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해준백기] 쓴 커피

                     w. 박두부



스스로가 세운 계획은 웬만하면 지키고자 한다.

타인에겐 그게 집착으로 보일지언정 어쨌든 백기 저에겐 그 일련의 규칙적인 일들이 반복되지 않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으니까.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 백기는 가방을 내려두고 외투를 의자에 걸었다. 구김이 가지 않도록 손가락을 이용해서 어깨선을 잡아 펴고 손바닥으로 팡팡, 가볍게 쳐내는 손짓이 꽤나 가볍다. 역시나 오늘도 전 층에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15층 내에선 백기가 첫 출근인 듯 싶었다. 가동된 지 얼마 안되어 선선한 에어컨 바람, 사람들의 움직임에 의해 뽀얗게 떠오르는 먼지도 아직 이었고 창밖으론 선명한 하늘. 어느 하나 백기의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인간은 참 단순한 동물이지. 어쨌든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은 백기도 늘 공감하는 바였다. 그 시작이 아주 사소한 하루의 시작이더라도 그랬다. 알람이 울기 전에 일어나 산뜻하게 샤워를 하고, 주말에 백화점에 가서 구매했던 마음에 드는 패턴의 넥타이도 단정하게 매졌고. 출근길의 버스는 한산했고, 15층의 자동문을 지나친 첫 사람이 되었고. 백기는 스믈스믈 올라가는 입 꼬리를 막지 않았다. 휘파람을 잘 불지 못하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랄까. 즐거움을 소리로 표현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휘파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신 백기는 구두를 굴려 색다른 소리를 만들어냈다


, 따악. 경쾌하게 들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백기는 탐비실로 향했다. 달달한 설탕과 프림이 일정량씩 소분되어있는 믹스커피를 즐기곤 했지만 원래 묘한 도전을 하고픈 날이 있었고, 백기는 그게 바로 지금이라고 느꼈다. 혼자 마실 거니 쟁반은 필요가 없겠지. 습관처럼 위쪽 선반 문을 열기위해 올렸던 손을 내리고 백기는 조금 높은 길이의 종이컵을 빼들었다. 도전. 다시 한 번 중얼거린 뒤 백기는 곰곰이 석율의 몸짓을 떠올렸다. 분명 기계 뒤편의 물통에 물이 충분히 들었나를 살폈었지. 찰랑찰랑 반 이상의 투명한 물이 담겨있다. 그리고 원하는 커피를 선택하고. 에스프레소는 아무리 도전이 끌리는 날이라 하여도 무리였다. 실패가 뻔히 보이는 건 애초에 하지 않는 게 맞았으니 패스. 그냥 원두커피나 한잔 내리기로 마음먹는다. 버튼을 누르자 초록빛 불빛이 들어왔다. 한 번 더 꾹 누르니까 드드득, 원두 갈리는 소리와 함께 뱉어내는 진한 커피 원액을 어쩐지 뿌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쓴걸 애초부터 입에 대지도 않는 백기는 늘상 믹스커피를 마시는 자신을 놀려대는 석율을 떠올리고 가슴을 뿌듯하게 추켜올린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탓에 허리 즈음에 주름이 잡히는 것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는지 향긋한 향을 내며 종이컵에 얌전히 고여 있는 커피를 들어올렸다. 종이컵이 뜨거운 탓에 입구 쪽을 손가락을 감아쥐고 조심스럽게 입앞에 가져다댔다. 후우 후우, 쓴 것만큼이나 쥐약인 뜨거운 것을 후후 불며 식히고 드디어 대망의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리고 장백기는 딱 2.5초 만에 후회했다.

우읍. 종이컵을 한쪽 구석에 던지듯 내려놓고 입을 틀어막은 채로 탕비실 이곳저곳을 살피는 백기의 눈이 한없이 바쁘다. 개수대는 애초부터 바랄수도 없었고. 슬쩍 입구를 눈치 보듯 바라본 백기가 조심스럽게 쓰레기통에 여전히 머금고 있던 커피를 뱉어냈다. 퉤퉤. 혀끝이며 입 구석구석 남아있는 쓴맛이 사라지길 바라며 침을 모아 한 번 더 뱉어냈다. 쓴맛 없애기에 한껏 열중해 있던 백기가 입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눈을 들어 올린 순간 들어찬 해준의 모습에 헛숨이 들어 삼켜진다.

 


“....대리님.”

장백기씨, 뭐 합니까?”

, . 하하. 아닙, 아닙니다. 별거.”

 


본건지 못 본건지 해준의 질문은 평소처럼 간결했고, 물어놓고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백기 쪽으로 다가와 종이컵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오히려 찔리는 마음에 한걸음 뒤로 몸을 물린 건 백기였다. 맑은 소리와 함께 다시금 원두 기계가 울리고 해준이 놓은 종이컵에 커피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기대감을 잔뜩 담은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언제고 백기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보는 양 인상을 잔뜩 쓴 채 입을 합 다물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커피가 종이컵에 떨어지고 해준은 컵을 입에 가져대다 말고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백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할 말 있습니까?”

? ? . ...커피. 쓰지 않을까 해서요.”

늘 먹던 거라. 장백기씨는 웬일로 원두커피를 먹네요.”

……. 하하. …….”

 


저 한편에 밀려나있는 종이컵은 또 언제 봤는지 그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커피를 마시는 해준의 입 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눈치 챈게 분명해 보이는 표정에 백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젠장, 젠장. 좋았던 기분따윈 언제든 바닥에 처박힐 수 있단 걸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기회였다고 치자, 는 무슨 젠장!

 


부끄러움에 종이컵을 꽤 거칠게 잡아채고 백기는 흘리듯 뱉은 인사와 함께 다급하게 떠났다. 무슨 생각으로 쓴 커피를 도전한 건지. 가끔씩 과장님이 쥐어주는 카드와 함께 하는 커피심부름에서조차 봉긋하게 솟은 휘핑크림이 올려진 달디단 커피만 먹는 사람이. 한손에는 커피를 쥐고 반대쪽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해준은 또 입 꼬리를 올려 웃음 지었다. 책상 서랍에 있으려나. 며칠 전 동식이 억지로 쏟아 붓고 간 것들이 아직 남아있을 터였다. 딸기 맛이든 레몬 맛이든 장백기의 한없이 씁쓸한 입안을 헹궈주기엔 부족함이 없겠지. 해준은 어떻게 하면 장백기가 민망해 하지 않고 저가 준 사탕을 먹을까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며 종이컵을 수거함에 밀어 넣고 걸음을 옮겼다.

 


*


오랜만에 올려봅니다! 전력 참가는 오랜만이라 급하게 써보았네요 ㅠㅠ

제목짓는 센스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흑흑  



* * *


사랑니, 아래위턱의 영구치열 치아 중 가장 안쪽에 나오는 세 번째 큰 어금니. 백기는 푸른 컴퓨터 화면이 보여주는 사랑니의 정의를 읽다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눌러 그 창을 꺼버렸다. 위치는 지금 이런 설명 없이도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그딴 거 말고 제발 이 통증이 없어지는 방법 좀!


욱신 또다시 아릿한 통증이 백기의 어금니를 찔러왔다. 치통 따윈 생전 느낄 일 없을 거라 자부해왔던 건치의 상징 장백기였는데, -사실 건치인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미친 듯이 쑤셔오는 사랑니의 고통에 매일 밤 눈물 콧물 쏙 빼느라 백기는 요 며칠간 밤에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쓰으읍, 아파. 눈꼬리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않은 채 마우스 휠을 굴려 내려 건강 백과를 클릭했다. 그래, 건강 백과라면 내 아픔을 해소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은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백기는 어질어질한 눈을 한번 비볐다.


 ‘…. 큰 어금니 중 세 번째 위치인 제3대구치를 말하는데 구강 내에 제일 늦게 나오는 치아이다. 보통 사춘기 이후 17~25세 무렵에 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는 이성(異性)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때며 특히, 새로 어금니가 날 때 마치 첫사랑을 앓듯이 아프다고 하여 “사랑니”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또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시기에 나온다고 하여…….’


욱신! 아, 방금 이건. 진, 짜 아팠다. 바늘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뜨개질바늘같이 끝이 뭉뚝한 것으로 어금니를 사정없이 찔러오는 듯한 둔한 격통에 백기가 황급히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볼 살이 밀려 입술이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눌렀음에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심해지는 치통에 기어이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은 백기가 신음했다. 맞닿은 어금니를 여러 번 꽉꽉 물어도 기존의 끔찍한 치통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딴 게 첫사랑의 통증이라면 백기 저는 평생 첫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전원을 끌힘조차 없어 대충 화면만 끈 백기가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몸을 눕혔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이젠 한기까지 도는 몸을 다급히 두꺼운 이불로 감싸며 백기는 절로 나오는 앓는 소리를 참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비척거리며 들린 약국에서 무조건 잘 드는, 효과 좋은 진통제를 달라며 울먹인 백기가 용법도, 용량조차 보지 않은 채 손에 잡히는 대로 씹어 삼켜낸 약은 이빨의 통증을 가라앉혀주긴 커녕 빈속을 자극해 구토감만 유발할 뿐이었다. 깨 있어 봐야 고통에 괴로워할 뿐이란 게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제발, 제발 잠들어 버리자. 억지로 눈을 꾹 눌러 감는다. 속눈썹이 눈꺼풀에 눌려 잔뜩 구겨지는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고. 이불 속에 잔뜩 웅크린 몸을 숨기며 백기가 이를 악물었다.




* * *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두려움에 풀려버릴 것만 같은 다리를 애써 다잡으며 백기는 가까스로 병원 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백기는 병원이라면 질색을 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감기는 약국에서 약만 타 먹으며 버텼고, 주사는 꼭 맞아야 하는 필수 예방접종이 아니면 아예 맞아야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워낙 티를 내지 않는 탓에 주변 사람들은 백기가 병원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어린아이였을 때도 묘한 자존심만 세서 두려움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엄마에게 끝까지 괜찮다고, 무섭지 않다고 말하며 버텼단 말을 듣긴 했었다. 어렸을 때는 치기어린 마음에 버티기라도 했지, 어른이 되어서 병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으면 좋으련만 공포심을 태연함으로 가장하는 방법에만 능숙해졌으니.


 아플 때도 미련하게 상비약만 먹으며 버티는 백기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이 눈앞을 스쳐 갔다. 그래도 무서운 걸 어쩌랴. 내쉬는 한숨에는 깊은 고뇌와 두려움이 서려 있었지만 벌써 며칠 내내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느꼈던 괴로움의 크기가 조금 더 커 백기는 용기 내어 한 걸음을 뗀다. 위잉, 별다른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진동문의 예민한 센서를 원망스럽게 바라본 백기는, 문 열리는 소리에 일어난 간호사와 눈을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도 구면이라고 어쩐지 반가움마저 드는 건 서늘한 공기가 가득한 치과 내에서 그나마 저를 반겨줄 따듯한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장백기씨, 맞으시죠? 일찍 오셨네요?”

“아, 네. 조금 서둘러 와서….”

“10분 정도 뒤에 수술 끝나시니까 그때 선생님과 상담하시러 들어가시면 될 것 같아요. “

“아, 네 감사합니다.”



일찍 오긴 한 모양이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자 약속한 시각보다 약 30분 정도 앞선 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에서 일을 하는 동안의 치통은 견딜수 있을 만한 미미한 것이어서 백기는 오랜만에 제법 즐거워하고 있었다. 


근데 무슨 장난인지. 퇴근하고 치과로 걸어오는 그 짧은 거리부터 슬슬 이빨이 욱신거려 오기 시작하더니 접수를 마치고 대기하려 의자에 앉아있는 이 순간부터 긴장감이 차올라 배도 꼬일 듯 욱신거리고 있었다. 마치 몽둥이질이 쏟아지듯, 목구멍 바로 옆에 있는 사랑니 자리가 두근두근 떨리며 진동하고 있어 백기는 덜컥 겁을 집어삼켰다. 표현력이 부족한 백기 저로서는 이 통증의 정도를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견디기 힘들 정도란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밀려드는 통증에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들썩이고 다리를 구르길 몇 분. 마스크를 낀 서늘한 얼굴이 수술실에서 나타났다. 피곤한 듯 손목을 돌리며 한숨을 쉬던 이가 백기를 보고 마스크를 벗어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일찍 오셨네요.”




*



백른전 (7/19일)에 나오는 해준백기 소설본 [어디까지나 치료입니다] 

샘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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