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해준진] 戀心 (연심) (for.렘피님)

                              w. 박두부




“할멈, 그 벚꽃이야기 말이야. 자네가 내게 했던가.”



밤낮 가리지 않은 오입질과 계간 질에 미쳐 날뛰더니 지난날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들어와 제 방에 틀어박혀 반나절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아 집안 종들의 애를 잔뜩 타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진이 이미 미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야장의만 달랑 걸친 채 느릿한 걸음으로 툇마루에 걸터앉아 뱉은 소리란 게 참으로 묘한 것이라, 주변에서 비질을 하던 종놈들도, 진이 행여나 고뿔이라도 걸릴까 푸른빛의 포를 들고 종종걸음 하며 다가온 늙은 여종조차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진을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턱을 손에 괴고는 멀거니 마당과 담장 따위를 바라보는 진의 눈에 가득 머금어진 싱숭생숭함이 퍽 낯설었다. 




*



왜 대체 내가 이곳에 있는 건지 참으로 모르겠구나. 입으로 연신 중얼거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돌이 깨져 곳곳이 울퉁불퉁 거리는 담벼락에 손을 대고 빼꼼 건너편을 바라보던 진이 누군갈 보고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 덕에 손바닥이 깨진 돌에 긁혀 작은 상처가 났지만 진은 그것보다는 아플 정도로 쿵쿵 울리는 심장을 연신 때려대기 바빴다. 이, 이게 무엇이란 말이냐. 왜 저 치를 보고...!


으리으리하다 표현하기엔 조금은 부족한, 높지만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담장은 강대감 집안의 성품을 잘 표현하는 듯 했다. 높은 권세를 휘두르지 않고 아랫것들을 잘도 보살피기로 도성 내 소문이 자자한 강대감집 이야기는 아무리 주변에 관심이 없는 진이어도 귀동냥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댁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그리 청렴결백하다더라. 여색엔 관심도 없고 그저 학문을 쌓고 몸을 단정히 하는 것에만 그리 관심을 가지더라 하는 등. 제 무리들이 괜한 투기 섞인 담화를 할 때도 진은 그저 무심하게 술만 삼켜 넘겼다. 참 재미도 없게 사는구나. 그리 가볍게만 생각해 넘겼었다. 그랬는데. 


가슴을 몇 번 내려치던 진이 그제야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곤 다시 담벼락 밖으로 빼꼼 고개를 잡아 뺐다. 저가 방정을 떨어댈 때 얼마나 걸음이 빠른 건지 어느새 점만 하게 보이는 강대감댁 아들의 모습에 진이 황급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걸이조차 단정했다. 모래며 돌이 대중없이 놓인 흙바닥을 걸으며 어쩜 저리 발소리 하나 흘리지 않을까. 마치 쓸데없는 과정 따윈 모조리 생략이라도 한 듯 한 간결한 움직임이었다. 그와 달리 이리저리 숨고 뛰어다니느라 어느새 신 곳곳에 묻은 흙이 부끄러워져 진이 잠시 허리를 숙이고 흙을 털곤 또 걸음을 바삐 옮겼다. 펄럭이는 도포자락이 햇빛을 만나 은은한 윤기가 흘렀고, 소매 틈에 끼운 책은 정갈했다. 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듯 한 윤곽에 진이 제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여종을 재촉해 최대한 단정한 색감과 모양새의 옷을 입고 나온지라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진은 해준을 처음 본 날 제 옷차림을 상기하고 볼을 붉게 물들였다. 천천히 붉은 염료라도 떨군 듯 볼 중앙에서부터 천천히 얼굴 전체로 퍼져가는 붉은 빛은 부끄러움 보단 수치의 감정이 짙었다. 


저를 어찌 봤을까. 


해가 중천에 뜬 한낮부터 옷을 풀어 헤쳐 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저를. 그때 때 아닌 봄바람만 아니었어도. 그래서 옷자락만 휘날리지 않았더라도. 문득 그에게 보인 맨 몸이 신경 쓰여 진은 주먹을 쥐어 제 이마를 콩콩 때렸다. 또 주변은 왜 하필이면 분홍빛 벚꽃이 가득해 저를 싱숭생숭하게 하는지.


아차, 또 놓칠 뻔 했다. 퍼석하고 모래가 짓이겨지는 소리를 내며 진은 다급히 내달렸다. 

아니, 놓쳤나?



몇 번이나 고개를 두리번거려도 익숙한 뒷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아둔하게 지난날을 후회하다 눈앞의 중요함을 놓치다니. 그대로 벙찐 채 서있는 진의 어깨가 둥글게 쳐졌다. 벚꽃이 다 무어라고.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여럿의 입을 거쳐 퍼진 낭설이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는 게지. 자책에서부터 원망으로까지 흘러간 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역시 저와 맞지 않는 짓을 한 게 문제겠지. 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나 데리고 몸을 섞지 않으면 도무지 이 더러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 이젠 답답하게 목을 죄어오는 것 같은 저고리를 풀어 헤치려던 순간 진의 어깨에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묘한 짜증이 들끓던 와중에 제 어깨를 잡아오는 힘이 달가울 리는 없었던 지라 진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팔을 강하게 쳐냈다. 



“-어딜, 함부…….”

“아, 놀랐다면 미안합니다.”



찰싹하는 제법 매서운 소리와 함께 주춤 뒤로 밀린 몸의 주인에게서 단정한 음성이 들렸다. 내내 뒤만 쫒던 이. 함께 마주볼 일이 또 생기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 강대감댁 아들 강해준. 얼굴을 확인하고 되레 몸을 물린 건 진이었다. 손가락을 몇 번 주억거리다 제 팔에 껴있던 책을 단단히 잡는 손이 붉어진 게 신경 쓰여 진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을 해온건 해준 이었지만 어찌됐든 몸에 붉은 자욱을 만든 건 저였으니. 



미안한 마음이 넘실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애먼 손톱 주변의 여린 살들만 꼬집으며 괴롭히던 진의 볼이 발갛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해준이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놀라게 해서.”

“...아, 아닙니다. 별거.”

“그저 아까부터 자꾸만 뒤를 좇으시기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해서…….”

“!”



아뿔싸. 제 서툰 잠행은 이미 저 사내에게 진즉 들켜버렸었나보다. 저의 뒤를 자꾸만 쫒는 낯선 이를 어찌 생각했을까. 그날의 만남을 혹여나 저만 기억한다면 저 이에겐 정말로 처음 보는 사내가 저를 따라다니는 거였으니. 밀려드는 창피감에 진의 귀 끝까지 열기가 차올랐다. 



“....니까.”

“예?”

“착각이라도 한겝니까!! 제, 제가 왜 댁 뒤를 따라다니겠습니까!”



해준의 단정한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간다. 허나 그 당혹감이 진의 가슴에 퍼져나가는 부끄러움의 크기와 비교할 수 있을까.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수치심에 잔뜩 절어 진의 머릿속이 흐물거린다. 저가 무슨 말을 뱉는지도 모른 채 해준을 흘기다 고개를 푹 숙이다를 반복하던 진이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달음박질 쳤다. 볏짚만 깔린 창고에서 사내의 것을 품고 신음을 흘리는 걸 아비에게 들켰을 때도, 긴 몽둥이로 두들겨 맞느라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집 앞 마당이며 길거리를 기어 다녔을 때도, 이정도로 벌겨 벗겨진 느낌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저 치가  대체 뭐 길래 저에게 이런 감정을 주는지. 


달리느라 요동치는 몸짓 탓에 강하게 씹힌 입술은 부풀다 못해 피가 새어나왔지만 진은 한참이나 그대로 내달렸다. 시장통 길 한가운데에서 멈춘 발이 느릿하게 땅을 구른다. 시익, 거친 숨이 터지는 순간 옷소매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엉망으로 너덜거리는 입술을 훔쳐냈다. 저를 황당하게 보는 해준의 시선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쫒고자 머리를 휘적 여러 번 털어내자 팔랑, 무언가 가볍게 진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절로 가는 눈길 끝에 걸리는 건 분홍빛을 머금은 꽃잎. 제 손바닥 안에서 어롱 거리던 그것이 땅바닥에 추락해서 굴러다니는 모습에 기어이 진의 눈가가 흐릿하게 젖어들었다.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그게 무슨 지독한 농(弄)인가…….”  




역시나 낭설은 낭설일 뿐이지.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띤다. 잠잠함을 얼굴에 덧대고 너덜거리는 심장을 숨기려 해도 떨리는 목소리만은 차마 갈무리가 되지 않는지 이내 입을 꾹 다무는 진의 볼이 푹 팼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벚꽃은 진을 감싸지 못하고 천천히 땅으로 향한다. 어른거리는 분홍빛이 괴로워 진이 눈을 질근 감았다.





벗 그리워 벚꽃인가

님 그리워 벚꽃인가

 

벚꽃닢 피날때 찾아온 님

벚꽃닢 지려니 떠나가네

 

올때는 봄소식 전하더니

갈때는 눈물만 전하더라

 

소소한 바람에도 흩날리는 벚꽃잎

스러지는 꽃잎 슬퍼 무상한듯 하늘보니

벚꽃잎은 아니뵈고 님얼굴만 떠오르네


                               (-벚꽃, 하영란) 




***



렘피님께서 써주신 初恋 ( http://another-hardboiled.tistory.com/128 ) 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삽질하는 김진 하핫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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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성준] 생일

단문2015. 6. 9. 00:43


“불, 만지지마. 뜨거우니까.”



몇 번이나 반복되는 경고임에도 식탁 의자에서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자꾸만 들썩거리는 통에 벌써 10분이 넘도록 성냥 끝은 촛불과 맞닿지 못하고 있었다. 성냥을 긁어 불꽃을 내자마자 눈을 빛내며 입으로 후, 후우. 불어대는 지라 지금 기준의 손가락에 쥐여진 성냥이 딱 6번째 새 성냥이었다. 



“후, 불지도 마.”

“네, 네에, 성, 성주니 안붑, 붑니다아. 후우, 안합니다.”

“한번만 더 불면, 생일축하 노래 안한다.”



진심을 담아 기준이 엄하게 뱉은 말에 그제야 성준이 입을 꾹 다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 손바닥으로 꾸욱 코 밑부터 턱까지 눌러 막는 모습에 기준이 안심하곤 성냥갑에 성냥을 긁었다. 칙, 마찰음과 함께 붉은 불이 일렁이고 성준의 엉덩이가 다시 한 번 들썩였지만 이번엔 기특하게도 참아내고 있었다. 물론 바닥을 다다다 구르는 발은 여전했지만. 


저리 안절부절 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묘한 심술이 고개를 들어 기준은 일부러 천천히 촛불에 불을 붙였다. 고작 스무 개 남짓 되는 촛불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생일축하 노래와 촛불 끄는 걸 꼭 하고 싶었는지 간신히 참아낸 성준이 동의를 구하듯 기준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성준이, 불 끄고 와.”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였던 손을 내리고 후다닥 달려가서 부엌 불을 끄고 다시 뛰어온 성준의 입에 함박웃음이 물려있다.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맞붙이고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눈이 꼼꼼하게 촛불을 살피는 중이었다. 기준이 먼저 운을 띄자 성준이 신나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약간은 더듬지만 제법 완벽하게 부르는 게 신기해 기준이 노래를 마친 성준을 향해 박수를 두어 번 쳐주었다.



“...혀, 형아아. 성, 성준이 이제, 후, 후우 합니다.”

“너무 강하게 말고 입술 모으고. 응, 그렇게.”

“후우, 해도 되, 요오?”

“응.”



기준의 허락을 끝까지 기다리던 성준이 케이크 앞으로 고개를 붙여 바람을 후후 불었다. 행여나 앞머리가 탈까 기준이 성준의 이마를 슬쩍 손바닥으로 밀어내도 고개는 여전히 뻣뻣했다.


촛불이 다 꺼지고 희뿌연 연기가 공기 중에 퍼지자 성준이 킁킁 냄새를 맡다가 코를 다급히 막으며 우는소리를 냈다. 그런 성준을 슬쩍 보며 입 꼬리를 올린 기준이 촛불을 빼내자 성준의 고개가 다시금 바짝 다가왔다. 



“....서, 성, 성준, 성준이. 딸기, 딸기 먹습니다.”

“딸기랑 또 뭐 먹을래.”

“초, 초코도 성준이, 먹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부분을 콕 집으며 손가락으로 몰래 생크림을 찍어 입에 가져가는 성준을 눈감아주며 기준이 접시에 예쁘게 케이크를 담아 성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먼저 손이 나가려는걸 기준이 손등을 찰싹, 쳐 저지한 뒤 포크를 내밀었다. 서툴게 손에 포크를 말아 쥐곤 딸기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느라 입 주변이 생크림 범벅인 성준을 보며 기준이 한숨과 함께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훑어 닦았다.


한참 무아지경에 빠져 케이크를 먹던 성준이 팔짱낀 자세로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기준을 보고 고개를 갸웃 저었다. 




“형, 형아... 안 먹습니다.”

“응, 단거 싫어.”

“성..성주니, 혼, 혼자...먹습니다.”

“성준이 많이 먹으면 되잖아.”

“....혼, 혼자아....싫습,니다아...”




눈은 케이크 조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면서도 무슨 고집인지 포크까지 식탁위에 올려놓는 성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하, 고집불통. 기준이 졌다는 듯 제 앞에 있던 포크를 들어 케이크 윗부분 생크림을 긁어 옆으로 치우고는 스펀지와 딸기만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우윽, 달아.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보란 듯이 바라보자 그제야 얼굴이 좀 풀리곤 포크를 다시 쥔 성준이 기준이 포크로 밀어 치운 생크림을 포크에 담아 제 입으로 쏙 가져갔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성준의 발그레한 볼을 바라보며 기준이 입안에 남은 단맛을 커피로 애써 밀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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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백기] 투정은 불안에서부터




“대, 대리님. 제가 안겠습니다.”

“아뇨. 장백기씨 요즘 허리 아프다면서요. 산후조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라니까.”

“아이 낳은 지 벌써 2년이 다됐는데 무슨 산후조리입니까…….대리님. 사람들이 보잖아요.”

“장백기씨, 제가 창피합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오히려 대리님이…….”

“왜요. 내 아이 아빠가 안겠다는데.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지 해준의 옆에서 안절부절 몸을 가만히 못 놔두고 입술을 깨물던 백기가 해준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분홍색의 천 가방 손잡이를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이거라도 제가 들게 해주세요. 간절한 백기의 말에도 고개를 단호하게 저은 해준이 갑작스레 백기의 입술에 쪽, 입 맞춘 뒤 떨어졌다. ...대리님!!



“아이한테 필요한 게 들어있는 가방인데, 필요할 때마다 바로 꺼낼 수 있게 내가 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정말…….”



불만 가득한 백기의 말에도 해준은 꼿꼿했다. 볼이 잔뜩 부푼 채로 땅바닥만 보며 걷는 게 단단히 삐진 듯싶었다. 아기띠 안에서 잠든 아이의 고개가 뒤로 휙 넘어가자 손으로 단단히 목을 받쳐 아이의 볼을 제 가슴팍에 기대게 한 뒤 반대편 손으로 백기의 손을 슬쩍 잡았다. 놀라 움츠러들던 백기가 결국 꼼지락 거리며 손가락을 얽어오자 해준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손, 잡아주셨다고 풀린 거 아니에요.”

“압니다.”

“엄마가 화나있으면 아기한테도 영향간대서 억지로 화 푼 거에요.”

“풋, ...압니다.”

“...웃지 마세요.”

“응, 안 웃을게요.”

“...웃고 있는 거 다 보입니다.”



고개를 돌리고 자꾸만 잘게 어깨를 떨어대는 게 맞잡은 손으로도 느껴져 백기가 꾸욱 슬쩍 손톱을 세워 해준의 손등을 꼬집어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얄미워 진짜. 참다 참다 안 되겠는지 막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해준은 타이밍 좋게 백기의 입술에 쫙 핀 제 검지를 가져다댔다. 쉿,



“애기 깹니다. 간신히 재웠는데.”



너무나 당연한 말씀. 당연한 말씀을 하는 해준의 얼굴이 여전한 웃음기를 머금지만 않았어도 저도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입술이 꾹 닫힘과 동시에 잡고 있던 해준의 손을 제법 거칠게 놓은 백기의 눈이 흐릿하게 젖어들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닫힌 입술이 백기의 톡 튀어나온 앞니에 의해 짓씹히고, 고개를 푹 숙여 해준의 당황한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해버린다. 그제야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해준을 덮쳤다. 아차, 안 그래도 요즘의 백기는 참으로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아침에 기분 좋게 깨서 웃음 짓다가, 아침 준비하던 중 빵을 태웠다는 이유 하나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해준이 야근에 회식까지 겹쳐 늦은 밤 들어오는 날이면 소파에 퀭한 눈으로 앉아 있다가 힘없이 들어가 홀랑 혼자 잠들어 버린다거나. 물론 백기가 보통 남자들보다 예민하고 이곳저곳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이건 예민을 넘어서 과민 수준이었다. 방금도 연애시절과 신혼 때 빈번했던 그저 애교 섞인 장난정도의 수위였다. 한두 번이 아닌. 그저 백기가 얄밉다는 듯 손가락이나 목덜미께를 잘근 씹곤 웃어 보이면 다 풀렸던 그런 사소한 일. 남들의 이목을 중요시여기는 백기로써는 만약에 화가 났더라도 길거리에선 절대로 그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데. 


역시나 묘하게 이상하다. 불안감에 해준이 한 발짝 백기에게 걸어가자 딱 그만큼 멀어지고, 또 다가가자 한 발짝 멀어짐과 동시에 주저앉아버리는 백기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난감함에 한숨 쉰 해준이 우선 백기의 손목을 잡아 몸을 일으켜 근처 공원으로 들어간다. 한손에 들고 있던 분홍색 천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깔고 백기를 조심스럽게 앉히자 코를 한번 훌쩍이면서도 순순히 앉는 모습이 또 마냥 귀여워 해준의 광대가 슬쩍 올라가려한 순간 백기의 고개가 갑자기 들렸다. 황급히 입술을 내려 괜히 걱정스럽단 표정을 지어보인 해준을 보며 붉어진 코를 매만진 백기가 다시 한 번 훌쩍, 우는소리를 낸다. 



“...백기씨, 괜찮아요?”

“.....아니요.”

“왜 울었는지 물어봐도 되요?”

“...대, 대리님이,”



백기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막 나오려는 순간 해준이 매고 있던 아기 띠가 출렁이며 아이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우앵, 우애앵. 뭐가 그리 서러운지 가느다란 목소리가 제법 커지며 해준의 목덜미며 옷자락을 작은 손으로 꼬물하고 쥔 아이를 달래려 해준이 제법 능숙하게 아이의 뒷목을 따듯한 손으로 쓸고 반대쪽으론 등허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가, 울지 마. 응? 중간 중간 다정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아빠의 목소리며 따뜻한 달램 덕인지 슬쩍 슬쩍 울음소리가 작아지고 숨을 고르느라 헐떡이는 아이의 말랑한 볼에 해준이 입술을 몇 번 찍고 웃는 순간 또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에게서가 아니라 조금 아래쪽에서. ...아래쪽? 해준의 고개가 황급히 돌아가자 뭐가 그리 서러운지 제 양손에 고개를 파묻고 훌쩍이는 백기의 손가락 틈새로 맑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점점이 떨어져 벤치 아래 모래바닥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던 눈물방울이 멈출 틈을 안보이자 놀라 굳어있던 해준이 조심스레 백기의 어깨를 쓸었다. 넓은 손바닥이 우느라 뭉쳐있는 어깨를 살짝 쓸어내리다가 손가락으로 꾹 누르기도 하고, 조금씩 올라가 경직된 목덜미도 어루만지자 백기의 입에서 떨리는 한숨이 터졌다. 흐, 우읍…….



“...백기야, ...진짜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 이거, 이상, 흡, 한 질문인건...아는, 데…….”

“응, 뭔데 말해봐.”

“흐...으.., 대리님, 나, 나보다 아기가 더 좋,아요?”



...뭐? 해준의 얼빠진 대답을 또 멋대로 해석했는지 맞죠, 그쵸. 하며 몸을 더 웅크려 이젠 아예 이마를 무릎에 댈 기세인 백기의 어깨를 쥐어 잡는 손이 다급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황스러움에 다시금 존댓말이 튀어나오는 건 대수도 아니었다.



“나, 둘째, 가졌어요.”

“.......네?”

“근데, 낳기 싫어요. 왜, 왠줄 알아요? 대리님 지금도 아가한테만 신경 쓰는데, 둘째까지 낳으면 나 정말로 신경 안 쓸까봐요.”

“...장백기씨, 아니, 백기야.”



해준의 목소리가 순간 낮게 가라앉았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해준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사수와 부사수 시절 해준의 목소리 변화, 숨소리 변화까지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저였으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주는 막연한 공포감이 싫어 백기가 해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다. 



“사실이야?”

“...뭐, 뭐요…….”

“둘째. 사실이냐고. 아니 언제부터 안거야.”

“며, 며칠 안됐어요. 그냥 속이 안 좋아서 병원 갔는데…….”

“며칠이나 됐는데 왜 나한테 얘기는 안한 거고.”

“…….”



대답 없이 숨만 고르고 있는 백기의 앞으로 해준의 얼굴이 들어찼다. 울며 찡얼거리던 아이가 다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고 있는 모습이 언뜻 스쳤지만 백기의 앞에서 씩 미소 짓고 있는 해준의 얼굴의 임팩트가 훨씬 커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화, 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잔뜩 움츠러든 어깨며 목의 경직이 풀림과 동시에 눈물샘은 또 철없이 풀려 맑은 물방울을 똑똑 떨궈내기 시작했다. 그에 으그, 어르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으로 우느라 따끈하게 달아오른 백기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 해준이 슬쩍, 백기의 아랫입술을 물다 떨어졌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벙찐 백기가 입을 벌리자 다시 한 번 히죽, 웃은 해준이 한손으로 제 입을 슬쩍 가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아 큰일이네.”

“뭐가요..?”“입 꼬리가 주체가 안 돼.”

“네?”

“좋아 죽겠다고요. 장백기씨.”


볼을 가볍게 꼬집은 해준의 손이 천천히 백기의 배위로 내려앉았다. 아직은 평평하기만 한 배의 모양을 덧그리던 해준이 시선을 떼지 못하며 황홀한 듯 뱉어낸 목소리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통, 통 가볍게 백기의 머릿속을 쳐온다. 슬쩍 눈만 들어 조금은 충격에 빠진 듯 한 백기의 얼굴을 살핀 해준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낸다.



“정말, 둘째까지 나오면 난 애를 셋을 부양해야 하는 건가.”

“셋이요?”

“제일 눈물 많은 큰 애 여기 있네.”



삐죽, 해준의 말을 이해한 백기의 입술이 쑥 나왔다 제자리를 찾는다. 아까처럼 놀리듯 가벼운 목소리가 이번엔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 며칠간 불안감에 쌓여있던 백기의 가시 돋친 감정을 녹여 내리는 듯 아주 부드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 스르륵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백기 저가 무엇을 그리 불안해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져 눈물이 쏙 들어가고 그 자리를 홍조가 채웠다. 백기의 배를 쓰다듬던 큰 손바닥이 떨어지고 몸을 일으킨 해준이 백기의 손을 쥐곤 일으켰다. 민망함에 도무지 맞잡지 못한 손가락이 뻣뻣하게 서있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해준은 백기의 몫까지 더욱 단단하게 손을 쥐어왔다. 



“요 며칠 우울했던 건 그럼 산전 우울증?”

“…….”

“나한테 끝까지 숨기려고 했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아이 챙기느라 널 신경 안 쓸 거라는 발상을 하는 건지.”

“...대리님이, 아가만 챙기는 건 맞죠 뭐.”

“너랑 내 아기니까 예뻐서 챙기는 거라곤 생각 안하지.”

“아 저도 유치했던 거 아니까 그만하세요!”



예전에 진지하고 차가웠던 모습은 다 어디 간 건지 아주 저 놀리기에 재미라도 들였나보다. 민망함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에 아침 일찍 산책 간다고 정성들여 만진 머리를 문질러 비비는 백기를 제지하며 해준이 또 웃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어이없는 생각 하지 마.”



알겠어요. 슬쩍 눈치를 보며 웅얼거린 백기가 애교 부리듯  손등을 손끝으로 슬슬 문질러오는 걸 즐기며 해준은, 한시름 덜어 후련한지 조금은 편해진 낯빛을 하고 있는 백기의 옆모습을 훔쳐보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면 백기가 민망함에 화를 내고 먼저 돌아갈까 봐 간신히. 간질간질 발가락 끝부터 올라오는 즐거움을 찍어 누르며 해준이 잠든 아이의 등을 괜히 한번 도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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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에 써뒀던 토막을 이제야 완성해서 올려봅니다 8▽8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