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옵다> sample
“장백기씨, 이거 보십쇼.”
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탁에 반듯하게 놓고 막 밥을 뜨려 주걱을 손에 쥔 백기를 불러 세우는 해준의 목소리가 퍽 다급했다. 해준의 드문 다급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자 아이를 제 앞에 세워놓고 고개를 숙인 채 손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해준이 보인다.
뭐, 하세요? 심각해 보이는 얼굴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양 손으로 아빠의 볼이며 머리카락을 만지고 잡아당기며 장난치다가 까르르 웃는 아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옷 위에서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해준이 있었다.
남색 빛의 원복을 입은 아이의 단추를 잠그다 말고 셔츠 목 자락의 허전함이 영 신경이 쓰였던 건지 해준은 인상까지 팍 찌푸린 채로 열심히 빨간 리본을 묶고 있었다. 다년간의 회사 생활로 넥타이는 능숙하게 맬 줄 알았어도, 어디 리본을 묶어볼 일이 흔했을까. 아빠의 둥근 손가락 마디가 턱이며 목 자락에 닿을 때마다 간지럽다고 숨넘어갈 듯 웃으며 움직거리는 아이 덕에 간신히 한쪽 매듭을 지었던 리본이 풀리자 해준이 꾸욱,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대리님, 도와드릴까요? 하자 빨리 와보라며 부를 때는 언제고, 가까이 서있는 백기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뜬 해준의 미간이 한 번 더 좁아진다. 영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이다.
“…예진이가 움직여서 그런 겁니다.”
“예?”
“리본 묶을 수 있습니다. 저.”
“…아, 예.”
남 탓은커녕 다른 사람의 잘못이 명백한 것까지 모조리 자기가 뒤집어쓰는 성격이 언제나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던 해준이 리본하나 가지고 아이의 움직임 핑계를 대는 모습이 퍽 어색해 괜히 간질거리는 한쪽 볼을 긁은 백기가 아이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려 세운 뒤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이번엔 엄마다! 밝게 소리치며 백기의 목을 껴안고 이곳저곳 뽀뽀를 날리는 예진에게 웃어준 백기가 해준의 손가락에 달랑 걸쳐있던 얇은 리본을 빼앗아들었다. 손에 힘을 줄 틈도 없이 어느새 빠져나간 리본 끈을 미련이 뚝뚝 넘치는 눈으로 쳐다보는 해준을 알았지만 백기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이러다간 끝도 없을 것 같으니까.
아이를 달래 반듯하게 서도록 한 뒤 엉성하게 세워진 원복 셔츠 깃을 똑바로 정리하고 리본 끈을 둘렀다. 리본 양쪽 길이를 얼추 비슷하게 맞춘 뒤 한번 매듭을 짓다가 옆에서 집중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해준을 곁눈질했다. 머쓱한 시선이 맞닿고 백기가 고민하다 지나가듯 가볍게 말을 흘린다.
“매듭을 한번 묶으셔야 리본이 안 움직이고 쉽게 모양을 잡을 수 있어요.”
…설마 훈계하는 투로 들릴까 조심했음에도 팔짱을 끼며 아이의 옷깃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해준의 표정이 영 밝지 않아 백기가 한숨을 뱉는다. 괜히 불똥 튀지 말아야지. 한쪽 끈을 둥글게 말고 반대쪽 끈을 돌려 능숙하게 리본을 만들어낸 백기가 모양을 점검하며 끈의 길이를 조절하는데 해준의 팔이 불쑥 뻗어진다.
어? 흠칫 몸을 뒤로 빼기 무섭게 백기가 쥐고 있던 끈을 잡아당겨 리본을 다시 풀어버리는 해준의 행태에 백기는 불쑥 화가 솟았다.
“…대리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가만히 서있는 것이 영 지루한지 풀린 리본 줄을 꼼지락 거리며 풀어버리려는 아이를 한손으로 안아 제 앞으로 끌어당기며 해준이 작게 중얼거린다. 너무 작게 속삭인 탓에 예? 되묻는 백기를 바라보는 해준의 얼굴에 가득한 불만은 풀릴 줄을 몰랐다.
“…매듭 묶고 나서 어떻게 하는 건지는 왜 안 알려줍니까.”
“…예?”
나 참 별. 어이가 없어선. 듣는 둥 마는 둥 하기에 듣기 싫은가 보다 싶어 설명하지 않고 후다닥 리본을 만들어 버린 게 영 불만이었는지 얼굴에 삐딱함이 가득이다. 허, 혀를 차고 가만히 바라만 보자, 해준이 아무런 말없이 단정한 손으로 서툴게 리본의 매듭을 만들어 낸다. 나중에 풀 것을 감안해서 아주 세지는 않게. 아까 백기가 설명해 줬던 딱 그 단계까지. 그리곤 다시 백기 쪽으로 향하는 시선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함까지 묻어나는 듯 했다.
“빨리 알려줘요.”
…아 예예. 결국 유치원 버스가 올 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리본 묶기가 끝났다. 원복의 필수 구성품도 아닌 얇은 리본을 신경 쓰느라 아이의 외투며 신발, 가방 따위는 백기의 팔에 달랑 달랑 걸쳐져 있었다.
다급하게 아이를 들쳐 업고 나가 버스에 태운 뒤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힘겹게 집으로 들어오자 보이는 건 태연하게 백기가 차려둔 아침밥을 먹고 있는 강해준. 그 아무 일 없는 듯이 고요하기만 한 얼굴이 얄미워 백기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기 무섭게 슬쩍 빈정거린다.
“왜 또 리본에 꽂히셔가지고요. 오늘은.”
“…뭘 또 꽂힙니까.”
“그렇잖아요. 대리님 요즘 매일 그러는 거 아세요?”
“…….”
“어제는 예진이랑 양말가지고 씨름하느라 버스 놓쳤었잖아요!”
“예진이가 자꾸 검정색 양말을 신는다지 않습니까. 내가 흰색 레이스 양말 사놨는데.”
“예진이는 그런 샤방샤방 공주님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제가 몇 번이나!”
“그래도 예진이만큼 예쁜 아이가 어디 있습니까. 옷도 머리도 발끝까지도 공주처럼 꾸며야죠.”
“…대리님.”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맞은편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는 백기를 모른 척 하며 해준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피곤할 때나 가끔 울리던 골이 욱신거리는 게 이러다 만성 두통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아니 아이가 말썽을 부려서 골이 아픈 거면 그래, 아직 어린아이니까 어쩔 수 없겠거니 하고 넘어가겠는데.
평생 저가 챙길 일 없고 잔소리를 들으면 들었지 할 일은 없었던 해준이 자꾸만 백기의 의견에 반기를 들고, 어이없는 고집을 부리는 게 요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래요 대리님, 예진이 예쁘죠! 그럼요. 누구 딸인데요. 그런데 자꾸 원 버스 놓칠 뻔 하고, 아슬아슬하게 등원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차도 있는데 버스 놓치면 데려다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요. 통원버스는 뭐 공짜에요? 전부 원비에 포함 된 거잖아요 대리님.”
“그럼 통원버스 신청 취소하세요. 앞으로 우리가 데려다주죠.”
“…대리님.”
백기가 꾸짖듯 낮게 깐 목소리에도 뭐가 문제냐는 듯 쳐다보는 해준에게 뭐라 따져봤자 다툼으로 이어질게 뻔해 백기가 지끈 울리는 미간을 매만지며 차근차근 차오르는 분노를 한 번 더 억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