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5월 케이크 스퀘어 레드존 H-32에 나오는 해준백기 소설본 [貪(탐)나는 비밀] 샘플입니다.

*이어지는 페이지 아닙니다.

 

*표지

사양: 40페이지/ 4500원/ 중철제본/ 휘라레지/ R19 성인본입니다.

현재 구두예약 * 통판 예약 받고있습니다~!

http://me2.do/5ic37Qaz

 

*샘플

 

 

 

3. 강해준과 ???

 

강해준은 소위 말하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을 거쳐 학창시절, 더해 군제대후 곧바로 한 취업으로 상사맨 타이틀을 땄을 때조차 해준의 삶에는 막힘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큰 좌절도 맛본 적 없었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수나 실패 따위도 없었다. 몇몇은 강해준 그 새끼가 운이 억세게 좋은 거지. 라며 시기어린 숙덕거림을 보내긴 했지만, 해준은 운조차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드는 사내라는 건 그들도 결국은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해준은 가히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딱 맞을 만한 모습을 하곤 했으니까.

방에 틀어박혀 며칠간 필요할 때 빼고는 나오지 않더니 결국 떡하니 원하는 성적을 냈고, 원하는 대학을 갔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고. 남들은 들어가기조차 힘들다는 원인터에서 가장 빠른 대리승진까지.
잘 닦아놓은 길을 편안히 걸어가기만 한 게 아닌, 잘 닦아져 있는 길을 저가 더욱 단단하게 견고하게 나무를 덧대고 철심을 박아 튼튼히 만들며 그, 강해준은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결점 -동기들은 그리 표현하곤 했다- 이 있다면 바로 젊은 나이에 생긴 이혼남 타이틀일 터였다. 물론 해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어느 날 해준이 담담하게 저의 이혼소식을 전했을 때 동식은 마시던 술을 뱉었고, 성준은 거짓말 하지 말라며 들고 있던 오이스틱을 해준의 입에 쑤시듯 집어넣었다. 준식은 오늘도 술값을 내지 않으려 슬쩍 걸치던 코트가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한 채로 그저 벙한 표정으로 해준의 얼굴만 살필 뿐이었다. 당사자 빼고는 전혀 괜찮지 않은 분위기의 술자리였지만 해준은 동기들의 반응을 눈치 챘음에도 묵묵히 홀로 술병을 기울여 맑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을 뿐이었다.

어, 야. 자작은 마, 맞은편 사람이 재수 없거든! 하며 술병을 빼앗아간 맞은편 자리의 성준이 해준을 향해 병 입구를 기울이려다 씨발. 욕지기를 중얼거리더니 안 그래도 이리저리 뻗쳐있는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마구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술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 입구를 입술로 머금고는 그대로 꿀꺽 꿀꺽. 야, 야! 말리려는 동식의 목소리에도 점점 더 위로 솟아오르는 술병과 뒤로 젖혀지는 고개가 사뭇 씩씩했다. 결국은 반 가까이 남아있던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성준이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있는 그대로 해준을 향해 보이며 씩씩, 거친 목소리를 낸다.

 

“야, 강해준. 이 새끼야.”
“뭐, 왜.”
“뭐? 이혼? 이혼이라고 했냐. 지금?”
“응.”
“야아, 하대리야. 그만해. 지금 싸움거..”
“그래 싸움 건다. 씨발, 야, 너네도 들었지 이혼이란다.”
“…….”
“야, 강해준. 우린 너 결혼한 것도 처음 듣거든?”

 

그와 동시에 동식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성준의 욕설 섞인 말에 미간만 조금 찌푸리던 해준이 그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고, 해준의 그 얼굴이 성준의 화를 더 부추긴 건 명확한 사실인 듯싶었다. 두툼하게 살집 있는 손바닥으로 술집 상을 쾅, 내려쳤으니까.
옆에서 준식이 성준 덕에 튄 술이 비싼 셔츠에 튀었다며 성질을 부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임을 알아채곤 결국은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뽑아 자국을 스스로 벅벅 닦아냈다.

 

“아, 그랬나?”
“아, 그랬나아? 이 새끼가 진짜 답 없네! 결혼사실 말한 것 보다 이혼소식 말한 게 먼저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야야, 하대리야 진정해. 강대리 과묵한 거 뭐 하루 이틀이냐?”
“야, 김동식. 지금 이게 과묵한 거냐?”

 

어떻게든 성준의 화를 가라앉히고 해준을 두둔하려는 동식과, 그런 동식의 노력 따위 관심 없다는 듯 해준의 무심함에 치를 떠는 성준, 그리고 조금 놀란 표정은 여전했지만 별다른 반응이나 변명 없이 그저 멀뚱히 성준만 바라보는 해준. 참으로 정신없는 풍경이었음에도, 아까 잠시 동요했을 뿐 어느새 코트를 완벽히 차려입고 스마트폰을 심드렁하게 매만지고 있던 준식이 자꾸만 들썩이는 술상에 신경질을 부리며 야채바구니에서 배춧잎 두어 장을 성준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탈탈 털리지 않은 배춧잎이 머금은 물기 덕에 배는 기분 나빠진 성준이 준식을 죽일 기세로 노려봄에도 준식은 빙글 그저 얄미운 미소만 입에 걸 뿐이었다.

 

“그래서, 왜 이혼한 건데?”
“...음, 이혼하자던데?”
“허, 그게 다야?”
“응.”

 

성준의 패악질 따윈 익숙하다는 듯 가볍게 넘긴 준식은 곧바로 해준을 바라보며 덤덤히 질문을 던졌다. 그에 조금은 멍하게 뱉은 해준의 대답이 답답한지 성준은 아프도록 제 가슴을 퍽퍽 쳐댔고, 동식은 그런 성준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안 물어봤어?

 

“새 애인이 생겼대.”
“....뭐?”

 

기어이 못 참고 몸을 불쑥 일으킨 성준이 뭐라 욕설을 뱉기보다 동식의 반응이 이번엔 빨랐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해준의 어깨를 부여잡고 해준아, 그걸 가만히 뒀어? 라며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채 성질을 내는 동식의 반응에 슬쩍 웃은 해준이 동식의 허리를 대충 두드려주며 말라오는 목을 다시금 축였다. 저에게만 집중된 눈 세 쌍이 부담스러워 눈을 슬쩍 내리 깔은 해준이 손을 휘저어 여직 서있던 성준을 앉혔다.

 

“뭐, 이미 서로한테 관심 없던지 오래야. 뭐 별거라고.”
“야, 그래도 너 이혼남 타이틀이 꽤나 크다?”
“애인 생겼다는 걸 가만둬? 아주 콩밥을!”
“아 하성준 오버는 진짜. 떠난다는데 붙잡겠냐? 강해준이?”

 

준식의 타박에 슬쩍 주먹을 쥐었다 편 성준이 계속 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해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무덤덤한 모습.

 

“아무튼 그래서 오늘 도장 찍고 끝.”
“참 쉽게 말한다. 진짜.”
“아이 문제 때문에 좀 끌었던 거지 마무리는 쉽던데.”
“.....아이?”

 

벌써 두 번째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 건 동식마저 충격인지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술을 꾹 깨물다가 통통한 뒷목을 손가락으로 주물거리다가를 반복했다. 간신히 뱉은 목소리는 불쌍하게도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적할 성준과 준식 조차 할 말을 잃은 상태여서 동식의 떨리는 목소리는 꾸역꾸역 목을 타고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자, 자세히 좀 말해볼래 해준아?...

 

*

 

동기들끼리 술만 마시면 간간히 나오는 해준의 이혼이야기는 그들에겐 아직도 나름 핫 이슈였다. 이성에게 관심도 없어 보이는 철벽남 강해준에게 사실은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썰렁한 부부사이에서 난 아이가 어느새 5살이 되었다.
술자리마다 술안주처럼 잘근잘근 씹히듯 반복되는 저의 이야기가 영 불만인지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술만 마시곤 했던 해준 이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불쑥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만큼은 술잔을 내려놓곤 스마트폰을 켜 사진첩에 아예 따로 폴더로 만들어져있는 빼곡한 아이의 사진을 슬쩍 내밀어 보여주곤 했었다.
여전한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묘하게 밝은 얼굴로 자꾸만 입 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해준의 표정변화가 웃기고 신기해서 자꾸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란 것을 해준이 눈치챌 날은 언제일지.

 

“이름이 뭐랬더라? 강..다,”
“강다연.”
“다연이가 올해 5살인거야?”
“응, 예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양쪽으로 묶은 게 제일 귀여운 거 같지 않아?”
“....어, 뭐. 예쁘네.”
“노리지마.”

 

동조하듯 맞장구 친 것뿐인 성준의 말에도 지긋이 노려보며 견제하듯 말하는 해준이 웃겨 다들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행여나 대놓고 웃었다가 강해준이 다시 철벽남으로 돌아가 겨우 풀렸던 차디찬 표정까지 숨길까봐. 이런 모습을 보면 또 나이가 두 살 어린 게 맞는 것 같다가도 액정을 소매로 깨끗이 눌러 닦으며 아이의 사진을 향해 덤덤히 웃어 보이는 모습은 또 애 아빠답게 든든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엔 언제 만난다고?”
“음, 저번 주에 만났으니까 3주 뒤쯤.”
“꼭 한 달에 한 번씩만 만나야해?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잖아.”
“애초에 약속한건 한 달에 한 번씩이야.”

 

그렇게 사진을 애틋하게 바라 볼 거면 아예 만나는 날을 늘리면 될 텐데 또 그건 제 신념에 반하는 일인지 고집을 피워대는 꼴이 영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혼할 당시에도 아내와 헤어진다는 것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해준은 유독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약한 모습을 보였다. 다연의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며 꿀꺽 꿀꺽 술을 삼켜대던 해준이 결국 몸을 무너뜨리고 뱉어내는 숨에 약간의 울음기가 묻어났던 건, 서로 암묵적으로 묻어둔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

 

속이 쓰릴 정도로 먹은 적은 별로 없었는데, 어제는 저도 모르게 동기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 같아 해준은 숙취로 쑤셔오는 속보다는 창피함에 머리를 짚었다. 은근히 저를 동생 대하듯 하는 동기들은 의식적으로 어제 이야기를 피했지만 안타깝게도 해준은 지금껏 아무리 머리꼭지까지 술에 저는 한이 있어도 필름이 끊긴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어제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을 대변해주듯 눈가도 화끈하게 달아올라 욱신거리는 것도 한몫했고.

 

저가 유독 아이에게만은 물렁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는 건 해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사진만 봐도 슬슬 풀리는 얼굴 근육을 붙잡을 틈도 없었고, 일주일에 두어 번쯤 하는 짧은 저녁통화에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연이의 맑은 목소리와 ‘아빠’라는 두 글자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어서 해준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시나 술은 사람의 약한 모습을 너무도 쉽게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물질이었다. 어젠 왜 그리도 다연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던지.

 

후, 깊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털썩 앉자 옆에서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한번 울렸다.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시야 끝에 닿아오는 건 제 부사수. 제 밑에 들어온 지 어느새 한 달 가까이가 되었지만 백기와 해준의 관계는 마치 어제 처음 만난 사람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둘 사이의 대화는 사무적인 것 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무리 철강 팀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부서라 해도 여직 한 번도 해준은 저의 부사수와 따로 식사자리든 술자리든 가진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라고하면 변명이겠지. 솔직히 해준은 제 부사수와 둘만 시간을 가지며 사수-부사수간의 돈독한 정을 쌓을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부서에 배치 받고 인사말을 끝내자마자 이 발칙한 부사수는 곧바로 사업아이템 보고서를 해준의 앞에 들이밀었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표지와 문서양식, 색색 깔로 구분된 표와 차트. 야, 우리인턴 대학교 때 별명이 PT마스터였다더라. 자랑하듯 몇 달 전에 해준의 파티션에 기대서 주절거리던 성준의 말이 다시금 해준의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다.
구성력, 기승전결하며 문장의 첨삭하며.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는. 아니 오히려 별명이 허투루 만들어 진 건 아닌지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된 보고서였다. 그것을 해준은 굳이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중요한건 기본 문제지만.
불쾌해지는 마음을 정리할 틈도 없이 해준은 몇 번 펄럭거려본 서류뭉치를 백기에게 도로 내밀었었다.
대리님? 의아한 듯 동그란 눈이 안경알 밑에서 반짝였지만 해준은 그런 백기의 모습조차 고깝기 그지없었다. 

 

“가져가세요. 읽을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어, 어디가 이상합니까? 철강 팀 사업보고서를 보면서 제 다름대로 아이템을 구축,”
“지금 이건 어디가 이상하고 안 이상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장백기씨. 장백기씨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제가 이야기해줄 것은 없는 것 같네요.”

 

어린아이도 아니고, 26살이라는 청년이 짓기엔 너무도 어린 티가 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겠는지 얼굴이 서서히 붉어져가는 백기의 얼굴을 보면서도 해준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감흥이랄 것도 없이 어쩜 이리도 철이 없을까. 한탄만 했을 뿐.

 

다른 부서에서 해준의 백기를 향한 태도를 소위 ‘배추 절이기’ 라 칭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놓고 성준이 다가와서 배추 좀 그만 절이라 타박하곤 했으니까. 뭐 그것이 해준이 의도했든 안했든 백기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한몫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백기씨, 코트라 자료 프린트 했습니까?”
“아, 네. 여기 있습니다. 대리님.”

 

사소한 복사나 단순한 문서처리를 시키면 눈을 세모꼴로 뜨고 반항기어린 반응을 보였던 제 어린 부사수는 이제 꽤나 차분하고 담담하게 저의 현실을 받아드리는 듯싶었다. 차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자료를 내미는 백기를 보며 해준은 의도치 않은 저의 무시가 이뤄지는 동안 백기가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아직 기본기가 다져졌다고 말하기엔 –해준의 기준으로는- 퍽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백기는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

 

지잉.

 

해외 바이어와의 기나긴 설전 끝에 꽤나 만족스러운 확답을 받아낸 해준은 그제야 긴장감에 잔뜩 세웠던 허리에 힘을 풀었다. 귓가에서 뜨끈해진 블루투스를 빼 서류철 위로 대충 던져놓은 해준이 뻣뻣해진 뒷목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주무르던 중에 핸드폰이 한번 울렸다.
간결하게 울린 진동에 깜빡이는 액정을 가볍게 문지른 해준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시간을 보니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하원해 집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이제 막 글자를 배운다던 다연이 제 엄마의 핸드폰으로 띄엄띄엄 보냈을 몇 자의 글자가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몇 번이고 액정을 달뜬 눈으로 바라보던 해준이 문자를 보관함으로 옮겼다. 몇 번이나 화면도 캡처했다. 그것도 모자란 지 눈을 떼지 않고 하염없이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해준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기의 시선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해준은 마냥 딸아이의 문자에 푹 빠져있었다.

 

[아ㅃㅏ 사랑헤ㅛ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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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준도 5살짜리 딸아이를 가진 아빠였습니다!(반전도 아님)

 

 

 


2. 강해준과 장백기

 


가기 싫어.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잠도 이미 한참 전에 깨 졸리지도 않으면서 이불에서 괜히 꾸물거리던 백기는 허리에 올라타서 박수와 함께 저를 재촉하는 백서의 똘똘하지만 조금은 과격한 모닝콜 덕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몸은 일어났어도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서 밍기적 거리는 백기의 몸을 단번에 침대에서 꺼낸 건 백서의 웃는 얼굴과 아빠랑 같이 씻고 싶은데. 하는 귀여운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그 말에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같이 벌떡 일어난 백기가 백서를 품에 안고 몇 번이나 그 뽀얀 분내와 사랑스러운 아이의 체온을 즐기다 함께 욕실로 향했다. 신이 난 듯 백기의 손을 잡고 꿈속에서 용을 봤다느니, 그 용이 등에 태워줘서 하늘을 날았다느니 하는 웅장한 꿈속 이야기를 설명하던 백서는 욕실로 발을 딛기 전에 등을 구부리곤 슬리퍼를 백기의 앞에 가지런히 짝을 맞춰 놓고는 저는 맨발로 화장실 타일을 밟았다. 그 자연스러운 제 아들의 배려에 백기는 괜히 찡해오는 눈가를 누르며 맨발로 다급히 들어가 백서를 뒤에서 끌어안고 정수리에 뽀뽀를 퍼부었다. 이뻐, 장백서. 쪽, 누굴 닮아서어. 쪽쪽

 

“아빠, 슬리퍼 안 신으면 발 차가워요!”
“아빤 괜찮으니까 백서가 신어. 그리고 우리 이따가 백서 꺼도 사러가자.”
“아빠랑 똑같은 걸로?”
“응, 똑같은 걸로.”

 

그에 좋다며 볼을 발그레 붉힌 백서가 히죽 웃어왔다. 백서와 같이 산지 고작 이틀밖에 안됐는데 벌써부터 이리 행복하면 어쩌자는 건지. 아까 일어나기 싫어 잔뜩 뾰족했던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느끼며 백기가 아이에게 뽀로로 칫솔을 내밀었다. 그리고 폴리 치약도 그 위에 쭈욱 동그랗게.  아빠, 나 혼자 닦아요. 보세요! 자랑하듯 조금은 서툴지만 열심히 칫솔질을 하는 제 아들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세상일이 그리 쉬워, 백기씨?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없다구우.
 커피를 내밀며 쯧쯧,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온 석율이 백기가 컵을 받아들자 곧바로 어깨에 손을 둘러온다. 평소였으면 재빨리 밀쳐냈을 것도 힘도 의욕도 아무것도 생기지 않아 그저 커피로 입만 축인 백기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온다. 맞은편에서 서류 파쇄를 하다 말고 몸을 돌려 안쓰럽게 저를 쳐다보는 영이의 시선도 느껴졌지만 백기는 그저 묵묵히 땅만 바라봤다.

 

“백기씨 절여지는 소리가 글쎄 16층까지 울리는 거 있지?”
“아니, 그걸 절여진다고...!”
“절여지는 거지. 응? 유명하잖아 백기씨. 원인터 철강 팀의 김장마스터 강대리는 오늘도 열심히 입사 한달차 장백기를 굵은 소금으로 푹 절이고 있습니다.”
“...말을 맙시다.”

 

마치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라도 하듯 진지하게 말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손가락 끝을 펴 백기의 가슴을 콕 찔러오는 얄미운 행동에 기어이 백기가 석율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그 탓에 종이컵에서 출렁인 커피가 셔츠 소매며 구두에 조금 튀자 백기는 안 그래도 우울했던 기분이 더더욱 깊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걸 느꼈다. 후우우.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오듯 뱉은 어두운 한숨에 그제야 석율도 장난을 멈추고 백기의 어깨를 도닥였다.

 

“힘들지? 이럴 때는 동기밖에 없지말입니다! 우리 오늘 밤에 한잔 쭉 할까? 동기들끼리?”
“저 오늘 일찍 가봐야 합니다.”
“뭐? 왜! 야근 때문도 아니고~! 백기씨 위로해주려는 우리의 성의를 무시하려고 하는 거야?”
“무시가 아니라 집에...., 하여튼 앞으로 술자리 잘 못 갑니다.”
“왜? 집에 뭐라도 숨겨뒀어? 응? ”
“아닙니다.”

 

아쉽다는 듯 영이마저 제안했지만 백기는 일찍 어린이집에 가 백서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했기에 한 번 더 공손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옆에서 자꾸만 찡찡거리는 석율에게 성의 없이 휘적거려 타준 믹스커피를 내밀어 입을 막아버렸다. 백기는 꿍얼거리면서도 커피를 홀짝이는 석율을 보다 이곳에 그래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의 차분한 표정에는 뭔가 거절하기 애매한 무언가가 있고, 백기가 그걸 쳐낼 수 있을지가 정말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탕비실에 걸린 시계를 보자 점심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기에 그를 핑계 대며 백기는 서둘러 탕비실을 나왔다. 복도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보이는 유리문에 숨이 턱하니 막혀오는 착각이 들었다. 고작, 투명한 유리문일 뿐이었는데 저 곳을 넘어가면 또 다시. 백기는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다 슬쩍 구두코를 내밀었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 예민하게 반응해 열리는 유리문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역시나 먼저 와서 앉아있는 강대리의 굳건한 옆모습에 백기는 답답해져오는 넥타이를 한번 정리하곤 제 자리로 가 조용히 앉았다. 분명 끽, 하면서 의자가 가볍게 밀리는 소리가 났음에도 저를 쳐다볼 생각조차 않고 일에만 집중한 강대리를 힐끗 티나지 않게 조심하며 바라본 백기가 또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팔꿈치를 기댄 제 책상을 바라보자 밝은 빛을 내며 켜져 있는 노트북 외에는 무척이나 깨끗했다.

집에서 챙겨온 머그잔, 볼펜꽂이, 몇 권의 책은 이미 아침부터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며 위치를 옮기길 반복했다. 파티션에 메모패드도 벌써 두어 번은 뗐다 붙였다 했고. 백기는 서랍을 열어 물티슈를 한 장 빼 노트북 모니터를 슥 닦았다. 역시나 묻어나는 게 없이 깨끗했다. 그럴 수밖에. 이 행동도 벌써 네 번째니까. 먼지가 쌓일 틈조차 주지 않고 물티슈로 꼼꼼히 이곳저곳을 닦아대는 행동에 차과장 조차 출장을 나가는 길에 백기의 등에 대고 “장백기씨, 혹시 정리 벽이야?” 라고 할 정도였으니.

허나 안타깝게도 백기는 오히려 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축에 속했다. 청소를 자진해서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거니와 늘 어머니께 등짝을 맞아가며 억지로 청소를 하게 된다 해도 차라리 처음상태가 나을 정도로 이게 정리인지 어지럽히는 건지 모를, 그런 청소엔 적합하지 않은 마이너스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실력을 가진 백기가 자진해서 자꾸만 제 책상을 닦고 쓸고, 물건들의 배치를 재정비 하는 건 전적으로 저의 사수 탓이라 백기는 생각했다.

‘일은 지 혼자 다하지.’


불만을 형상화 한 듯 잔뜩 부푼 입술을 다시 입 안으로 말아 넣어 꼭꼭 앞니로 몇 번 씹던 백기가 한 번 더 볼펜꽂이에 든 볼펜들을 전부 꺼내더니 차곡차곡 색깔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좌르륵, 하는 거슬리는 소리까지 내가며 사무실에서 딴 짓을 하는 백기를 분명 알고 있음에도 해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키보드만 무심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차라리 일을 몰아서 주거나, 아니면 자원팀의 하대리님 처럼 버럭버럭 성질이나 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자 백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배추 절이기가 아닙니다. 한석율씨. 이건, 그냥. 투명인간 취급이라고요.

*

 

흔한 사수의 부사수를 가르치려는 의욕도 없다. 무언가를 알려주고, 저에게 다시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사수의 태도 또한 없다. 해준은 그저 백기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석율이나 제 동기들은 배추 절이기라 명명한 해준의 백기 교육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고 백기는 생각했다- 교육이란 건 어쨌든 1:1이든 1:다수든 무언가의 접촉이나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차라리 배추 절이기가 낫지. 절이려면 어쨌든 그 절이는 물체에 관심을 줘야하잖아? 잘 절여지고 있나. 촉촉한 소금물에 배추가 흐물흐물 거리고 있나. 간이 짭짤하게 배었나. 까지 생각하던 백기는 제 꼴이 이미 절여져 흐물거리는 배추나 별다를 게 없구나 하는 결론까지 떠올리곤 씁쓸하게 웃었다. 맞네, 배추 절이기. 누군가의 관심 없이 혼자 절여지고 있는 불쌍한 배추.

 

강해준은 처음부터 장백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첫날부터 지금껏 백기에게 제대로 된 일을 주지 않을 리가 없지. 철강 팀이 한가하게 일이 없는 팀도 아니고, 홍대리나 강대리 책상 위에 가득 쌓여있는 색색깔의 서류철만 해도 상당하고, 심지어 사무직인 다인씨마저도 계약서 작성이며 대리들을 서포트하느라 상당히 분주하게 돌아다니는데 그 바쁜 사무실에서 백기는 홀로 멀뚱히 앉아있기 일쑤였다. 지금처럼. 늘.

 

“장백기씨.”
“...네?!”

 

오늘은 아침에 인사할 때 빼고는 처음 들어본 듯한 해준의 목소리에 백기의 어깨가 펄쩍 튀었다. 너무 놀라 다급하게 대답하느라 삐끗한 목소리가 민망해 뒤늦게 뒷목을 주물 거리던 백기가 슬쩍 고개를 돌려 해준을 바라봤다. 그러자 곧바로 마주쳐오는 곧은 시선에 어쩐지 지금껏 하고 있던 생각이 행여나 들킬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자 해준은 그런 백기의 행동에도 별다른 말없이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제 코트라 건 때문에 자재창고에 샘플들이 구분 없이 되어있을 겁니다. 가서 종류별로 잘 분류하세요.”
“아,..샘플 정리 말씀이십니까?”
“네, 아, 정리하면서 재고도 확인하구요.”
“...네. 강대리님.”

 

비척비척 일어난 백기가 뒤로 밀린 의자를 다시 깊숙이 밀어 넣고는 자재창고로 향했다. 묘하게 쳐져있는 어깨며 가라앉은 뒤통수가 마음에 걸릴 만도 하건만 해준은 무심하게 쳐다보다 금방 눈길을 돌렸다.

 

*

 

콜록, 옷가지며 머리카락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털었다고 생각 했는데도 여전히 남아있는지 이제 막 어린이집 현관에 들어서려던 백기가 작게 기침을 했다. 코끝도 찡하고 목구멍 속도 간지러운 게 얼른 집으로 가서 몸을 씻어내고, 옷도 털어서 바깥에 널어놔야겠다. 등을 생각하던 백기가 갑자기 다리에 와 닿는 무게에 깜짝 놀라 쳐다보자 백서가 어느새 어린이집 가방까지 매고 백기의 다리에 매달려있었다.

 

“아빠아. 왔어요?”
“어, 응. 백서 오늘 잘 놀았, 콜록. 어?”
“아빠, 감기 걸렸어요?”
“응, 아니? 먼지 때문에.”
“먼지. 나 먼지 아는 데에. 그거 지저분한 거라고 했는데.”
“응, 맞아 지저분한 거. 아까 아빠 청소했거든. 얼른 백서랑 집에 가서 목욕하면 깨끗해질 거예요. 걱정 마.”
“백서랑 같이 목욕해요?”
“응.”

 

그에 아빠를 걱정하느라 조금 찡그렸던 얼굴을 펴고 이가 보일정도로 환하게 웃던 백서가 백기의 손을 잡고 다급히 어린이집 문 밖으로 끌었다.
어, 어어. 백서.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백서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짐짓 엄한 소리를 내자 후다닥 백기의 앞에 선 아이가 배꼽위에 양 손을 올리곤 공손하게 허리를 접어 제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인사를 한 백서가 다시 백기의 손을 야무지게 잡고 이끌자 백기가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백서를 따랐다. 목이고 어깨위고 무겁게 쌓여있던 먼지인지 깊은 우울인지 모를 것들이 폴폴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걸 느끼며 백기는 제일먼저 집에 가서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아, 가는길에 백서 슬리퍼도.

 

*

백기보단 백서가 더 철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