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우리 아빠 둘 4

 


 

백서의 어린이집 가방을 소파 밑쪽에서 간신히 찾아낸 백기가 어제 밤에 집에서 보내는 말을 작성하느라 식탁에 널브러져 있던 알림장을 넣고 여벌옷을 지퍼 백에 꼼꼼히 집어넣는다. 어제 연락도 없이 집에 불쑥 찾아오신 어머니 덕에 집안이 온통 뒤집어진 터라 말만 그렇지 백서의 옷가지며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침까지도 정신이 없던 백기는 평소보다 더욱 부산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이 팅팅 부은 채로 포크로 찍은 바나나를 야무지게 씹던 백서가 아빠아. 말끝을 늘여 백기를 부른다. 원복을 챙기느라 바쁜 백기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강 대답하자 서운한지 볼을 퉁퉁 부풀린 뒤 어린이용 의자위에서 발을 쿵쿵 굴렸다.

 

아빠아!!”

“!! ! 어어, 백서 불렀어?”

여기, 여기이. 옆에 앉아요.”

? 아빠 지금 좀, 바쁜데..?”

백서 옆에에. ?”

 

난감함에 백서를 둘러보던 백기가 잔뜩 널브러진 소파 위를 바라본다. 오늘 쓸 회의 자료며 가방, 백서의 원복, 기껏 넣은 알림장이 삐죽 튀어나와있는 가방들이 정신없이 널러져있었다. 벽 한편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여유부릴 틈이 없었다. 서류를 대강 정리해서 제 서류가방에 넣고 백서의 옷이며 알림장을 어린이집 가방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원복을 챙겨 식탁으로 다가간 백기가 아이가 여전히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입을 내밀고 포크만 우물거리던 백서가 환하게 웃으며 백기에게 팔을 뻗어온다. 그에 웃으며 백서를 마주본 백기가 한 번 더 시계를 바라보곤 백서 쪽으로 의자를 끽 당겨 앉았다.

 


백서야, 다 먹었으면 옷 입고 어린이집 갈까?”

아빠. 그럼 아빠는?”

아빠는 회사가야지.”

백서 안가.”

? 어린이집? 가야지 백서야.”

백서 오늘 아빠랑 같이 있을 거야.”

오늘 따라 왜 그럴까……. 아빠 오늘 바쁜데 얼른 나가자 아들.”

백서 오늘 안가고 싶은데.”

일어나세요.”

 


백기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자 포크를 접시위에 얌전히 내려놓은 백서가 천천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통통한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가 다시 뱉었다가, 아랫입술을 이빨로 꾹꾹 씹던 아이가 기어이 속상함을 못 참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우는 와중에도 백기의 굳은 표정이 걸리는지 행여 소리라도 낼까 입을 꾹 다문 아이가 애틋해 백기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대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췄다. 마주 바라봐온 아이의 맑은 눈에 고스란히 담기는 제 굳은 얼굴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침부터 아이를 울리기나 하고. 장백기.

 


“...백서야.”

아빠,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아니야, 아빠도 미안. 아빠가 급해서 백서한테..., 미안해.”

 


그리고 아이의 포근한 몸을 끌어안은 백기가 조금은 뜨끈한 아이의 목에 턱을 살짝 비볐다. 목덜미에 팔을 감고 쪽쪽 백기의 볼에 뽀뽀를 날리는 백서의 귀여운 행동에 백기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한번 꼭 안고는 백서의 입술이며 콧잔등에 입술을 마구 내렸다. 그에 헤죽 웃는 아이에 조금 안심하며 백기가 백서와 눈을 다시 맞췄다.

 


백서 오늘 그럼 어린이집 가지 말고 할머니 집에 가있을래?”

할미 집? 아빠느은?”

아쉽게도 아빠는 오늘 회사에 꼭 가야해서. 대신 일찍 올까?”

! 일찍 오세요! 아빠 나 어린이집 갈게요. 데리러 오세요. 일찍

그럴래? 알겠어. 아빠 일찍 데리러갈게.”

 


그에 새끼손가락을 핀 손을 슬쩍 내밀며 웃 아이의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 며칠 전에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약속도장을 보고 궁금해 하기에 알려줬더니 잊지 않고 따라 해오는 게 마냥 귀엽고. 꼭꼭, 약속해. 복사에 도장까지 하고 마무리로 입술에 촉, 뽀뽀를 내리자 백서가 헤헤, 이를 보이게 웃고는 스스로 원복을 입는다. 물론 셔츠에 간신히 팔을 끼곤 슬금 백기에게 단추를 끼워 달라 다가오긴 했지만.

 


*

 


장백기씨, 회의자료 프린트 했습니까?”

, . 10부 복사해뒀습니다. 강대리님.”

그래요. 아 오늘 차과장님도 회의 들어가신다고 아까 연락 오셨습니다. 한부 더 복사해서 철 해두세요.”

!”

 


문서를 순서대로 모아 한부씩 철하고 있던 백기가 다급하게 문서 한부를 들고 탕비실로 뛰어갔다. 회의 시작까지 아직 삼십분은 남았지만 서류를 정리해서 회의실에 두고, 물도 임원들의 수마다 올려놔야하고 프로젝터도 잘 연결이 됐는지 확인하는 것 까지가 회의준비에 속해있는 거였기 때문에 백기는 자료문서를 한부 더 복사하며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에 순서를 매겼다. 자료가 다 복사 되면 들고 회의실로 가서 프로젝터 확인하고, PT 순서가 올바르게 되어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음향도 꼼꼼히 살펴야 할 터였다.


오늘은 철강 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한 프로젝트의 발표 날이었기에 백기는 물론이거나 와 철강팀 내부도 뾰족하게 날이 선 느낌이었다.


실수가 있으면 곤란하니까. 복사되어 나온 문서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백기가 부산스럽게 자리로 돌아왔다. 우웅. 마침 울리는 핸드폰에 찍혀있는 번호가 낯설다. 저장되어 있는 번호도 아니고 이 바쁜 시국에 모르는 번호를 받아 상대할 여유는 없다 생각하며 백기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뒤 사무실 책상 한편으로 밀어 두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또 연락 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백기가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달랑달랑 팔뚝에 걸쳐있는 두툼한 11부의 자료뭉치가 버거울 법도 하지만 다시 잘 추슬러가며.

 


*

 


웃음과 격려가 오가지만 서로 제 쪽의 이득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고자 잔뜩 날이 서있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회의는 끝났다. 다행히도 철강팀이 오랜 시간 준비한 보람은 있는 결과를 얻었기에 차과장도 강대리도, 홍대리도 그리고 분주하게 회의 내내 뛰어다니던 백기도 어깨에 힘을 빼고 간만에 밝게 웃을 수 있었다. 끝나도 팀의 막내에겐 완전한 끝이 아니기에 백기는 널브러진 서류들을 한곳에 모으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이리 큰 규모의 회의에 참가하는 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백기는 등허리가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했었다. 풀린 마음과 동시에 덮쳐오는 어깨며 등, 목 쪽의 찌부드함을 제법 여유 있게 견디며 백기가 막 회의실 의자를 정리하려 할 때 누군가의 온기가 어깨에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휙 돌리자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은은하게 입 꼬리를 올린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해준의 모습이 보였다.

 


, . 강대리님.”

수고 많았어요.”

“..., ! 감사합니다!”


 

잠시간 벙찐 정신을 급히 차리며 백기가 허리를 휙 숙였다. 꾸벅 꾸벅 몇 차례나 인사를 하는 동안 해준이 회의실을 나섰지만 백기는 숙인 허리를 필 수 없었다. 자꾸만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행여나 들킬까 잠시간 입술만 씹고 있다 허리를 마침내 곧게 폈을 때 백기는 입으로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뱉어낼 뻔 했다.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기에 망정이지 회의실에서 터져 나오는 괴상한 비명에 누군가 달려와도 이상치 않을 뻔 했다.

잘게 떨리고 있는 손가락을 빤히 바라본 백기가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었다. 꾹 쥔 주먹이 제법 야무지게 모양을 만들고 백기는 한손은 그대로 입을 틀어막은 채 주먹을 허공에 붕붕 몇 번을 내질렀다. 피로감이고 뻐근함이고 온데간데없이 머릿속에서 퐁퐁 자꾸만 기쁨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기분에 백기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겹도록 칭찬을 들어왔던 백기는 새삼 정식으로 철강 팀에 배속 받은 이후 받은 첫 칭찬임을 상기해냈다. 철없이 칭찬 한마디에 그것도 수고했다. 란 단어 하나에- 기뻐 붕붕거리는 꼴을 누군가 보면 백기의 이미지도 한순간에 무너질 터였지만 백기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자꾸만 해준이 설핏 지어준 미소에 묘한 곳이 떨려오는게 마음에 걸렸지만 단순한 기쁨 탓일 거다 여기며.

 


*

 


부우웅. 회의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조금 더 기쁨을 만끽하다 막 사무실에 들어온 백기가 제 책상이 떨리는 느낌에 그제야 잊고 있던 핸드폰을 떠올리고 손을 뻗었다. 손에 닿자마자 뚝 끊어진 전화에 잠금을 풀자 보이는 건. , 부재중 전화 12? 서둘러 확인하자 두 번 정도 어머니께 온 전화 말고는 전부 같은 전화번호였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봤던 전화임을 확인하고 번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핸드폰 번호가 아닌 지역번호가 찍혀있는 게 영 이상하긴 했지만 여러 번 부재중이 찍혀있는 것에 불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번호를 꾹 터치하자 곧바로 전화가 걸리고 수화기 너머로 여보세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부재중 전화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 혹시 백서 아버님 되시나요?”

? , . 그렇습니다.”

, 아버님 백서가 지금 좀 아파서 연락드렸어요. 계속 안 받으시더라고요.”

“...? , , 잠시만. 잠시만요.”

 


당황함이 그득 묻어나는 백기의 목소리를 듣곤 사무실 여기저기서 시선이 집중되자 백기가 대충 꾸벅 인사를 하고 전화기를 붙들고 다급히 탕비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말씀하세요. 백서가 아프다니요?



백서가 오전간식도 잘 안 먹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낮잠을 자고 일어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영 기운이 없더라구요.”

“..., 어디가.”

체온계로 재보니 지금 38도가 조금 넘어서요 아버님. 아이용 해열제를 먹이고 눕혀뒀는데 자꾸만 아빠를 찾네요...”

“...”

 


너무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해본 적이 얼마만일까. 백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리를 굴리다 이마에 손을 짚었다가 자꾸만 차가워지는 손끝을 꾹꾹 눌렀다. 아버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백서 선생님의 목소리에 파들 몸이 떨렸다.

 


아버님, 그래서 혹시 와서 일찍 아이를 데리고 가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할머님 할아버님도 지금 여행 중이시라고 하시더라고요.”

“..., . 맞습, 아니. ...., 알겠습니다. 금방 갈 테니 조금만 더 돌봐주세요.”

 


맞다. 오늘부터 여행 간다고 하셨지, 그제야 평소 연락도 않으시던 어머니의 부재중이 찍혀 있었다는 게 납득이 됐다. 끊어진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몇 번이나 꿀꺽 꿀꺽 마른 목을 삼켜대던 백기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신경질적으로 쑤셔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자리로 돌아가 책상 밑에 있던 서류가방을 들어 올리고 자켓을 챙기는 모습에 옆에서 서류를 훑어보던 해준이 의아한 눈을 들었다.

 


장백기씨, 지금 뭐하는 겁니까?”

“...”

장백기씨.”

 


해준의 낮아진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백기의 부산스런 움직임이 딱 멎었다. 이제 막 자켓에 한쪽 팔을 끼던 백기의 손이 스륵 내려가고 숙이고 있던 백기의 고개가 천천히 해준 쪽으로 돌아갔다.

어떤 시점이 생각나는 백기의 행동이었다. 신다인씨, 들었죠. 내일까지 하시면 되겠네요. 서류뭉치를 다인의 책상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백기의 부릅뜬 눈이 저에게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을 때.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지는 백기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해준은 드물게도 화가 치솟았었다.웬만한 일에는 그저 무심함으로 일갈했던 해준에게 반항했던 신입은 사실 백기가 처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백기는 얌전한 편이지. 제 책상위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에 밀어 흩뿌리곤 욕설을 뱉으며 그대로 사라졌던 지난번의 부사수를 떠올리며 조금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솟는 화에 해준은 스스로도 놀랐었다. ? 그냥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화를 내곤 멋대로 나가버리는 부사수의 모습을 보다가 무시해버렸으면 될 터였다.장백기도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의지 약한 부사수의 모습에 혀만 가볍게 쯧, 차고 일로 복귀했으면 됐을 터였는데.

신다인씨, 그거 다시 장백기씨 책상에 놔두세요.

 정말 변덕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래 변덕 같은 참견. 그리고 해준은 그 참견을 지금 또 하려하고 있었다.

 


장백기씨, 어디 갑니까.”

“....대리님.”

 


장백기의 목소리에 그득 묻은 당황스러움이 아니었다면 해준은 금방이라도 백기를 다그칠 기세였다. 저를 바라봐오는 백기의 눈에 덕지덕지 묻어나오는 혼란이 아니었다면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습니까. 라며 타박을 할 생각이었다.

 


“...장백기씨, 무슨 일 있습니까?”

 


제 물음에 고개를 슬쩍 젓다가 양 손바닥에 고개를 파묻는 백기의 어깨가 떨리지만 않으면 그리 할 작정이었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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