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한 박두부

3. 강해준과 ???

 

강해준은 소위 말하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을 거쳐 학창시절, 더해 군제대후 곧바로 한 취업으로 상사맨 타이틀을 땄을 때조차 해준의 삶에는 막힘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큰 좌절도 맛본 적 없었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수나 실패 따위도 없었다. 몇몇은 강해준 그 새끼가 운이 억세게 좋은 거지. 라며 시기어린 숙덕거림을 보내긴 했지만, 해준은 운조차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드는 사내라는 건 그들도 결국은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해준은 가히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딱 맞을 만한 모습을 하곤 했으니까.

방에 틀어박혀 며칠간 필요할 때 빼고는 나오지 않더니 결국 떡하니 원하는 성적을 냈고, 원하는 대학을 갔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고. 남들은 들어가기조차 힘들다는 원인터에서 가장 빠른 대리승진까지.
잘 닦아놓은 길을 편안히 걸어가기만 한 게 아닌, 잘 닦아져 있는 길을 저가 더욱 단단하게 견고하게 나무를 덧대고 철심을 박아 튼튼히 만들며 그, 강해준은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결점 -동기들은 그리 표현하곤 했다- 이 있다면 바로 젊은 나이에 생긴 이혼남 타이틀일 터였다. 물론 해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어느 날 해준이 담담하게 저의 이혼소식을 전했을 때 동식은 마시던 술을 뱉었고, 성준은 거짓말 하지 말라며 들고 있던 오이스틱을 해준의 입에 쑤시듯 집어넣었다. 준식은 오늘도 술값을 내지 않으려 슬쩍 걸치던 코트가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한 채로 그저 벙한 표정으로 해준의 얼굴만 살필 뿐이었다. 당사자 빼고는 전혀 괜찮지 않은 분위기의 술자리였지만 해준은 동기들의 반응을 눈치 챘음에도 묵묵히 홀로 술병을 기울여 맑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을 뿐이었다.

어, 야. 자작은 마, 맞은편 사람이 재수 없거든! 하며 술병을 빼앗아간 맞은편 자리의 성준이 해준을 향해 병 입구를 기울이려다 씨발. 욕지기를 중얼거리더니 안 그래도 이리저리 뻗쳐있는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마구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술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 입구를 입술로 머금고는 그대로 꿀꺽 꿀꺽. 야, 야! 말리려는 동식의 목소리에도 점점 더 위로 솟아오르는 술병과 뒤로 젖혀지는 고개가 사뭇 씩씩했다. 결국은 반 가까이 남아있던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성준이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있는 그대로 해준을 향해 보이며 씩씩, 거친 목소리를 낸다.

 

“야, 강해준. 이 새끼야.”
“뭐, 왜.”
“뭐? 이혼? 이혼이라고 했냐. 지금?”
“응.”
“야아, 하대리야. 그만해. 지금 싸움거..”
“그래 싸움 건다. 씨발, 야, 너네도 들었지 이혼이란다.”
“…….”
“야, 강해준. 우린 너 결혼한 것도 처음 듣거든?”

 

그와 동시에 동식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성준의 욕설 섞인 말에 미간만 조금 찌푸리던 해준이 그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고, 해준의 그 얼굴이 성준의 화를 더 부추긴 건 명확한 사실인 듯싶었다. 두툼하게 살집 있는 손바닥으로 술집 상을 쾅, 내려쳤으니까.
옆에서 준식이 성준 덕에 튄 술이 비싼 셔츠에 튀었다며 성질을 부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임을 알아채곤 결국은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뽑아 자국을 스스로 벅벅 닦아냈다.

 

“아, 그랬나?”
“아, 그랬나아? 이 새끼가 진짜 답 없네! 결혼사실 말한 것 보다 이혼소식 말한 게 먼저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야야, 하대리야 진정해. 강대리 과묵한 거 뭐 하루 이틀이냐?”
“야, 김동식. 지금 이게 과묵한 거냐?”

 

어떻게든 성준의 화를 가라앉히고 해준을 두둔하려는 동식과, 그런 동식의 노력 따위 관심 없다는 듯 해준의 무심함에 치를 떠는 성준, 그리고 조금 놀란 표정은 여전했지만 별다른 반응이나 변명 없이 그저 멀뚱히 성준만 바라보는 해준. 참으로 정신없는 풍경이었음에도, 아까 잠시 동요했을 뿐 어느새 코트를 완벽히 차려입고 스마트폰을 심드렁하게 매만지고 있던 준식이 자꾸만 들썩이는 술상에 신경질을 부리며 야채바구니에서 배춧잎 두어 장을 성준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탈탈 털리지 않은 배춧잎이 머금은 물기 덕에 배는 기분 나빠진 성준이 준식을 죽일 기세로 노려봄에도 준식은 빙글 그저 얄미운 미소만 입에 걸 뿐이었다.

 

“그래서, 왜 이혼한 건데?”
“...음, 이혼하자던데?”
“허, 그게 다야?”
“응.”

 

성준의 패악질 따윈 익숙하다는 듯 가볍게 넘긴 준식은 곧바로 해준을 바라보며 덤덤히 질문을 던졌다. 그에 조금은 멍하게 뱉은 해준의 대답이 답답한지 성준은 아프도록 제 가슴을 퍽퍽 쳐댔고, 동식은 그런 성준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안 물어봤어?

 

“새 애인이 생겼대.”
“....뭐?”

 

기어이 못 참고 몸을 불쑥 일으킨 성준이 뭐라 욕설을 뱉기보다 동식의 반응이 이번엔 빨랐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해준의 어깨를 부여잡고 해준아, 그걸 가만히 뒀어? 라며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채 성질을 내는 동식의 반응에 슬쩍 웃은 해준이 동식의 허리를 대충 두드려주며 말라오는 목을 다시금 축였다. 저에게만 집중된 눈 세 쌍이 부담스러워 눈을 슬쩍 내리 깔은 해준이 손을 휘저어 여직 서있던 성준을 앉혔다.

 

“뭐, 이미 서로한테 관심 없던지 오래야. 뭐 별거라고.”
“야, 그래도 너 이혼남 타이틀이 꽤나 크다?”
“애인 생겼다는 걸 가만둬? 아주 콩밥을!”
“아 하성준 오버는 진짜. 떠난다는데 붙잡겠냐? 강해준이?”

 

준식의 타박에 슬쩍 주먹을 쥐었다 편 성준이 계속 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해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무덤덤한 모습.

 

“아무튼 그래서 오늘 도장 찍고 끝.”
“참 쉽게 말한다. 진짜.”
“아이 문제 때문에 좀 끌었던 거지 마무리는 쉽던데.”
“.....아이?”

 

벌써 두 번째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 건 동식마저 충격인지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술을 꾹 깨물다가 통통한 뒷목을 손가락으로 주물거리다가를 반복했다. 간신히 뱉은 목소리는 불쌍하게도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적할 성준과 준식 조차 할 말을 잃은 상태여서 동식의 떨리는 목소리는 꾸역꾸역 목을 타고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자, 자세히 좀 말해볼래 해준아?...

 

*

 

동기들끼리 술만 마시면 간간히 나오는 해준의 이혼이야기는 그들에겐 아직도 나름 핫 이슈였다. 이성에게 관심도 없어 보이는 철벽남 강해준에게 사실은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썰렁한 부부사이에서 난 아이가 어느새 5살이 되었다.
술자리마다 술안주처럼 잘근잘근 씹히듯 반복되는 저의 이야기가 영 불만인지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술만 마시곤 했던 해준 이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불쑥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만큼은 술잔을 내려놓곤 스마트폰을 켜 사진첩에 아예 따로 폴더로 만들어져있는 빼곡한 아이의 사진을 슬쩍 내밀어 보여주곤 했었다.
여전한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묘하게 밝은 얼굴로 자꾸만 입 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해준의 표정변화가 웃기고 신기해서 자꾸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란 것을 해준이 눈치챌 날은 언제일지.

 

“이름이 뭐랬더라? 강..다,”
“강다연.”
“다연이가 올해 5살인거야?”
“응, 예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양쪽으로 묶은 게 제일 귀여운 거 같지 않아?”
“....어, 뭐. 예쁘네.”
“노리지마.”

 

동조하듯 맞장구 친 것뿐인 성준의 말에도 지긋이 노려보며 견제하듯 말하는 해준이 웃겨 다들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행여나 대놓고 웃었다가 강해준이 다시 철벽남으로 돌아가 겨우 풀렸던 차디찬 표정까지 숨길까봐. 이런 모습을 보면 또 나이가 두 살 어린 게 맞는 것 같다가도 액정을 소매로 깨끗이 눌러 닦으며 아이의 사진을 향해 덤덤히 웃어 보이는 모습은 또 애 아빠답게 든든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엔 언제 만난다고?”
“음, 저번 주에 만났으니까 3주 뒤쯤.”
“꼭 한 달에 한 번씩만 만나야해?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잖아.”
“애초에 약속한건 한 달에 한 번씩이야.”

 

그렇게 사진을 애틋하게 바라 볼 거면 아예 만나는 날을 늘리면 될 텐데 또 그건 제 신념에 반하는 일인지 고집을 피워대는 꼴이 영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혼할 당시에도 아내와 헤어진다는 것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해준은 유독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약한 모습을 보였다. 다연의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며 꿀꺽 꿀꺽 술을 삼켜대던 해준이 결국 몸을 무너뜨리고 뱉어내는 숨에 약간의 울음기가 묻어났던 건, 서로 암묵적으로 묻어둔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

 

속이 쓰릴 정도로 먹은 적은 별로 없었는데, 어제는 저도 모르게 동기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 같아 해준은 숙취로 쑤셔오는 속보다는 창피함에 머리를 짚었다. 은근히 저를 동생 대하듯 하는 동기들은 의식적으로 어제 이야기를 피했지만 안타깝게도 해준은 지금껏 아무리 머리꼭지까지 술에 저는 한이 있어도 필름이 끊긴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어제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을 대변해주듯 눈가도 화끈하게 달아올라 욱신거리는 것도 한몫했고.

 

저가 유독 아이에게만은 물렁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는 건 해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사진만 봐도 슬슬 풀리는 얼굴 근육을 붙잡을 틈도 없었고, 일주일에 두어 번쯤 하는 짧은 저녁통화에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연이의 맑은 목소리와 ‘아빠’라는 두 글자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어서 해준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시나 술은 사람의 약한 모습을 너무도 쉽게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물질이었다. 어젠 왜 그리도 다연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던지.

 

후, 깊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털썩 앉자 옆에서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한번 울렸다.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시야 끝에 닿아오는 건 제 부사수. 제 밑에 들어온 지 어느새 한 달 가까이가 되었지만 백기와 해준의 관계는 마치 어제 처음 만난 사람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둘 사이의 대화는 사무적인 것 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무리 철강 팀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부서라 해도 여직 한 번도 해준은 저의 부사수와 따로 식사자리든 술자리든 가진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라고하면 변명이겠지. 솔직히 해준은 제 부사수와 둘만 시간을 가지며 사수-부사수간의 돈독한 정을 쌓을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부서에 배치 받고 인사말을 끝내자마자 이 발칙한 부사수는 곧바로 사업아이템 보고서를 해준의 앞에 들이밀었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표지와 문서양식, 색색 깔로 구분된 표와 차트. 야, 우리인턴 대학교 때 별명이 PT마스터였다더라. 자랑하듯 몇 달 전에 해준의 파티션에 기대서 주절거리던 성준의 말이 다시금 해준의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다.
구성력, 기승전결하며 문장의 첨삭하며.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는. 아니 오히려 별명이 허투루 만들어 진 건 아닌지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된 보고서였다. 그것을 해준은 굳이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중요한건 기본 문제지만.
불쾌해지는 마음을 정리할 틈도 없이 해준은 몇 번 펄럭거려본 서류뭉치를 백기에게 도로 내밀었었다.
대리님? 의아한 듯 동그란 눈이 안경알 밑에서 반짝였지만 해준은 그런 백기의 모습조차 고깝기 그지없었다. 

 

“가져가세요. 읽을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어, 어디가 이상합니까? 철강 팀 사업보고서를 보면서 제 다름대로 아이템을 구축,”
“지금 이건 어디가 이상하고 안 이상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장백기씨. 장백기씨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제가 이야기해줄 것은 없는 것 같네요.”

 

어린아이도 아니고, 26살이라는 청년이 짓기엔 너무도 어린 티가 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겠는지 얼굴이 서서히 붉어져가는 백기의 얼굴을 보면서도 해준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감흥이랄 것도 없이 어쩜 이리도 철이 없을까. 한탄만 했을 뿐.

 

다른 부서에서 해준의 백기를 향한 태도를 소위 ‘배추 절이기’ 라 칭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놓고 성준이 다가와서 배추 좀 그만 절이라 타박하곤 했으니까. 뭐 그것이 해준이 의도했든 안했든 백기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한몫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백기씨, 코트라 자료 프린트 했습니까?”
“아, 네. 여기 있습니다. 대리님.”

 

사소한 복사나 단순한 문서처리를 시키면 눈을 세모꼴로 뜨고 반항기어린 반응을 보였던 제 어린 부사수는 이제 꽤나 차분하고 담담하게 저의 현실을 받아드리는 듯싶었다. 차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자료를 내미는 백기를 보며 해준은 의도치 않은 저의 무시가 이뤄지는 동안 백기가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아직 기본기가 다져졌다고 말하기엔 –해준의 기준으로는- 퍽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백기는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

 

지잉.

 

해외 바이어와의 기나긴 설전 끝에 꽤나 만족스러운 확답을 받아낸 해준은 그제야 긴장감에 잔뜩 세웠던 허리에 힘을 풀었다. 귓가에서 뜨끈해진 블루투스를 빼 서류철 위로 대충 던져놓은 해준이 뻣뻣해진 뒷목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주무르던 중에 핸드폰이 한번 울렸다.
간결하게 울린 진동에 깜빡이는 액정을 가볍게 문지른 해준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시간을 보니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하원해 집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이제 막 글자를 배운다던 다연이 제 엄마의 핸드폰으로 띄엄띄엄 보냈을 몇 자의 글자가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몇 번이고 액정을 달뜬 눈으로 바라보던 해준이 문자를 보관함으로 옮겼다. 몇 번이나 화면도 캡처했다. 그것도 모자란 지 눈을 떼지 않고 하염없이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해준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기의 시선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해준은 마냥 딸아이의 문자에 푹 빠져있었다.

 

[아ㅃㅏ 사랑헤ㅛ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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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준도 5살짜리 딸아이를 가진 아빠였습니다!(반전도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