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자재실은 (for. cherry)
[해준백기] 자재실은 (체리쨔마 달성표 보상)
w. 박두부
규격에 안 맞는 자재들이 다 섞여 있잖아요. 내가 말했을 텐데. 이러면 급할 때 어떻게 찾아 쓸 수 있겠습니까?
찬바람만 가득 남기고 떠난 해준의 뒷모습에 몸을 떤 백기가 닫힌 문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역시나 저가 틀렸던 걸까.평소에도 종종 듣던 말이지만 그날따라 묘하게 가슴을 울렸던 해준의 ‘내일 봅시다. 한마디에 백기는 헤드헌터에게 전화를 걸어 면접을 취소했다.
아니 물론, 그 내일 봅시다. 다섯 글자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그 문장이 백기의 가슴을 강하게 쳐 올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회사에 남기로 마음 먹은 지 아직 24시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금 스멀스멀 차오르는 퇴사 욕구를 발끝 언저리 즈음으로 간신히 밀어 눌렀다.
하아, 한숨을 쉬며 무릎을 굽혀 앉은 백기가 철강 샘플을 크기에 맞게 분류하려 손을 뻗었다. 그러다 손가락에 자재들이 서늘하게 달라붙어오는 느낌에 황급히 손을 빼냈다. 겨울의 서늘함에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건 비단 공기뿐만이 아니었나보다. 혹여나 철에 변형이 일어날까 평소에도 조금 서늘하게 유지되긴 하지만 겨울이란 걸 간과했던 백기의 손가락이 얼음장 같은 자재에 닿아 후끈 울렸다. 목장갑을 꼈어야 했는데. 그제야 노란색 바구니에 걸쳐있는 손바닥 부분이 오돌토돌한 장갑이 눈에 들어온다. 후우, 되는 게 없구나. 심란함에 고개를 한번 주억 한 백기가 뒤늦게나마 장갑을 끼려 손을 뻗은 순간 문이 열리고 해준이 들어섰다.
“-장백기씨, ...왜 그럽니까?”
“아, 어.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장갑만 끼..고.”
“장갑 꼭 껴야합니다. 이 시기엔 차가워서 손이 붙으면 피부가 벗겨질 수..., 손 줘봐요.”
“....네?”
“손 줘보라니까.”
성큼 한걸음 만에 다가온 해준이 백기의 양 손을 쥐어 꼼꼼히 살핀다. 조금 좁았던 미간이 백기의 손가락 피부가 벗겨져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 깊은 주름을 만들어냈다. 그에 괜스레 난감해진 백기가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려 해도 더욱 단단히 죄여오는 해준의 손아귀 힘을 이기기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그렇다고 억지로 밀어낼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백기의 눈이 해준의 목덜미 언저리 즈음을 헤매다 바닥에, 그리고 다시 잡혀있는 손목 즈음에 박혔다. 살이 벗겨진 건 손가락인데 어찌 더 화끈거려오는 건 손목인지.
“...대, 대리님. 별로 안 아픈데요.”
“아픈 게 문제입니까? 살갗이 벗겨졌잖아요.”
“그, 저…….”
“이렇게 미련하게 굴 겁니까?”
다친 건 백기 저인데 어찌 이리도 예민하게 굴어오는 건지. 뽀얀 이마에 불쑥 솟으려던 힘줄을 애써 가라앉힌 백기가 딱딱한 음성과 함께 해준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비틀어 꺼냈다.
“...대리님이 신경 쓰실 거, 아니지 않습니까.”
뱉어놓고 금방 후회하긴 했지만, 해준의 굳은 표정에 실언했다 인정하기도 애매한 분위기가 되었다. -으 서늘해. 아까까진 별달리 추위가 느껴지진 않았는데 해준의 눈빛 탓인지, 저의 실수에 삐죽 등허리 쪽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탓인지 백기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해준의 날선 눈빛이 조금 풀리고, 그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팽팽하게 조이던 긴장감이 풀린 게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자 해준이 백기를 가만히 쳐다봐온다.
“-알겠으니까, 치료라도 하고 와요. 정리는 그 후에 하고.”
“...네.”
얼떨떨하게 대답한 백기의 긍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별다른 말없이 돌아선 해준의 등이 묘하게 처진 듯 보여 백기의 가슴이 쿡쿡 찔려왔다.
*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차가운 금속 표면에 겉피부가 완전히 붙어 뜯어진 거라며 상처부위에 붕대까지 칭칭 감은 백기가 어색함에 목을 북북 긁었다. 의무실에서 15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마주친 상사며 동기들의 웬 붕대냐는 걱정스런 물음에 별거 아니라 손을 붕붕 저은 백기가, 방금까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끈질기게 어디 다친 거냐며 찡찡거리던 석율을 간신히 16층으로 올려 보내곤 난감함에 머리를 털었다. -그냥 밴드 붙이면 되는데. 낯간지러운 관심에 스멀스멀 기분이 좋기도 하다가 민망하기도 해 애꿎은 붕대부근만 손톱으로 북북 긁었다.
제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자켓을 건 백기가 힐긋 해준의 자리를 봤지만 단정하게 책상에 밀려들어가 있는 의자만 보일 뿐이었다. 어디 가셨지. 아까 전 저를 걱정해준 게 분명한 해준에게 날카로운 말을 뱉은 게 영 걸려서 얼른 치료 받고 왔다는 걸 보이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해준의 책상 쪽을 바라보며 기웃거리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장백기씨, 왜요.”
“! 아 강대리님.”
“무슨 할 말 있습니까?”
“그, 어…….아닙,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우습긴 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붕대감긴 손가락을 내밀고, 강대리님 말씀대로 치료했어요. 잘했죠? 할 것도 아니었는데. 민망함에 손가락을 등 뒤로 숨긴 백기가 헤죽, 앞니가 톡 튀어나오는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해준의 몸이 움칫 떨린 것 같았지만 찰나의 순간이라 백기는 확신이 서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럼. 전 마저 자재실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성큼성큼 제법 씩씩하게 걸어가는 백기의 등이며 허리, 동그란 뒤통수를 쭉 훑어보던 해준이 하, 막힌 숨을 터뜨렸다.
*
이제는 착실하게 낀 목장갑을 손목까지 단단히 끌어올린 백기가 널려있는 노란 바구니들과 샘플들을 보곤 팡, 손바닥을 맞붙여 울렸다. 으쌰, 열심히 하면 한 시간이면 끝나겠지. 단단히 결심한 입매가 곧았다.
규격에 맞는 파이프끼리 차곡차곡 겹쳐 쌓고, 비닐이 뜯겨 한두 개가 빈 탓에 덜렁거리는 자재들은 포장 비닐을 버리고 바구니 바닥부터 줄을 세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 방은 잘 치우지 않는 백기는 묘한 편집증적인 성향이 있었다. 줄 맞추고, 똑바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거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달까. 여러 번 묵직한 자재들을 들고 높은 선반에 쌓느라 허리가 울려와도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가는 자재실에 뿌듯한 마음이 들어찼다.
이제 바닥엔 두어 개의 파이프 뭉치만 놓여있었다. 흐뭇하게 비닐을 뜯어 정리하는 백기의 귓가로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놀라 어깨가 팔짝 뛰자마자 철컥하며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가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보이는 해준의 모습에 백기가 벌떡 일어나 어정쩡하게 선 자세로 고개를 꾸벅였다.
“...강대리님?”
“다 끝나갑니까?”
“어, 네. 금방 끝납니다.”
“그래요.”
...? 그게 끝인가? 별다른 말없이 백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는 해준에 어찌해야할지 허리를 굽혔다 폈다 어색하게 몸을 움직인 백기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해준에 결국 쭈뼛거리며 허리를 굽혀 파이프를 쌓기 시작했다. 계속 문가에서 팔짱만 끼고 바라보는 해준에 자꾸 긴장돼 몇 번이고 파이프를 놓쳤다. 결국은 동그란 원통모양의 자재가 데굴 굴러가려는 걸 손을 뻗어 잡으려는 순간 훅, 등으로 묵직한 무게와 온기가 백기를 덮쳐왔다. 그리고 귓가에 내려앉는 후끈함.
“-도와줄까요?”
“네! 네? 아, 아니 괜찮습,”
“-부사수를.”
느릿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현저히 낮아 백기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 말캉한 혀가 백기의 귓속을 파고들어왔다. 힉,
“돕는 것도 사수의 역할이죠.”
“...대, 대리님. 왜 이러십…….”
“백기씨가 다쳤으니 도우려는 거 아닙니까.”
“....윽, 아!”
말과는 별개로 귀를 뭉근하게 핥아오는 혀에 백기의 목덜미가 움츠러든다. 서늘한 공기에 차게 식은 귓가가 뜨거운 혀에 눅진하게 풀리고 백기의 입에서 입김이 터졌다. 무릎이 풀려 주저 앉을뻔한 걸 간신히 손바닥을 짚어 지탱하자 팽팽히 당겨진 셔츠에 유려한 날개 뼈며 등에 패인 골이 예쁘게 드러난다. 해준이 귓불을 빨아올림과 동시에 양손으로 백기를 감싸 안듯 허리부터 쓰다듬어 온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오는 손길이 닿는 곳부터 화끈 열이 퍼져 올라오고, 바들바들 떨며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어 잘근거리던 백기가 제 가슴 끝을 찔러오는 양 손가락에 기어이 신음을 뱉었다. 그에 만족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목덜미에 입술을 댄 해준이 그대로 뱉은 음성이 너무도 낮고 뜨거워 등허리가 쭈뼛 세워졌다. 몸이 공포와는 별개로 묘한 기대감이 자꾸만 차올라 백기가 난감함에 몸을 바르작거린다. 별다른 힘을 주지 앉았음에도 묘한 압박감이 가득한 해준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백기가 눈을 질끈 감았다. 파르르 백기의 눈가가 떨렸다.
“...백기씨가 예쁘게 웃은 게 잘못입니다.”
*
(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