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해준백기] 투정은 불안에서부터




“대, 대리님. 제가 안겠습니다.”

“아뇨. 장백기씨 요즘 허리 아프다면서요. 산후조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라니까.”

“아이 낳은 지 벌써 2년이 다됐는데 무슨 산후조리입니까…….대리님. 사람들이 보잖아요.”

“장백기씨, 제가 창피합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오히려 대리님이…….”

“왜요. 내 아이 아빠가 안겠다는데.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지 해준의 옆에서 안절부절 몸을 가만히 못 놔두고 입술을 깨물던 백기가 해준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분홍색의 천 가방 손잡이를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이거라도 제가 들게 해주세요. 간절한 백기의 말에도 고개를 단호하게 저은 해준이 갑작스레 백기의 입술에 쪽, 입 맞춘 뒤 떨어졌다. ...대리님!!



“아이한테 필요한 게 들어있는 가방인데, 필요할 때마다 바로 꺼낼 수 있게 내가 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정말…….”



불만 가득한 백기의 말에도 해준은 꼿꼿했다. 볼이 잔뜩 부푼 채로 땅바닥만 보며 걷는 게 단단히 삐진 듯싶었다. 아기띠 안에서 잠든 아이의 고개가 뒤로 휙 넘어가자 손으로 단단히 목을 받쳐 아이의 볼을 제 가슴팍에 기대게 한 뒤 반대편 손으로 백기의 손을 슬쩍 잡았다. 놀라 움츠러들던 백기가 결국 꼼지락 거리며 손가락을 얽어오자 해준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손, 잡아주셨다고 풀린 거 아니에요.”

“압니다.”

“엄마가 화나있으면 아기한테도 영향간대서 억지로 화 푼 거에요.”

“풋, ...압니다.”

“...웃지 마세요.”

“응, 안 웃을게요.”

“...웃고 있는 거 다 보입니다.”



고개를 돌리고 자꾸만 잘게 어깨를 떨어대는 게 맞잡은 손으로도 느껴져 백기가 꾸욱 슬쩍 손톱을 세워 해준의 손등을 꼬집어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얄미워 진짜. 참다 참다 안 되겠는지 막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해준은 타이밍 좋게 백기의 입술에 쫙 핀 제 검지를 가져다댔다. 쉿,



“애기 깹니다. 간신히 재웠는데.”



너무나 당연한 말씀. 당연한 말씀을 하는 해준의 얼굴이 여전한 웃음기를 머금지만 않았어도 저도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입술이 꾹 닫힘과 동시에 잡고 있던 해준의 손을 제법 거칠게 놓은 백기의 눈이 흐릿하게 젖어들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닫힌 입술이 백기의 톡 튀어나온 앞니에 의해 짓씹히고, 고개를 푹 숙여 해준의 당황한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해버린다. 그제야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해준을 덮쳤다. 아차, 안 그래도 요즘의 백기는 참으로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아침에 기분 좋게 깨서 웃음 짓다가, 아침 준비하던 중 빵을 태웠다는 이유 하나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해준이 야근에 회식까지 겹쳐 늦은 밤 들어오는 날이면 소파에 퀭한 눈으로 앉아 있다가 힘없이 들어가 홀랑 혼자 잠들어 버린다거나. 물론 백기가 보통 남자들보다 예민하고 이곳저곳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이건 예민을 넘어서 과민 수준이었다. 방금도 연애시절과 신혼 때 빈번했던 그저 애교 섞인 장난정도의 수위였다. 한두 번이 아닌. 그저 백기가 얄밉다는 듯 손가락이나 목덜미께를 잘근 씹곤 웃어 보이면 다 풀렸던 그런 사소한 일. 남들의 이목을 중요시여기는 백기로써는 만약에 화가 났더라도 길거리에선 절대로 그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데. 


역시나 묘하게 이상하다. 불안감에 해준이 한 발짝 백기에게 걸어가자 딱 그만큼 멀어지고, 또 다가가자 한 발짝 멀어짐과 동시에 주저앉아버리는 백기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난감함에 한숨 쉰 해준이 우선 백기의 손목을 잡아 몸을 일으켜 근처 공원으로 들어간다. 한손에 들고 있던 분홍색 천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깔고 백기를 조심스럽게 앉히자 코를 한번 훌쩍이면서도 순순히 앉는 모습이 또 마냥 귀여워 해준의 광대가 슬쩍 올라가려한 순간 백기의 고개가 갑자기 들렸다. 황급히 입술을 내려 괜히 걱정스럽단 표정을 지어보인 해준을 보며 붉어진 코를 매만진 백기가 다시 한 번 훌쩍, 우는소리를 낸다. 



“...백기씨, 괜찮아요?”

“.....아니요.”

“왜 울었는지 물어봐도 되요?”

“...대, 대리님이,”



백기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막 나오려는 순간 해준이 매고 있던 아기 띠가 출렁이며 아이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우앵, 우애앵. 뭐가 그리 서러운지 가느다란 목소리가 제법 커지며 해준의 목덜미며 옷자락을 작은 손으로 꼬물하고 쥔 아이를 달래려 해준이 제법 능숙하게 아이의 뒷목을 따듯한 손으로 쓸고 반대쪽으론 등허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가, 울지 마. 응? 중간 중간 다정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아빠의 목소리며 따뜻한 달램 덕인지 슬쩍 슬쩍 울음소리가 작아지고 숨을 고르느라 헐떡이는 아이의 말랑한 볼에 해준이 입술을 몇 번 찍고 웃는 순간 또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에게서가 아니라 조금 아래쪽에서. ...아래쪽? 해준의 고개가 황급히 돌아가자 뭐가 그리 서러운지 제 양손에 고개를 파묻고 훌쩍이는 백기의 손가락 틈새로 맑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점점이 떨어져 벤치 아래 모래바닥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던 눈물방울이 멈출 틈을 안보이자 놀라 굳어있던 해준이 조심스레 백기의 어깨를 쓸었다. 넓은 손바닥이 우느라 뭉쳐있는 어깨를 살짝 쓸어내리다가 손가락으로 꾹 누르기도 하고, 조금씩 올라가 경직된 목덜미도 어루만지자 백기의 입에서 떨리는 한숨이 터졌다. 흐, 우읍…….



“...백기야, ...진짜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 이거, 이상, 흡, 한 질문인건...아는, 데…….”

“응, 뭔데 말해봐.”

“흐...으.., 대리님, 나, 나보다 아기가 더 좋,아요?”



...뭐? 해준의 얼빠진 대답을 또 멋대로 해석했는지 맞죠, 그쵸. 하며 몸을 더 웅크려 이젠 아예 이마를 무릎에 댈 기세인 백기의 어깨를 쥐어 잡는 손이 다급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황스러움에 다시금 존댓말이 튀어나오는 건 대수도 아니었다.



“나, 둘째, 가졌어요.”

“.......네?”

“근데, 낳기 싫어요. 왜, 왠줄 알아요? 대리님 지금도 아가한테만 신경 쓰는데, 둘째까지 낳으면 나 정말로 신경 안 쓸까봐요.”

“...장백기씨, 아니, 백기야.”



해준의 목소리가 순간 낮게 가라앉았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해준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사수와 부사수 시절 해준의 목소리 변화, 숨소리 변화까지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저였으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주는 막연한 공포감이 싫어 백기가 해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다. 



“사실이야?”

“...뭐, 뭐요…….”

“둘째. 사실이냐고. 아니 언제부터 안거야.”

“며, 며칠 안됐어요. 그냥 속이 안 좋아서 병원 갔는데…….”

“며칠이나 됐는데 왜 나한테 얘기는 안한 거고.”

“…….”



대답 없이 숨만 고르고 있는 백기의 앞으로 해준의 얼굴이 들어찼다. 울며 찡얼거리던 아이가 다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고 있는 모습이 언뜻 스쳤지만 백기의 앞에서 씩 미소 짓고 있는 해준의 얼굴의 임팩트가 훨씬 커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화, 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잔뜩 움츠러든 어깨며 목의 경직이 풀림과 동시에 눈물샘은 또 철없이 풀려 맑은 물방울을 똑똑 떨궈내기 시작했다. 그에 으그, 어르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으로 우느라 따끈하게 달아오른 백기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 해준이 슬쩍, 백기의 아랫입술을 물다 떨어졌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벙찐 백기가 입을 벌리자 다시 한 번 히죽, 웃은 해준이 한손으로 제 입을 슬쩍 가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아 큰일이네.”

“뭐가요..?”“입 꼬리가 주체가 안 돼.”

“네?”

“좋아 죽겠다고요. 장백기씨.”


볼을 가볍게 꼬집은 해준의 손이 천천히 백기의 배위로 내려앉았다. 아직은 평평하기만 한 배의 모양을 덧그리던 해준이 시선을 떼지 못하며 황홀한 듯 뱉어낸 목소리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통, 통 가볍게 백기의 머릿속을 쳐온다. 슬쩍 눈만 들어 조금은 충격에 빠진 듯 한 백기의 얼굴을 살핀 해준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낸다.



“정말, 둘째까지 나오면 난 애를 셋을 부양해야 하는 건가.”

“셋이요?”

“제일 눈물 많은 큰 애 여기 있네.”



삐죽, 해준의 말을 이해한 백기의 입술이 쑥 나왔다 제자리를 찾는다. 아까처럼 놀리듯 가벼운 목소리가 이번엔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 며칠간 불안감에 쌓여있던 백기의 가시 돋친 감정을 녹여 내리는 듯 아주 부드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 스르륵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백기 저가 무엇을 그리 불안해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져 눈물이 쏙 들어가고 그 자리를 홍조가 채웠다. 백기의 배를 쓰다듬던 큰 손바닥이 떨어지고 몸을 일으킨 해준이 백기의 손을 쥐곤 일으켰다. 민망함에 도무지 맞잡지 못한 손가락이 뻣뻣하게 서있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해준은 백기의 몫까지 더욱 단단하게 손을 쥐어왔다. 



“요 며칠 우울했던 건 그럼 산전 우울증?”

“…….”

“나한테 끝까지 숨기려고 했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아이 챙기느라 널 신경 안 쓸 거라는 발상을 하는 건지.”

“...대리님이, 아가만 챙기는 건 맞죠 뭐.”

“너랑 내 아기니까 예뻐서 챙기는 거라곤 생각 안하지.”

“아 저도 유치했던 거 아니까 그만하세요!”



예전에 진지하고 차가웠던 모습은 다 어디 간 건지 아주 저 놀리기에 재미라도 들였나보다. 민망함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에 아침 일찍 산책 간다고 정성들여 만진 머리를 문질러 비비는 백기를 제지하며 해준이 또 웃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어이없는 생각 하지 마.”



알겠어요. 슬쩍 눈치를 보며 웅얼거린 백기가 애교 부리듯  손등을 손끝으로 슬슬 문질러오는 걸 즐기며 해준은, 한시름 덜어 후련한지 조금은 편해진 낯빛을 하고 있는 백기의 옆모습을 훔쳐보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면 백기가 민망함에 화를 내고 먼저 돌아갈까 봐 간신히. 간질간질 발가락 끝부터 올라오는 즐거움을 찍어 누르며 해준이 잠든 아이의 등을 괜히 한번 도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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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에 써뒀던 토막을 이제야 완성해서 올려봅니다 8▽8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