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미생 전력 제 3. 주제: [엘리베이터]

해준백기 / 박두부

 

.

장백기씨 여자 취향에 실망입니다.

 

평소와 같은 담담하고 딱딱한 말투였지만, 평소보다 한톤 정도 내려가 있고 무언가 짜증이란 감정이 섞여있다는 걸 맹추 같은 눈치를 가진 백기도 이번엔 단번에 깨달았다. , 그게 아닌데. 당황스러움에 후닥 해준의 뒤를 졸졸 쫒아가지만 평소였으면 느릿한 백기의 걸음에 맞춰 한 템포씩 느리게 걸었을 해준은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 . 대리님! 결국 한톤 높게 질러버리듯 뱉은 백기의 다급한 음성에도 무뚝뚝하게 서류만 훑어보던 해준이 고개를 들 생각조차 않은 채 입만 열었다.

 

그렇게 애교 있고, 귀엽고, 덜렁대고, 일처리 하나 확실히 못하는 사람이 그리 좋습니까?”

, 대리님 그게 아니라. 그게 분위기에 휩쓸,”

그리 분위기 타기 쉬운 사람이었습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즉각적인 싸늘한 반응이 날아들자 백기는 한없이 목을 움츠렸다.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다가 툭, 의미 없이 잡아당겼다 놓기를 반복하며 백기의 눈이 바삐 해준의 안색을 살핀다. 해준은 서류에서 고개를 때고 차츰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전광판만 바라보다 힐끗, 정말 미세하게 눈알만 데룩 굴렸다. 계속 해준의 얼굴만 살피고 있던 백기가 쫑긋, 몸을 곧추세우며 해준에게 어색한 미소만 보내고 있었다.

 

가서 일하세요. 장백기씨.”

 

허나 이내 떨어진 차가운 말에 금세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여야 했지만.

 

, 맑은 기계음과 함께 묵직한 쇠문이 열리고 쉽게 보기도 힘들 것 같은 묵직한 카메라로 찰칵이며 사진을 찍던-? 백기는 그 순간에도 의문이 들었다.석율이 냉랭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섰다. 해준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 석율의 인사를 무심하게 끄덕임으로 넘기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잠시 눈길을 준 것 외에는 아까 백기의 발언 이후에 한 번도 해준과 눈이 마주치지 못한 백기는 안절부절못함을 넘어서 정말 식은땀에 목덜미부터 등줄기까지 축축하게 젖어올 만큼 긴장했다. 문이 닫힙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어찌 보면 해준과 닮아있는 딱딱한 음성과 함께 해준이 묵직한 쇠문 뒤로 몸을 감춰 사라지자 백기는 시큰해오는 코를 매만지다 옆에서 멀뚱히 서있는 석율을 애처롭게 쳐다봤다.

 

석율은 그 짧은 순간에도 대강 분위기를 눈치 챈 건지 아무 말 없이 제 카메라를 덜렁이며 한쪽 어깨에 맨 채 백기를 탕비실로 이끌었다.

 

*

 

 

백기씨, 영이씨 좀 본받으라고. 눈치가 없으면 코치라도 키워.

 

석율이 팔랑이는 몸짓으로 백기의 가슴팍을 대강 두드리고 떠난 뒤에도 백기는 한참이나 찬물이 든 종이컵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동그랗게 말린 종이컵 윗부분을 짓씹었다. 꽤나 아이 같은 행동은 백기가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하는 습관이었다. 종이컵을 잘근거리며 씹다가 문득 며칠 전 해준의 집 소파에서 해준의 어깨에 고개를 뉘인 채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잘근거리며 씹던 백기의 입술로 들이닥친 해준의 손가락 감촉이 떠올라 백기는 빈 종이컵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서늘한 행동이나 말투와 달리 해준의 몸은 어디나 따끈했다. 그중 길고 곧은 손가락은 특히나 따듯해서 겨울마다 손이 시려워 늘 장갑에 핫팩을 달고 사는 백기의 손을 잡고 살살 문질러 주는 게 두 사람만의 소소하지만 달달한 스킨십 중 하나였다.

 

백기가 잘근거리며 컵 끝을 씹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티비에서 흘러나오잔잔한 로맨스 영화를 보던 중간 중간 고개를 힐끗거리며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히던 걸 반복하던 해준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검지로 백기가 물고 있던 컵을 눌러 내리고는 그래도 백기의 입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컵을 무느라 살짝 벌어져있던 통통한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뜨끈한 온도에 놀라 백기의 눈이 동그래지자 해준은 씩, 개구쟁이처럼 -믿기지 않지만 정말 단어 그대로- 웃곤 백기의 톡 튀어나온 앞니를 손가락으로 무디게 쓰다듬었다. 살살, 마치 어린아이를 진찰하는 치과의사처럼 이빨의 모양을 따라 쓸어내리는 해준의 손가락에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던 백기가 귀여운지 해준은 그대로 제 어깨에 기대느라 한쪽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말랑한 볼에 입술을 내렸다. , 쪼옥.

 

도장 찍듯 몇 번이고 내려앉은 해준의 입술에 움찔 거리며 눈을 깜빡이던 백기가 볼을 붉히며 여직 백기 제 이빨을 매만지는 손가락을 어찌 해달라는 듯 해준을 바라봤다.

 

 

이빨, 상합니다. 이제 컵 씹지 마세요.”

, .”

 

입이 벌어져 네, 라는 명확한 발음이 나오지 않은 게 꽤 창피해 발긋 귓가까지 붉어지자 해준은 홍당무네요, 백기씨. 라며 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었다.

 

그렇게 깨가 쏟아지듯 달달한 연애가 진행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아서 오늘 같은 대형 사고를 친 백기는 여전히 종이컵 모양대로 동그랗게 말려져 있던 제 손을 꾹 쥐어 주먹을 만든 뒤 멍청한 제 이마와 머리, 그리고 결과적으로 해준이 아닌 하대리와 유대리의 의견에 동조를 해버린 제일 미운 입을 순서대로 퍽, 퍽 내리쳤다. , 분노감이 담겨 힘 조절이 미숙했는지 백기가 내려친 입술이 화끈하다. 입술에 짓눌려 약간 찢어졌는지 비릿한 피 맛까지. 정말 되는 일이 없다고 중얼거린 백기의 눈가가 조금 발긋 달아올랐다. 이씨, 아파.

 

*

 

힘없이 제 자리로 돌아온 백기가, 파티션 뒤에서 바이어와 통화를 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해준이 잘난 옆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눈치도 빠르고 시야도 넓은 해준은 백기가 왔음을 앎에도 쳐다보지 않음이 분명했다. 찢어진 아랫입술이 통통하게 부어 자아내는 미약한 통증이 이제는 입술이 아닌 얼굴 전체, 목덜미에서 슬금슬금 가슴으로 내려가는지 쿵쾅이는 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서러움에 버릇처럼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꼬집듯 쥔 부분이 하필이면 찢어져 부어오른 곳이라니. 아야, 참아보려 했지만 뱉어진 신음성에 해준이 버릇처럼 빠르게 고개를 돌려 백기를 바라본다. 터덜거리는 발소리를 들을 때부터 걱정스러움에 돌아가려던 고개를 아직 조금 남은 꽁함으로 애써 잡아뒀던 해준은 눈을 돌리자마자 보이는 백기의 모습에 의자를 박차고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의 표정이 딱 그러할까. 눈 꼬리는 동그랗게 쳐져있고 눈썹도 그러한 눈의 모양을 닮듯 내려가 있다. 평소 하얀 피부 때문에 가까이서 보면 핏줄까지 비쳐보였던 투명한 얼굴은 곳곳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은 팅팅 부어 약간의 핏기를 머금고 있었던. 그러니까, 딱 어디서 맞고 울기직전의 어린아이 같았다. 다급하게 전화를 마무리 하고 해준은 성큼성큼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눈가만 붉히고 있는 백기의 손목을 휘어잡고 유리문을 넘어 나갔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다들 업무로 복귀한 복도는 오히려 한산했다. 해준의 강한 손아귀 힘에 휘청 이는 몸을 다잡지도 못하고 끌려오던 백기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자 옆에서 울음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장백기씨, 우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니긴, 문장 끝이 전부 뭉개져서 울음이 가득한데. 하아, 절로 튀어나오는 한숨을 뱉어내자 백기의 서러운 울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 이제는 쥐고 있는 백기의 손목을 통해서 들썩이는 움직임까지 전해져온다. , 히끅. 아이고, 딸꾹질까지.

 

장백기씨, 그만 우세요.”

, 히익. , 리님이...”

“-아까 제가 한 말이 많이 속상했습니까?”

 

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한다. 우느라 들썩이는 백기를 끌어 엘리베이터에 오른 해준이 맨 꼭대기 층을 누른다. 대꾸 없이 여전히 히끅이며 울기 바쁜 백기의 얼굴을 살펴보다 엘리베이터 구석의 cctv를 쳐다본다. 며칠 전에 전산 오류로 모든 데이터가 날아간 지라 cctv를 대대적으로 교체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저건 그저 사정을 모르는 외부인을 위해 붙여놓은 그저 겉치레 같은 기계일 터였음을 알고 있는 해준이 망설임 없이 백기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가락을 내려 백기의 찬 손가락에 얽었다. 평소에도 문득 문득 치밀어 오르는 제 연인을 향한 스킨십의 욕구를 누르느라 매일이 고행의 연속인데, 마침 밀폐된 공간에 단 둘뿐이고, 저들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없으니 해준은 한번쯤은 대담해 지기로 했다. 제 시기어린 질투에서 나온 차디찬 말에 얼어붙고, 상처입어 눈물을 쏟는 어린 연인을 달래려 천천히 얽혀오는 해준의 손가락 온기에 속상함도 잠시 안심부터 돼 우는 와중에도 백기는 하아,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

 

 

여전히 달뜬 숨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백기의 숙여진 고개를 양손으로 쥐며 해준은 허리를 조금 굽혀 백기와 눈을 마주쳤다. 벌써 뜨끈하게 열이 올라 달아오른 볼 하며, 발긋 부어오른 눈 하며 언제까지고 어린아이 같은 백기의 모습에 해준의 가슴이 조금 철렁였다.

 

 

장백기씨, 뚝 하십시오.

, 어린애. 아닙,니다.”

아직도 우느라 숨도 제대로 조절 못하면서 그렇게 말 할거에요?”

 

 

무뚝뚝한 음성이 백기의 힘없는 항변에 녹아내려 어린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풀어졌다. 양 볼을 쥐고 있던 너른 손바닥으로 백기의 볼을 슥슥 문질러 달래던 해준이 계속 우느라 지쳐 하-. 뜨거운 숨을 뱉은 백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다. 이런 거로 넘어가려 하냐는 듯 항변이 섞인 밀어냄이 해준의 어깨에서 느껴졌지만, 힘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반항에 결국 입술을 맞붙인 채로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 장백기씨, 그거 밀어내는 거 맞습니까?

 

 

말하느라 달싹이는 입술이 백기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한다. 온기가 멀어졌다가 다가왔다가 하는 간질함에 백기는 해준의 뒤통수를 감싸 안고 냅다 입술을 들이박다시피 붙였다. 아야, 제 터진 입술을 생각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입술에선 또다시 비릿한 향이 난다. 해준은 투정부리듯 해준의 뒤통수의 머리칼을 약하게 잡아당기는 백기를 달래며 혀로 할짝, 입술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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