을 만들어서 하고 오는 것 같았던 해준의 늦은 퇴근시간은 확 줄어들어 정말 칼같이 6시에 회사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 도착할 수 없을 시간에 늘 집 도어락을 열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늘 손에 달랑거리며 가져오는 아이 물품들은 이제 한편에 쌓이다 못해 해준이 직접 가구시장에 가서 새로 구매한 다연의 옷장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딸랑이는 별로인가 보네요.”


채원을 상념 속에서 끌어들인 건 해준의 묘하게 쳐진 목소리였다. 딸랑이를 흔들면 눈으로 따르고,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던 다연이 벌써 흥미가 떨어졌는지 제 손만 꼬물꼬물 입에 물어 빨고 있으니 꽤나 실망한 모양이었다. 위로의 말을 던져야 하나 고민하던 채원이 입을 떼기도 전에 해준은 벌떡 일어나 제 서류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슬라이드 클립으로 단정하게 정리되어있는 서류뭉치들부터 볼펜 등을 분주하게 꺼내며 무언가를 찾아낸 해준의 손에 들린 건 모빌이었다. 보송보송한 코튼 소재로 만들어진 스토리 모빌. 오리모양, 아이스크림에 곰돌이 모양까지 아기자기한 작은 인형과 함께 영롱한 소리를 내는 방울까지 달린 모빌.


“또 샀어요?”

“모빌은 없지 않았습니까. 집중력도 길러주고 관찰력도 좋아 진다네요.”

“아직 깨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더 많은 아이잖아요.”

“그래도 달아놓으면 다연이가 좋아할 겁니다.”


고집도 이런 고집이 없다. 아이 침대로 다가가 천장에 능숙하게 매단 해준이 높이를 안정적으로 조절한 뒤 토끼인형을 흔들며 다연의 눈길을 끌었다. 


“다연아~ 이거 봐요. 토끼네?”


그에 확실히 아이가 마음이 동하긴 하는지 손을 하늘 위로 뻗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아부, 작게 옹알거린 아이의 목소리에 갑자기 고개를 채원 쪽으로 돌린 해준의 표정에 뿌듯함이 가득 차있었다. 드물게 반짝이는 눈을 하곤 뱉는 말이란 게.


“지금 아빠라고 한 거들었습니까?”

“....해준씨, 다연이 아직 옹알이도 제대로 안 터졌을 시기에요…….”

“아닙니다. 분명히 아빠라고 했어요. 보통의 잣대가 모든 아이에게 적용되진 않지 않습니까. 분명 다연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빠릅니다.”


단호한 말을 마치고 해준은 이번에 방울을 손가락으로 쳐 맑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벌써부터 우리아이가 천재인가 봐. 하는 해준을 어찌해야할까 골이 아파오는 듯도 싶지만 결혼 후 몇 번 본적 없던 해준의 미소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게 퍽 좋아 채원은 그저 해맑게 웃는 부녀를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


엄마가 허리를 받쳐주는 손에 겨우 두발을 땅에 붙여 서있던 다연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주앉아 저를 향해 짝짝 박수를 치는 아빠를 바라봤다. 아이의 얼굴에도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있어 해준은 진지한 분위기와 다르게 치밀어 오를 뻔한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딸이 엄마를 닮아 앙칼진 부분이 있어 또 금방 눈치를 채고 아빠에게 투정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다시 한 번 해보자 다연아. 엄마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아이를 단단히 잡고 있던 손을 떼자 잠시 휘청하더니 이내 다리에 힘을 주어 제자리에 곧게 서는데 성공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아이를 안아서 칭찬의 말을 쏟아주고 싶었지만 아직 이다 싶어 채원도 해준도 입을 닫고 그저 아이를 격려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다연아. 아빠한테 와볼까?”

“우, 웅.”


망설이는가 싶던 아이는 제 앞에서 팔을 벌리고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아빠를 보며 통통한 다리를 한걸음 뗐다. 한걸음 떼자 반대편 걸음이. 그렇게 조금은 빠른 속도로 두어 발자국 걷던 다연의 몸이 휘청하는 순간 해준이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제 품에 깊이 안아 올렸다. 아이의 볼을 어깨에 편히 기대게 한 뒤 꽉 안자 아이가 꺄륵 웃으며 해준의 등을 작은 손으로 꼼지락 매만져왔다. 


포근한 온기에 말랑거리는 아이의 몸. 이제 막 첫 걸음을 뗀 아이. 결혼이고 아이고 모두 귀찮다고 밀어내던 예전의 제가 봤다면 지금 해준의 모습을 비웃었을 테지만 해준은 아무래도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저를 반겨주는 부인과 아이. 열심히 그 작은 몸으로 온전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이를 보며 해준은 처음으로 아이를 사랑스럽다 여겼다. 품에 얌전히 안겨 해준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치는 아이 덕에 해준은 넘실거리는 감정을 어찌 주체해야 할지 몰라 입 꼬리를 이상하게 일그러뜨렸다. 


그 묘한 입꼬리를 보며 채원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해준이 아이의 등을 천천히 일정하게 도닥였다.  




*

@etc_tofu 


연재중인 해준백기 소설 [우리 아빠 둘]의 외전격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