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1. 장백기와 장백서

w. 박두부 

     

묵직한 상자를 간신히 들어 올리는 손이 힘없이 떨렸다. 울퉁불퉁한 미끄럼 방지 재질의 목장갑을 꼈음에도 상자의 무게 탓인지 몇 번이고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한 걸 무릎까지 동원해서 추켜올린 백기가 끙 하고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간신히 거실 한편에 놓인 책상 위로 상자를 올려놓은 백기가 계속 굽히느라 아려오는 허리를 툭툭 성의 없이 두드렸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 몸인데 아들 혼자 두고 어딜 가신거야. 툴툴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리는 백기의 투정을 듣는 이는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다 못해 싸늘할 정도인 집은 아직 가구가 완전히 들어오지 못해 곳곳에 비어있는 공간 덕인지 몰라도 더 휑해보였다. 괜스레 목장갑만 더 단단히 끌어올린 백기가 상자를 봉한 투명테이프를 잡아당겨 깔끔하게 뜯어냈다. 테이프를 돌돌 말아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백기가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겹겹이 쌓인 물건 가장 위에 올려진 사진. 웃고 있는 제 아이, 백서의 사진이 보이자 뿌듯하게 차오르는 마음을 감출길이 없었다.

 

어린이집 입소식 때 인지 품에 맞지 않아 헐렁거리는 큼지막한 남색 원복을 걸친 아이는 제가 입은 옷이 퍽이나 어색한지 입 꼬리만 살짝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이 알림장과 함께 줬다며 어머니가 백기의 손에 들려주었던 사진 몇 장을 급하게 이삿짐을 싸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상자 안에 흩뿌려 집어넣은 게 영 마음에 걸려 뒤늦게라도 사진을 갈무리 해 어디 구겨진 곳 없나 살핀 백기가 책상 밑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비닐봉투를 들어올렸다. 그리곤 어제 퇴근길에 구매한 액자를 꺼내 들었다. 다행히도 사진은 액자의 프레임에 사이즈가 딱 맞았다. 백서의 예쁜 모습을 액자틀에 넣은 백기가 컴퓨터 모니터만 달랑 놓인 책상 위에 액자를 줄맞춰 세웠다. 입소식 때의 백서, 간식시간에 나온 딸기를 두 손으로 욕심껏 들고 입 주변에 마구 묻혀가며 맛있게도 먹고 있는 백서, 어린이집에서 간 자연놀이 활동 때 만난 커다란 뱀을 쓰다듬으며 울음을 잔뜩 눌러 참고 있는 백서, 제가 잘 챙기지 못했음에도 마냥 밝게 큰 아이가 기특해 백기의 눈가가 슬슬 아릿해온다. 조금만 더 감성에 젖었다면 눈물이라도 흘렸을 만큼 찡하게 울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백기의 감성을 와장창 깨트린 건 거칠게 열린 쇠문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아이의 맑은 음성이었다.

 

“아빠아!”

“어, 백서야!”

 

곧장 저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 양 팔을 벌린 백기의 품으로 쏙, 들어온 아이가 뛰어오느라 헐떡이는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백기의 니트 자락을 부여잡고 얼굴을 파묻는다. 그리곤 얌전히 그 자세대로 그대로 멈춰라. 어, 짐 옮기느라 먼지가 가득 묻어 있을 텐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떼어낼까도 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만 묻고 가만히 있는 게, 백서가 요즈음 빠져있는 어떠한 놀이인가 싶어서 방해하지 말고 두자 싶은 백기가 아이의 등허리부근을 천천히 토닥여주자 갑자기 고개를 들어 백기와 눈을 맞추곤 히, 웃어 보인다. 뽀얀 분내가 금방이라도 폴폴 날릴 것만 같은 하얀 웃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백기가 무릎을 접어 백서와 시선의 높이를 맞춰주곤 눈을 접어 웃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웅, 집에 갔어!”

“어? 집에 가셨어? 언제?”

“지금!”

 

그리곤 할머니 할아버지가 밖에서 신기한 구름을 사줬다며 손을 빙글빙글 돌려 큰 원을 만들어내는 백서의 모습에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건 솜사탕이라는 거야.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빠를 따라 웃던 백서가 다시 한번 백기의 품에 들어가 꼭 안고는 갑작스레 몸을 떼 화장실로 타박타박 걸어간다. 화장실로 걸어가는 그 짧은 거리동안 흥얼거리는 노래의 가사를 대충 들어보자니 어린이집에서 부르는 활동 후에 손을 씻자는 내용 인거 같은데. 그걸 집에서도 충실하게 지키는구나 싶어 백기는 또 한 번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백서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배경음 삼아 열어둔 채로 방치 돼 있던 상자 속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필기도구, 컴퓨터 액정에 붙일 투명한 메모패드, 연필꽂이에 핸드크림, 머그컵.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늘 책상위에 상비 돼 있던 백기의 동반자와 같은 물건들을 꺼내서 죽 나열하던 백기가 책상 밑에서 네모난 모양의 서류가방을 꺼낸다. 취업 기념으로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던지듯 건넸던 가방에는 별다른 물건이 없어서 덜렁덜렁 흔들리며 참으로 가벼운 무게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열해뒀던 물건들을 서류가방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백기는 머릿속으로 제 사무실 책상을 떠올렸다. 파티션에 포스트잇을 붙일만한 코르크 칠판이 있으면 좋을 것 같고, 아직 데스크톱을 지원받지 못해서 노트북을 놓으므로 남들보다 책상의 공간이 훨씬 남는다는 걸 떠올리며 마치 퍼즐을 맞추듯 머릿속으로 물건의 위치를 하나씩 정해나간다. 머그컵은 노트북 왼편쯤에 놓고, 핸드크림은 자주 쓰니까 첫 번째 서랍에 넣고, 아 그러고 보니 서랍에 열쇠구멍이 영 말썽이던데 내일 가서 직원 분께 말씀드려야겠다. 따위를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던 백기의 시야가, 정확히 말하면 사무실을 떠올리던 백기의 상상 속 시야가 오른쪽으로 확 틀어지고, 눈에 들어차는 건 딱딱한 말투만큼이나 곧고 단단한 자세로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제 사수. 강해준 대리의 모습.

 분명 상상일터인데도 굳게 닫힌 입이 금방이라도 저를 부정하고 밀어낼 것만 같아서 백기는 입술을 앞니로 잘근 씹다가 머리를 휘휘 빠르게 흔들었다. 눈앞이 핑핑 돌며 어지럽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덕분에 해준의 모습이 사라진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손을 둥글게 말아 주먹을 가볍게 쥔 뒤 저릿해오는 미간과 관자놀이를 지압하듯 누르는 백기를 보고 막 화장실에서 나와 큼직한 실내용 털 슬리퍼를 신으려 낑낑거리던 백서가 발에 걸쳐져있던 슬리퍼도 멀리 던지듯 벗고는 후다닥 백기에게로 달려온다.

걱정스런 눈으로 제 다리에 매달려오는 백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한번 웃은 백기가 착잡한 눈으로 네모반듯한 서류가방을 쳐다봤다. 각이 져 있어 어디에 걸쳐있지 않아도 번듯하게 서있는 서류가방을 보니 떠오르는 해준에 울컥 화가 치밀어온 백기가 가방을 손가락으로 툭 밀어 넘어뜨렸다. 큰 사무용 의자의 등받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가방에 조금은 속이 시원해진 기분이 들었다가 얼굴을 붉힌다.

 

무슨 유치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장백기!

 

*

 

“아빠, 이게 뭐야?”

“이거? 짜장면이라고 해. 백서 처음 먹어봤나?”

“응, 색깔이 이상해.”

 

맛있으니까 먹어봐. 아빠가 덜어줄게. 역시 이삿날은 배달음식이지. 애써 합리화를 하며 시킨 동네에서 나름 입소문이 나있다는 중국집을 경비아저씨께 여쭈어 시킨 짜장면에 백서가 눈을 떼지 못한다. 면은 어린이집에서 간식으로 나오는 담백한 종류나, 가끔 어머니 집에 갔을 때 백서와 함께 먹었던 라면 정도밖에 없었던 백서로써는 우선 색깔도 독특하고, 윤기가 흐르는 짜장면이 참으로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골고루 비빈 뒤 작은 그릇에 덜어 포크와 함께 건네자 백서가 조금 망설여지는지 제 아빠를 한번 바라본다. 낯설어서 그런가 싶어 젓가락으로 면을 돌돌 만 백기가 입에 넣고 맛있게 씹어 삼켰다. 아빠를 보고 용기를 얻었는지 포크에 면을 빙글빙글 마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야무지게 입에 묻히지 않고 짜장을 입에 넣은 백서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맛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입에 들어있는 게 영 걸리는지 고개만 마구 끄덕이며 눈을 빛내는 백서가 귀여워 백기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통통한 볼을 양손바닥으로 잡고 이곳저곳에 뽀뽀를 퍼붓고 싶었지만 먹느라 정신없는 아이에게 할 짓은 아니겠지 싶어 간신히 참아냈다. 정신없이 포크에 면을 찍어 입에 밀어 넣는 백서를 보며 백기는 처음으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단 말을 온몸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

해백 육아물입니다. 연재는 처음이어서 두근거리네요 ㅠㅠ! 

장백기 26세/ 원인터네셔널 입사 한달차.

장백서 4세/ 백기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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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그래] 가끔은

단문2015. 2. 28. 19:37

[석율그래] 가끔은

 

 

더 얘기하면 나 화낼 거야. 장그래.”

 

순식간에 낮아진 목소리에는 간신히 눌러 담은 듯한 분노가 있었다.말이 나오는 대로 뱉어대던 그래가 조금 주춤했지만, 오히려 석율의 적반하장적인 문장을 듣고는 다시 꿈틀 미간을 좁혔다.

 

화요? 화는 지금 제가 내야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화가 나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는 거야.”

 

그만 하라는 듯 눈을 의식적으로 피한 석율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자 그래는 목덜미부터 뜨끈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먼저 잘못한 게 누군데. 지금 사과해야할 사람이 누군데 왜 저한테 뭐라고쏘아붙이는지. 그래는 치미는 분노를 견디기 힘들어 떨리는 손으로 아파오는 눈두덩을 꾹 눌렀다.

 

 

사귄지 1년여가 넘는 시간동안 두 사람이 다툰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벼운 웃음을 짓는 석율의 애교 섞인 치댐과 그를 적당히 밀어내는 그래. 남들이 보기엔 그저 조금 친한 직장동료.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가끔 보면 닭살이지만 대부분은 꽁트같은 커플. 딱 그 정도 선을 지키는 건 석율과 그래의 보이지 않는 룰 같은 거였다. 이정도 선을 지킵시다. 라고 딱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사귀다보니 서로 자연스럽게 두 사람만의 룰이 만들어진 경우였다.

 밝고 타인과 관계를 쌓는 게 익숙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상처도 많고, 그런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러한 모든 상황이 과부하에 걸릴 경우 한없이 우울해지기 일쑤인 한석율과, 석율을 밀어내고 귀찮다는 듯 털어대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석율 에게 다가가고, 관심을 가져달라 부르짖기도 하는 장그래. 두 사람은 적정한 온도차를 조절해가며 지금껏 잘 사귀어오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지킨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커플이었다.

 허나 여느 커플이나 그렇듯 다툼은 항상 사소한 데서 일어났다. 그저 단순한, 한쪽의 야근 때문에 약속이 깨진. 평소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그런 사소한 일. 석율이 우는 소리와 함께 약속을 파하는 사과 전화를 했고, 그래도 별다른 반응 없이 웃으며 넘길 수 있던. 허나 그래는 저번 주 주말에도 석율이 집에 내려가 봐야 한다며 갑작스레 깼던 약속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 당시는 아무생각도 없던 그 일이 오늘의 상황과 겹쳐지자 순식간에 서운함이 몰려와서 그래는 뚱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었다.

 

그럼 앞으로도 만나지 마시던가요. 자꾸 이렇게 약속 깰거면.”

 

그래가 뚱한 목소리로 뱉긴 했지만 평소였으면 아이 왜 그래~미안하다니까!’ 라며 애교 섞인 말투로 달래줬을 석율 또한 그래의 말에 날카로운 반응을 뱉었다.

 

“-? 무슨 말을 그리해?”

그렇잖습니까. 자꾸만 깰 건데 약속 잡는 의미가 있나요?”

“...장그래.”

 

얘기 좀 해. 내가 탕비실로 내려갈게. 차갑게 뚝뚝 끊어지는 말과 함께 끊어진 전화가 뱉어내는 차가운 기계음에 그래가 울컥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전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이제 막 퇴근준비를 하려 재킷을 입던 김대리가 화들짝 놀라 왜 그러냐 물어왔지만 차마 웃지도 못한 채 꿀꺽, 분노를 삼켜내고 아니라 짧게 답한 뒤 탕비실로 급하게 향했다. 분노로 점철된 그래의 발걸음이 복도를 쾅쾅 울려 강대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백기마저 힐끗 바라 볼 정도였다.

 

 

탕비실에 먼저 도착해 복사기에 몸을 살짝 기대고 있던 석율의 눈이 그래를 보자 번뜩 빛났다. 왔냐는 인사도 없이 쏘아붙이듯 뱉어내는 석율의 말에 그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아까 그거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자꾸만 약속 깰 거면 차라리 만나지 말자고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문장인거 알지? 말 똑바로 해.”

글쎄요, 오해일지 아닐지는 한석율씨가 판단하시면 되겠네요.”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듯 넘나드는 말에 잔뜩 솟은 가시가 두 사람을 난도질하듯 찔러온다. 저도, 상대방도 상처받는 건 알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 두 사람은 이를 악물었다.

 

 

*

 

 

말을 마치고 몇 번이고 더 뒷머리를 긁적이던 석율이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열을 식히려는 건지 손가락을 곧게 펴 파닥파닥 흔들어대기도 하고 퍽이나 부산스럽지만 그래는 반면에 얌전했다.

단지 이빨로 통통한 제 입술을 못살게 굴 뿐이었다. 분노에 차 그래에게 모진소리를 뱉긴 했지만, 그 하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입술만 깨물고 있는 그래를 보는 석율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허나 그래가 뱉었던 말이 마치 저와의 만남 자체를 끊어내려 하는 것으로 들려 도무지 화가 안날수가 없었다. 물론 저번 주말도, 오늘도 얼마나 둘이 기대를 했던가. 먼저 만나서 어디를 가고, 그 다음에는 이걸 보러가고 계획을 짜느라 신났던 건 오히려 석율쪽이 더 했던지라 약속을 깬 입장인 저가 할 말은 없었다. 허나 평소였으면 유하게, 아니면 시크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을 그래의 반응에 당황스럽기도 했던지라 오히려 더욱 버럭 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두 사람의 다툼이 잦지 않았던 건 두 사람 모두 참는 성향이 있다는 게 큰 이유였다. 괜한 다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 다투며 감정 소모할 시간에 그저 둘이서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놀고 싶다. 라는 게 그래의 의견이었고 석율도 그에 동의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지금껏 웬만한 서운한 일은 가슴에 묻고 원만하게 지냈던 거였는데. 석율은 힐끗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꽤나 찌르르했던 설전 끝에 찾아온 침묵이 이어진지 벌써 십 여분. 그래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푹 숙인 채 입술만 꽉꽉 물고 있고, 석율은 한숨만 푹 쉬고 있었다.

 

쉽게 달아오른 뜨거운 머리와 입이 뱉은 말들이 창피할 만큼 석율은 어느새 화가 많이 가라앉아있었다. 마음에 담아둔 말을 쏟아낸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무엇보다 저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래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는 게 화가 가라앉은 결정적 이유였다. 석율이 좋아하는 그래의 모습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물끄러미 앞만, 정면만 바라보는 꿋꿋한 아이였으니까.

 

어쩔 수 없으니 저가 지고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석율이 꿀꺽 목울대를 한번 울리고는 그래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장그래.”

 

역시나 대답은 없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씁쓸함에 위가 쓰렸다. 장그래. 그래야. 한층 다정해진 석율의 목소리가 그래의 어깨를 흠칫 울렸다.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게 안심돼서 한번 메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훑던 석율이 용기내 그래의 양 팔뚝을 그러쥐었다.

평소보다 뜨끈한 체온에 많이 화났나 싶어 난감했던 석율이 고개를 조금 숙여 여전히 땅만 보고 있는 그래의 얼굴을 살핀 순간 놀라 저도 모르게 헉, 헛숨을 뱉어냈다.

 

, 장그래. 그래야. 울어?”

 

언제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건지 동그란 눈매 가득 그렁그렁 들어차있는 맑은 액체가 똑똑 떨어지다 못해 양 볼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술만 깨물 뿐 그 흔한 물기어린 소리하나 내지 않은 그래의 모습에 석율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같이 꾹꾹 눌러 참고 있었을 그래가 안쓰러워 석율은 서둘러 그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의 반항도 없이 끌려 들어온 여린 몸이 그제야 가볍게 떨린다. 허나 석율이 그래의 등허리를 감아와도 그래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석율의 허리에 손을 감아오지도 않았다. 많이 서러웠구나. 우리 그래. 석율은 제 자신을 자책하며 그래의 몸을 더욱 꼭 안았다.

 

미안해. 장그래. 정말 미안. 내가 약속 깨서 서운했을 텐데 나쁜 말이나 하고.”

“.....니다.”

?”

“...아닙니다. 한석율씨 잘, 못 흑, 아닙니다.”

그래야..”

 

석율이 고개를 틀어 뜨끈한 그래의 볼에 가벼운 입술을 내리자 그래가 기어이 서러운 울음소리를 터뜨린다. , . 아이처럼 헐떡이는 숨을 막지도 못한 채 그래는 덜덜 떨리는 몸을 하고선 그제야 석율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볼을 석율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기대왔다. 헐떡이며 우는 와중에도 계속 제,. , 잘못, 훌쩍, . 띄엄띄엄 말을 해오는 그래의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쉿, 석율이 다정하게 말렸다.

 

, 괜찮으니까 그래야. 그만 말하고, 뚝하자.”

“..., ,석율씨.”

, 그래야.”

나 헤어지자고, , 말한, 거 아닙,,.”

 

새삼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아까보다 더 몸을 들썩이는 그래를 다독이며 석율은 몇 번이고 귓가에 다정한 말을 쏟아냈다.

"그럼, 알지 우리 그래가 그럴 리가.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우리 다음 주에는 꼭 놀러가자. ?"

 

그제야 안심되는 지 작게 끄덕이는 조그마한 머리가 어깨에서 느껴지자 석율이 목으로 웃고는 그래의 드러난 흰 목덜미에 쪽쪽 입맞춤을 퍼부었다.

 

다음주에는 12일로~?”

“....좋습니다.”

 

분위기 파악 하시죠. 라며 발을 세게 밟아 올까봐 언제든 뒤로 뺄 준비를 하고 있던 석율의 구둣발이 흠칫 흔들렸다. 석율의 말에 몸을 더욱 기대오며 수줍게 뱉어낸 그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율은 귀부터 얼굴,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아까와는 다른 열이 차올라 급히 제 얼굴을 부채질 하는 석율과, 그런 석율의 움직임에 작게 웃는 장그래가 있었다.

 

 

*

 

와 석율그래 제대로는 처음써본다(벙찜)

얼마전 트친분과 이야기나눴던 석율그래의 성격? 느낌? 을 바탕으로 두사람의 다툼

적정한 온도차를 유지하며 무난히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두사람이 좋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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