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점멸
[해준백기] 점멸
“강, 강대리님...”
침묵, 침묵이 이리도 무서운 거였다니. 아니 이건 침묵과는 묘하게 거리가 있었다. 방금까지 저의 눈에 검은 천을 감싸 묶고, 손을 넥타이로 강하게 동여 묶으며 귓가에 쪽, 젖은 입술을 내리던 해준의 소리가 멈춘 건 금방이었다. 정말 사라졌다 라고밖에 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침묵. 푹신한 침대 위에 어정쩡하게 눕혀져 있던 백기가 슬쩍 몸을 일으켰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날아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든지, 하다못해 쯧 혀를 찰 법도 한데 정말로 딱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 백기의 뒷골이 서늘하게 솟았다.
조금이라도, 조금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소리를 듣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지만 백기 저의 몸이 시트에 비벼져 나는 소리라던가 삐걱 이는 침대의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찾아들지 않았다.
차츰 죄여오는 침묵의 무게에 백기가 탁한 숨을 뱉었다. 흐, 하아.
“가, 강대리. 님. 거기, 계시죠?”
강, 강 대리님, 해. 해준씨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 백기가 몸을 웅크렸다. 자유롭지 않은 손 탓에 치솟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지만 백기의 시야를 가린 검은 천이 축축하게 젖어들며 백기의 눈물을 담뿍 머금고 있었다. 두려움에 턱이 달달 떨리는 걸 이를 꽉 묾으로서 다잡은 백기가 이마를 웅크리느라 닿아오는 무릎에 푹 파묻었다.묶인 손을 들어 눈에 가려진 천을 내리려 했지만 극심한 공포감 때문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은 백기를 돕기엔 무리였나 보다.
자꾸만 꽉 쥐게 되는 주먹에 끙 힘을 주어 손가락 두어 개를 펴는데 성공한 백기가 떨리는 손을 얼굴로 올려 검은 천에 막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걸었을 때였다.
쯧, 장백기 씨, 누가 풀어도 된다고 했죠?
날카로운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해준의 목소리에 백기의 떨림이 딱 멈췄다. 천을 어정쩡하게 잡고 있는 손가락을 내릴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백기의 볼에 따끈한 온기가 닿아오고, 갑작스레 들어찬 빛에 눈을 질끈 감자 눈두덩에 촉촉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눈이, 그새 부었네요.”
“...대리님.”
원망의 말을 쏟을 틈도 없이 백기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예상했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해준이 얄미워 백기가 이마로 해준의 어깨부근을 쿵쿵 찍었지만 제 뒤통수를 슬슬 쓸어오는 해준의 너른 손바닥이 좋아 괜히 애먼 코만 훌쩍였다.
“...손, 풀어주세요…….”
“이리 줘봐요.”
세게 묶긴 했지만 그다지 발버둥 치지 않아서인지 자국이 남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꼼꼼히 살피며 넥타이만 매만지던 해준이 손을 잡아 백기를 그대로 뒤로 밀쳐낸다. 의아함과 놀람에 눈을 동그랗게 뜬 백기가 무어라 항의하려 퉁퉁 부은 입술을 벌린 틈을 타 해준의 숨이 훅 다가왔다. 말캉한 혀가 곧바로 백기의 치열을 훑어오자 놀라 히끅, 딸꾹질을 터뜨린 백기를 달래듯 잔뜩 씹은 탓에 부은 아랫입술을 혀로 느리게 핥아왔다. 묶인 손이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은 해준의 셔츠자락을 꾹 잡는 백기에 맞붙은 입술에서 웃음이 터진다.
투정부리듯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백기를 달래듯 다시 혀를 찔러 넣은 해준이 말캉한 백기의 혀를 휘감았다. 촉, 물기어린 소리에 백기가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보기 좋게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입맛을 다시던 해준이 말캉한 혀로 턱에서 목까지 쭈욱 훑어 내려가다 어깨 부근에서 이를 박아 넣었다. 까득 하는 살이 씹히는 소리와 함께 크게 들썩인 백기의 몸을 능숙하게 잡아 누르며 해준이 손을 뻗어 무언가를 쥐어온다. 백기의 눈동자가 덩달아 데루룩 굴러가고 해준의 손가락에 들린 것에 눈이 파르르 떨린다.
“아까, 무서웠습니까?”
“...대, 대리님..”
“무섭기만 한건 아니죠?”
“싫, 싫어요. 싫습니...”
“쉬, 가만히.”
어떠한 제재도 없이 단순한 속삭임뿐이었을 터인데 백기는 우뚝, 바르작거리는 미약한 반항의 움직임을 멈췄다. 흐으, 떨리는 잇새로 여린 숨이 터져 나오지만 해준은 가만히 검은 천을 천천히 백기의 눈 위에 올린다. 축축하게 젖어있던 물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검은 천이 서늘하게 닿아오자 백기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머리칼 사이로 꾹 매듭이 지어지고 시야가 완전히 점멸하자 해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예뻐, 장백기.”
다정한 듯 잔혹한 속삭임 끝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백기의 몸을 훑어 내렸다. 백기는 어차피 소용 없단 걸 알면서도 그저 무의미하게 천 아래 깔린 눈꺼풀을 천천히 내려닫는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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